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다음에 대관하시는 분들을 위해
반드시 뒷정리를 해주셔야 합니다.
음료수가 남은 채로 컵을 버리시면 안 되고요,
분리배출용 쓰레기통들이 준비돼 있사오니
각 통에 맞게 버리시길요.
퇴실하실 땐
조명, 냉난방기, 스피커, 환풍기 등을
꼭 꺼주세요!
대관예약이 확정된 손님들 앞으로 안내 문자를 보낼 때면,
한 자 한 자 꾹꾹 누르다가 멈칫하곤 했다.
- 이렇게까지 써야 하나? 안그래도 안내문자가 길어서 보내기도 미안한데... 거기에
'반드시', '꼭' 같은 강조의 부사들까지 넣어서? 손님들이 알아서 깨끗하게 쓸텐데...
- 아니야, 정확하게 요청하는 게 서로 좋을 거야...
수시로 이랬다 저랬다 혼란스러웠다.
대관 사업을 시작하고 한 달여 내내 그랬던 것 같다.
대관 전에 컨설팅 받으며 들은 극소수 진상 손님의 예가 너무 강하게 각인된 모양이다.
- 불특정한 고객들 중 어떤 이가 올 줄 알고 맘을 놓나? 그건 성실한 대관업자의 자세가 아니야.
생각이란 게 그렇다.
한 번 '아니다'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면, 눈밭을 굴러가는 눈뭉치처럼, 자꾸만 더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이 커져버리는 이치 말이다.
- 그냥 믿고 편하게 지켜보자. 우리 극단 생각해 봐. 지난 4년 여를 연습실 전전할 때, 어땠니?
연습실 운영자의 안내대로 잘 따랐잖아. 혹시라도 민폐를 끼치진 않을까 싶어서, 연습실을 나서기 전엔
뒷정리에 애를 썼잖아. 성실하게 말야. 우리만 잘 할 것 같아? 아니야, 다른 이들도 다 잘 할 거야,
그러니 염려 붙들어 매.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고 안정시키길 반복하는 중에 어느새 개관 2개월이 지났다.
여러 대관 팀들이 오갔고 다양한 손님들과 살짝살짝 소통할 수 있었다.
모두 다 귀한 경험치로 내 안에 남아 있다. 간혹 연습실 쥔장의 긴장감을 자극하거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손님도 있긴 하다. 앞으로 또 어떤 스트레스유발자가 등장할 지도 모르고. 세상 어디에나 빌런은 존재하니까.
손님들 대부분은 퇴실 시 공간을 이모저모로 살펴주고 뒷마무리도 깔끔하게 완료한다.
아침에 청소하러 연습실 문을 여는 동시에 공간을 휘리릭 스캔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은 슬리퍼 두어 개가 비뚤게 놓여있다. 공간 내 의자들의 위치가 아주 살짝 바꼈다. 음료가 조금 남은 채로 버려진 컵도 보인다. 기껏 그 정도다. 공간은 여전히 반짝거린다. 순간, 튀어나오는 한 마디.
- 역시, 우리 나라사람 만세!
2020년을 도발한 드라마 [부부의 세계]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희대의 망언을 대유행시킨 그 드라마에는 자극적이다 못해 이해 불가한 장면들이 많았지만, 그것들에 밀리지 않고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장면이다.
어느 종합터미널 같은 곳이다. 오가는 사람들 붐비는 그 한복판에서, 현서(심은우 분)는 커다란 여행가방(생존을 위한 탈출가방이라 불러야 맞다)을 내버려둔 채 급히 도망친다. 목숨을 건 추격전이 펼쳐지는 동안, 또 주인공 선우(김희애 분)가 그 가방을 알아볼 때까지, 인파 북적대는 그곳에서 가방은 아무 일없이 그대로 있었다. 희한한 장면이 아닌가?
이 장면을 가지고 '가짜다, 설정일 뿐이다' , '진짜다, 한국이라 가능한 장면이다'라며 자기들끼리 설전을 벌이는 외국 유튜브 영상이 있었을 정도다. 14년 정도를 외국에서 살았던 나로서는 그들의 흥분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대부분의 외국 대도시에서 그것도 인파 북적대는 터미널에서라면? 여행가방이 저혼자 무사하게 자리를 지키는 경우는 미션 임파서블일 테니까.
우리 연습실만 해도 그렇다.
'내가 먼저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겠다며 정성껏 꾸민 덕분에 공간 곳곳에 사적 물품들이 있지만 걱정을 1도 안 한다. 손님들은 아예 관심을 갖지도 않기 때문이다. 상식 선 안에 있는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착한지.
아, 물론 요즘엔 극소수의 몰상식하고 천박한 이들이 득세하고 그에 부화뇌동하는 사기꾼들이 극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우리네 무명인들은 선한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그 선량함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면 좋으련만.
이제 겨우 두 달이다. 연습실 운영한다고 명함 내밀기도 민망스러운 초짜다.
앞으로 어떤 대관팀을 만날 지 모른다. 혹 감당하기 어려운 손님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럴 때면 '대부분'을 기억해내야겠다. 이따금씩 등장하는 빌런에 내 온 신경을 빼앗겨서 속 끓이지 말고 대부분의 착한 손님들 바라보며 살아, 어라?
대관 안내문자 쓰다가 내 생각이 어디까지 날아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