성장소설 <낭만 10세> (10)
시장도 학교도 온통 초록빛 잔치를 시작했다. 어른들의 손은 슬슬 부채질로 분주해졌다. 이따금씩 아이스케키를 입에 문 아이들도 보였다. 모두들 벌써부터 초여름을 맞이하는 것 같은데 오직 한 사람, 나만이 눈발 휘날리는 겨울학교를 지나고 있었다.
김구단 선생의 ‘초아 미워하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짝꿍이랑 떠들다가 걸리면 짝꿍은 놔두고 “야! 안초아!”, 3분단이 마룻바닥 걸레질을 할 때면 “3분단은 그걸 청소라고 하니? 여기 분단장 누구냐? 그렇지, 안초아!”, 폐휴지 제출하는 날에 내가 신문을 못 챙겨가면 “안초아! 네 집엔 신문지도 없냐?” 등등 헤아릴 수 없이 자주, 공개적으로 내 이름을 불러댔다.
학교만 떠올려도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차오르던 어느 날이었다. 담임은 종례를 마치면서 나를 쳐다보며, 아니 지그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초아~, 3분단장~, 잠깐 남으렴~.”
에구머니나? 해괴망측한 목소리였다. 미끄덩거리는 게 내 귓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얼른 자영이를 향해 눈짓했다. 너희들끼리 먼저 놀고 있으라는 신호였다. 자영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교실을 떠나간 후, 나는 김구단 씨의 책상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래, 초아야, 여기 좀 앉아봐라~.”
말도 안 되게 친절했다. 친절한 구단 씨?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물론 반장 근희에겐 한결같이, 일관되게 친절했다. 어디까지나 부잣집 아이니까.
“그게 말이다, 네 부모님 말이야, 정말 한 번도 안 오시네?”
김구단 씨다운 말본새가 슬슬 재가동되었다.
“형편이 어려운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배울 만큼 배우신 분들이... 교육 현장에 계신 분들이 이러면 안 되지. 자녀 교육에 너무 소홀하신 것 같단 말이다. 네가 아무래도 다음 학기에 반장을... 성적으로 보면 네 차례라는 말이다. 아이들도 너를 잘 따르는 것 같고. 그런데 우선, 내가 부모님을 먼저 좀 만나봐야겠는데... 조만간에, 아니 이번 주 내에 꼭 들르시라고 해라! 알았나?”
그녀는 역시나 위압적 말씨로 끝을 맺었다.
‘죄송한데요, 저희 부모님은 학교에 못 오십니다.’라고 말해야 했지만 그냥 돌아섰다. 1초라도 빨리 그녀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교실을 빠져나와 그대로 교문 쪽으로 달렸다. 자영이와 반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또 희수언니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나는 그 모든 걸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과 오징어게임을 하기엔 내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웠다.
‘말해봤자 소용없어. 엄마는 일하러 나가고, 아빠는 학부모가 교사 찾아오는 거 싫어하는 선생님이잖아. 그래, 무엇보다 우리 집, 알잖아? 육성회비도 제 때 못 내서 맨날 불려 다니는 주제에... 반장은 부잣집 애들이 하는 거잖아. 돈 있어야 한단 말이야.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 엄마 마음만 아플 거야.... 그래도... 반장 하면 재밌겠다. 그치? 이히히, 내가 반장 하면 우리 반 애들도 즐거울 텐데⋯.'
담임의 느끼한 눈빛을 받은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고민은 계속되었다. 풀리기는커녕 갈수록 꼬이고 묶이는 느낌이었다. 결국 ‘그래, 입도 뻥긋하지 말자. 반장은 무슨 반장? 그딴 거 안 해도 돼!’라는 결론으로 고민을 강제 종료했다.
그런데 삼일째 되는 날 저녁, 그만 내 입에서 삑사리가 났다.
“엄마, 담임 선생님이 한 번만 와달래.”
아차 싶었다.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왜? 너 무슨 사고 쳤어?”
콩나물 다듬던 일선 씨의 두 손이 뚝 멈췄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다음 학기에 나보고 반, 반장⋯.”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반장? 그래, 초아랑 반장... 어울려. 네가 그런 건 잘할 거야.”
그 말만 하고 어머니는 다시 콩나물을 다듬어갔다.
‘내가 반장이랑 잘 어울려? 잘할 거야? 잘 어울려. 잘할 거야.’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라 되뇌었다. 한 번, 두 번 반복하는데 따뜻한 물방울들이 내 뺨에서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숙제 다했어? 저녁 먹기 전까지 끝내야지?”
“으응⋯.”
내 몸이 부웅 떠오르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두 팔이 솜사탕이요 흰구름이 되어 내 몸을 떠받쳐 주었다. 반장을 하든 말든, 그건 이제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내 어머니 일선 씨가 내 이름을 보드랍게 불러주었다. 반장감이라고 인정해 줬다. 반장에 어울릴뿐더러 잘 해낼 거라 했다. 와우! 그거면 충분했다. 이미 난 세상 꼭대기에 올라섰다. 반장은 내 발아래 어디쯤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튿날 아침, 희수언니와 함께 등굣길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불러 세웠다.
“안초아, 이거 담임선생님 갖다 드려. 꼭 전해드려야 해.”
어머니는 신문지로 싼 두툼한 물건을 내 가방에 넣어주었다.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가 '안초아'라고 불렀다.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늘 그랬으니까.
학교 정문을 지나려는데 내 발걸음이 바빠졌다. 가방 속 물건이 뭔지 어서 포장을 풀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태극기를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정문 옆에는 언제나 호위무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빼먹거나 지각을 하거나 혹은 용모가 그들 눈에 불량해 보이는 아이들을 색출하고 혼내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을 볼 때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교사라기보다는 군인 같았다. 그들은 '주임' 혹은 '선도'라는 글씨가 선명한 완장을 차고 있었다. 완장이 무서워서라도 아이들은 목청을 높여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쳤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3년째 외치다 보니 어느새 그 문장이 나의 주문처럼 자리 잡았다. 너무 확고한 주문이라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만 같았다. 지키지 않다간 어디선가, 누군가가 짠! 하고 나타나서 벌을 줄 것만 같을 정도로...
그날 아침은 달랐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대충 중얼거렸다. 완장 찬 선생님이 째려보건 말건 부리나케 운동장 구석으로 달려갔다. 수돗가 뒤쪽에 냉큼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가방 속 물건을 꺼냈다. 신문지 포장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었다.
“에? 이게 뭐야?”
신문지 안에서 반짝거리는 물체가 나왔다. 열두 개의 조각도 세트였다. 날 끝의 모양이 제각기 달랐고 손잡이 부분은 은은하고 세련된 빛깔의 목재로 만들어졌다. 손잡이 위에 금빛의 영어 글씨들이 수 놓여 있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이거 혹시... 그거?”
오래전, 아버지가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았다며 들고 온 물건이었다. 미술 분야에 관심이 많은 오빠와 언니는 연신 감탄을 했다. 엄마만 얼굴을 찡그렸다.
“누구 돈 빌려주고는 돈 대신 받아온 거지? 뻔하지 뭐.”
“아니라니까. 선물 받은 거라니까. 한국에선 살 수도 없는 거래.”
아버지가 뭐라 대답했든, 그 답변이 사실이든 아니든 난 조각도 세트가 맘에 쏙 들었다. 특이한 걸 특별하다고 보는 증상이었다. ‘이건 특별한 조각도야. 불독도 이런 건 처음 볼 거야. 좋아하겠지?’
곧 조회 시간이다. 서둘러서 조각도를 다시 신문지로 포장하는데 조각도 아래로 뭔가 깔려있음을 알아차렸다. 흰색 봉투였다. 밥풀로 단단히 붙여있어서 뜯어볼 수가 없었다. 엄마의 평소 교육관을 상기해 보면 담임교사한테 보내는 돈봉투일 리는 없다, 그럴 돈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무엇일까?
3학년에 올라와 모처럼 수업 중에 긴장했다. 언제가 좋을지, 최상의 타이밍을 찾는 중이었다. 반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틈을 노리다 보니 어느새 4교시가 되었다.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두 손은 자꾸만 책상 서랍 안을 드나들었다. 신문지를 찔끔찔끔 만져보느라 분주했다. 그렇게 조급해질 무렵, 고맙게도 김구단 선생이 숙제 검사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한 명씩 차례로, 숙제 공책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내 차례가 가까이 왔을 무렵 반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모두들 칠판에 빼곡한 산수 문제를 공책에 베껴 쓰느라 바빴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그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공책 아래에 조각도 선물을 슬며시 받쳐서 나갔다.
나는 가만히 ‘우리 집표 선물’을 내밀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반색했다. 서둘러 물건을 낚아채서는 뒤로 돌아 신문지를 뜯어냈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두 볼에 분홍빛 동그라미들이 발갛게 피어나는 상상을 했다. 어쩌면 그녀와의 관계가 지금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기대감도 들었다. 그땐 몰랐다, 섣부른 기대는 갑절의 실망을 안겨주기 쉬움을.
김구단 선생이 천천히 돌아섰다. 싸늘했다... 는 말로는 부족했다. 내 온몸이 한기로 부르르 떨렸다. 철천지 원수 사이도 아닌데, 자신이 가르치는 반 어린이를 향해 어떻게 그런 강한 분노를 뿜어낼 수 있었을까?
“어디서 편지 따윌!”
그게 다였다. 구단 씨는 딱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 휙 나가버렸다.
짧은 그 한 마디가 많은 걸 설명해 주었다. 흰 봉투에 관한 내 의문이 풀린 동시에 김구단 선생이 원했던 것이 뭔지 알게 되었다. 속이 쓰려왔다. 술을 마신 적도 없는데, 이른 아침에 숙취로 속 쓰려하던 아버지처럼, 명치 쪽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담임선생의 의자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쪽 마룻바닥에 조각도세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신문지를 펼쳐서 손바닥으로 쫙쫙 폈다. 조각도를 다시 싸서 집으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차피 거기에 두었다간 담임한테서 구박만 받고 버려질 게 뻔했다. 그때였다.
“야! 너 왜 아직도 거기 있어?”
천둥 같은 호령이 내 뒤통수에 꽂혔다. 반 아이들은 전부 일어나서 앞쪽으로 고갤 내밀었다. 어리둥절해서 일어나는데 내 손에 조각도세트가 들려 있었다.
“이, 이거요, 엄마가 선생님 드리는 건데 바닥에, 엇!”
언제 내 코앞까지 왔는지, 그녀가 조각도세트를 홱 낚아챘다. 그리곤 그것을 책상 위로 던지며 말했다.
“별 그지 같은 걸 다 가져와서는”
그 말은 내 귀가 아니라 심장을 깊숙하게 찔렀다. 귀에선 ‘별 그지 같은 걸’ 이 반복해서 들렸다. 입에선 딱딱딱 치아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 어떻게,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요? 그지 같다고요? 아무리 선생님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죠. 어떻게 저를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하세요? 우리 집이 그렇게 그지 같아 보이세요? 선생님이 미술을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이거 프랑스에서 온 거랬어요. 울 오빠도 그랬어요, 진짜 좋은 거라고요. 그리고 울 엄마가요,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데요. 그래도 정성껏 편지 쓴 거잖아요. 왜요, 흰 봉투에 돈이 안 들어서요? 그래서 열받으셨어요? 선생님, 그러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 나빠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말하는 방법은 몰랐지만 그런 분위기라도 드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 바람과는 딴 판이었다.
“으으... 선생님... 그지... 어엉... 나빠요... 어엉...”
열 살 초아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꺽꺽거리며 흐느꼈다.
“시끄러! 같잖은 게 어디서 행패야?”
그녀는 막대기로 내 이마를 꾹꾹 찍어 누르면서 말했다.
“니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그렇게 가르쳤냐고?”
흡!
탁!
두 가지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내 울음이 '흡' 하며 단번에 그쳤고, 내 두 손이 김구단 선생의 막대기 끝을 '탁' 움켜잡았다.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콧물눈물범벅으로 울기만 했는데, 담임이 내 어머니를 욕하자 갑자기 내 감정선이 변해버렸다. 불독 거인이 갑자기 하찮은 조무래기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유치하고 치사해 보였다.
“뭐, 뭐야? 이거 놔! 안 놔?”
“아더메치유! 선생님! 아더메치!”
“뭐, 뭐라고?”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하고! 메, 메”
“이게 미쳤나?”
철썩! 혹은 퍽!
담임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얼굴을 휙 걷어찼다. 곰발바닥으로 맞는 것 같았다.
"꺄악!"
“쾅!”
반 친구들의 비명과 내가 넘어지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내 머리가 뭔가에 부딪힌 것 같았다. 눈앞에서 별들이 날아다녔다. 소풍 때 근희가 가져오던 칠성사이다병의 하얀 별들이 내 눈앞에 보였고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양호실 천장이 보였다. 학교에 입학한 지 두해 반 만에 양호실이란 곳에 처음 누워있었다. 왼쪽 얼굴, 머리 쪽이 다 욱신거렸다. 양호 선생님은 얼굴도 안 보였다. 의리의 친구 자영이만 곁에 있었다. 자영이는 차근차근 아까의 상황을 들려줬다.
김구단 선생의 손바닥 펀치를 맞고 넘어지다가 그만 책상다리에 머리를 부딪힌 것이었다. 담임은 당황했다고, 기절한 나를 보고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고, 처음엔 달리기 잘하는 석준이한테 양호 선생님을 빨리 모셔오라고 했다고, 근데 석준이가 다녀오길 기다리지 못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고. "누가 얘 좀 업어! 업으라고!" 그때 갑자기 근희가 나섰다고. "선생님! 반장이 업겠습니다!" 그러더니 번쩍, 아니 살짝 비틀거리면서 나를 업고는 양호실까지 달려왔다고.
“근희가?... 내가 걔보다 크지 않니?"
"... 근희가 큰데?"
"... 아, 맞다! 메가 뭐였지? 메를 잊어버렸어. 아더메치에서 메가..."
"... 메스껍고."
"아! 그래, 메스껍고... 그게 왜 그렇게 생각이 안 났지?"
자영이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손으로 내 이마와 자기 이마를 번갈아 짚어볼 따름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뭔가를 떠올렸는지 내 귓가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있잖아, 아까 불독이 진짜로 놀랐나 봐. 덜덜 떨었다니까. 그리구 근희 있잖아, 걔가 너 업고 왔어. 불독이 뒤따라 오는데 얼굴이 시뻘게서. 미안해서 그런 거겠지? 그치?"
그럴 리 없었다. 미안해할 담임이 아니었다. 그가 놀라건 당황하건 미안해 하건, 상관없었다. 내 부은 뺨을 어루만질 따름이었다. 누군가한테 그렇게 맞은 게 처음이었다. 얼굴 전체가 아팠지만 가슴속 통증에 비하면 별 거 아니었다. 저런 사람이 교사라는 게 너무 분하고 싫었으니까. 불독이 큰 벌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벌을 줄 방법이 보이질 않았으니까. 그나마 김구단 씨 앞에서 '아더메치!'를 있는 힘껏 외쳐서 다행이라 스스로를 위로해 봤지만, 이내 슬퍼졌다.
1976년 무렵,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집이나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폭행당했다. 중고등학교에선 더 심각한 폭력이 자행되었다. 교사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도 맘껏 체벌을 가하곤 했다. 훈육 차원이 아닌 범죄 수준의 폭력 행사도 일어났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교사는 그래도 된다고 여겼으니까.
학교 안에서 ‘그래도 되는’ 폭력은 없는데 말이다. 사제지간이든 학생들끼리든, 가해자는 ‘별 거 아닌’ 장난이나 습관이었다고 변명한다. 반면에 피해자는 아주 오랫동안, 때론 죽을 때까지 그때의 아픔을 놓지 못한다. 온몸과 영혼이 그날을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 피해자 자신을 짓누르고 괴롭힌다.
열 살의 초아도 그랬다. 누구한테 맨 손으로 얼굴을 맞는다는 거, 그것도 어린아이가 힘센 어른한테 맞는다는 거, 그것도 보호하고 지켜줄 책임이 있는 가까운 어른한테 맞는다는 거... 정말 억울하고 화가 나야 할 일인데, 그보다는 창피했다. 반 친구들 앞에서 그런 일을 당한 게 정말 싫었다. 힘과 낭만이 넘치던 나의 열 살 시절에 박힌 점이다, 시커멓고 보기 싫은 점...
‘댕댕댕....댕’
의상실 벽시계가 아홉 번 울렸다. 어린이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는 아홉 시. 수주와 나는 불 꺼진 의상실 한쪽 구석에 붙어 앉아 있었다.
“엄마...한테 얘기했어?”
수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래. 말하면 뭐 하니... 속만 상하시지.”
“울 엄마 일찍 주무셔...”
“... 그래. 모르시는 게 나아. 초아야.. 얼굴이 아직 부어 있어.”
“... 불독한테 그 말을 끝까지 못 해서 속상해.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그걸 막히지 말고 쭈욱 말했어야 하는데”
“길잖아. 너무 길어. 화나는데 언제 그걸 다 말하니?”
“... 그런가?... 그래두... 나 찐따바보 같아...”
수주가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내 뺨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해. 찐따바보는 불독이야. 너네 담임이 오늘 억세게 운이 좋다. 너한테 해선 안 될 말을 했는데 벼락도 안 맞았잖아. 참 나쁜 짓을 했는데 말야.“
깜짝 놀랐다. 이 친구는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수주. 그 친구가 나랑 같은 열 살 아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때였다.
‘사르르~’
눈이 녹는 소리인지 바람결에 햇살이 내려앉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내 안 어딘가에서 그런 소리가 울려났다.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소리가 가져다준 느낌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수주, 나 학교... 그만 다니구 싶어.”
“... 그러지 마. 니가 왜 학교를 버려? 불독 아줌마만 편해지잖아. 안 돼. 그냥 니가 버려, 담임을.”
“담임을?... 그래, 그래야겠다. 담임을 버릴래. 히히히! 근데... 어떻게?”
“...... 그니까 그건 말이야,... 네 마음에서 지우는 거야, 지워! "
“마음에서 지워?”
“응. 테레비에서 그랬어. ‘난 당신을 버렸어요. 내 마음에서 지웠다고요!’”
“마음에서 지워?”
“그니까..., 그래, 보자기! 보자기 같은 걸로 확 덮어버려!”
“보자기로 덮어?... 그러면 해님을 못 보겠다. 시들시들하다가 말라죽겠네?”
수주와 내 눈이 환희로 반짝였다.
“좋았어! 내 마음에서 시들어 죽게 말야, 야호!”
우린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좋아했다. 물이 흐르듯 따라간 이야기 끝에서 보물을 캐낸 기분이었다. 우리가 발견한 이치가 실제로 어떻게 가능할지는 몰랐다. 무엇으로 보자기를 삼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대체 언제 끝날까 싶었던 긴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가족 모두가 잠든 밤. 희수언니가 깰까 봐 이불속에 누운 채로 기도를 시작했다. 수주가 말한 보자기가 필요했다. 서둘러 그녀를 덮어버리고 싶었다. 보자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은 좀 줘 보시라고 떼를 쓰고 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