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씨가 제일 힘들다. 허리며 무릎이 욱신거리는 통에 평소보다 움직임이 둔해지기 쉽다. 그래도 몸을 곧추 세워 집을 나선다. 목요일 오전 10시 15분의 한성대입구역. 전철 문이 열리고 내 짧은 두 다리는 파닥거린다. 10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3번 출구 계단 앞에서 냅다 우회전. 약자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갱년기 진입 3년 차에 묵직하게 불어버린 몸매 덕분인가, 파란여우를 향해 걷는 7분이 조금 긴 것 같다. 그래도 나쁘진 않다. 성북천변을 벗해서 걸으니까.
회색하늘 아래서도 시티레트로 느낌의 풍광이 반짝 거린디.
70년대 어디쯤을 붙잡은 듯한 점포들의 외관, 그 틈틈이 들어선 프랜차이즈 카페들, 쇠백로와 외가리가 노니는 개천, 그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나이 지긋한 이들의 씩씩한 산책걸음들. 너무 가난하던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해 안간힘 쓰던 걸음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성북세무서 앞 네거리다. 설레기 시작하는 순간! 몸을 우측으로 돌리면 한성대학으로 향하는 약간의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도심과는 좀 다른 풍광이다. 한적한 도로, 유유자적 흔들리는 연둣빛 나무이파리들, 자동차도 사람도 매연도 소음도 사라진 것 같은 마을. 청량하고 조용하다.
마냥 거리를 즐길 때가 아니다. 잰걸음으로 연습실이 입주해 있는 건물의 출입문을 연다. 계단을 내려가다 만나는 '파란여우는 처음이지? 어서 와!'라고 하는 팻말에 한 번 웃고, 'Bravo 2nd Stage!'가 쓰인 커다란 현수막에 또 한 번 웃는다. 미소 속에 지하 2호실 문을 연다.
문은 활짝 열어둔다, 누구라도 들여다 보면 반갑고 누구라도 찾아오면 즐거우니까.
극단 소속의 어느 배우분이 생활비를 아껴 사준 '마샬' 블루투스 스피커 스피커를 켠다. 요즘 무한반복 재생 하는 노래 'When I Get Old' 볼륨을 올린다.
준비 완료. 긴장되는 순간이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데 잘 해야만 하는 일을 하기 직전의 긴장감이다. 오늘도 어떻게든 해낼 거라 다짐하면서 탈의실로 간다. 노란색 진공청소기. 후우! 큰 숨과 함께 청소기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끙끙대며 끌고 나온다.
나는 청소기를 사용한 적이 거의 없다.
가사노동 중에서도 유독 청소를 멀리 해왔다. 12년 전에 겪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척추랑 다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지 멀쩡했을 때도 이상하리만치 청소와는 친하지 않았다. 노동강도가 훨씬 심한 일들은 감당하면서도, 허리 굽혀 쓸고 닦고 정리하는 청소는 유별나게 힘들어 했다.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고 났으니 그 증세는 더 심해질 수밖에. 그럼에도 집안은 늘 깨끗한 편이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늘 청소를 감당해준 덕분이다. 누군가는 일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결과물을 맛본다. 역시 인생은 그리 공평하지 않은가 보다.
아무튼 누군가의 노동의 댓가를 달콤하게 즐기던 인생과는 아디오스. 21평 드넓은(?) 마룻바닥을 샅샅이, 청소기로 마사지해준다. 청소 시작하기 무섭게 허리 통증이 몰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입가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이게 왠 떡인가 싶으니까. 이렇게 내 눈에 예쁘고 똘똘한 공간이 허락되다니 놀라우니까. 개관 한 달을 훌쩍 넘겼는데도 날마다 새롭고 설레고 실감나질 않으니까.
나이 오십에 새롭게 시작한 연극인 인생.
시민연극교실에서 출발했다. 자생적 연극커뮤니티를 만들었고, 돈이 너무 없으니까 소속 배우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공모사업을 따냈었다. 비록 아마추어 발표회 수준이었지만 매년 공연을 올렸고, 조합 활동도 가열차게 진행했다. 살면서 체득한 강사로서의 말재주, 오랫동안 홀로 훈련한 글쓰기 방법, 나름 타고난 부분이 있어 보이는 연극적 능력을 꺼내 쓰면서 인생 친구들이 생겨났다. 그들과 함께 인생 2막을 함께 연극하면서 또 공동창작하면서 삶의 예술가로 살아가기로 맘 먹었다. 그렇게 태어난 집단이 바로 지금 내가 속한 극단이다.
우리 극단은 사무실이든 연습실이든 공연장이든 자체 공간이 없었다. 늘 연습실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코로나 치하 3년은 더더욱 힘들었다. 13-14명 정도의 인원이 4-5시간을 연습할 공간이 필요했다. 운이 좋았는지 우리에게 호의적인 연습실을 만났다. 50세 즈음에 연극을 만난 늦깎이 배우들과 나는 무대소품과 의상, 연습 때 먹을 간식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녔다. 연습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몸이 지쳐버리기 일쑤였다.
창단 후 3년째인 작년 여름부터는 정말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극단 연습실로도 쓰고, 내 개인 강의 프로그램들도 편하게 열고, 일하러 카페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의 공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날마다 빌고 빌었다. 6개월 후, 진짜 그렇게 돼버렸다. 오매불망 소원하던 나의 공간에서 아침마다 청소기를 돌리고 있다니? 미소가 흘러넘칠 수밖에 없다.
어? 문득 멈춰선다. 내일 모레가 말일?
미소가 냉큼 달아난다. 내일 모레가 말일? 월세 내는 날이 코앞임을 알아차린다. 그토록 바라던 선물을 얻었지만 선물만 온 게 아니였다. 부가세 포함해서 월 77만 원의 월세를 내야 한다. 공간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누리게 하고 싶다면서 호기롭게 장만한 얼음냉온정수기 렌탈비용도 내야 하니까. 인터넷 비용, 전깃세와 상하수도료 그리고 관리비까지, 월 1백만 원은 필요하다. 대관 사업을 제대로 성공시켜야 한다. 개관 후 첫 달 수익은 29만 원. 부대 비용은커녕 월세도 감당할 수 없다. 이래선 안 된다. 현타가 온다. 꼭 이럴 때면 온다, 구름 위를 나는 듯 몽롱한 만족감에 취해있을 때면 어김없이.
자, 없던 힘까지 내서 다시 청소기를 돌린다. 티끌 모아 월세!
주문을 외운다, 띠끌 모아 월세! 입밖으로 절로 튀어나온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읊조리다 보니 어느새 노래처럼 흥얼거리게 된다. 음도 박자도 내멋대로인 요상한 노래지만, 청소기를 밀고 끌고 다니는 대에 안성마춤인 리듬이다.
마룻바닥만 빛을 내선 안 된다, 테이블과 의자도 깨끗이 닦는다. 아직 먼지 쌓일 일 없는데도 열심히. 새삥 자태를 자랑하는 난방기도 닦는다. 빈 신발장도 열어보고 실내화들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테이블 위에 필기도구들과 A4 흰종이들도 챙겨놓는다. 컵과 휴지, 물티슈 같은 일회용품을 보충한다. 입으로는 여전히 노동요가 흘러나온다, 티끌 모아 월세~!
11시 5분 전. 스피커 속 노래를 바꾼다. 차분하게 집중하는데 도움이 될 보사노바 카페음악을 연결한다. 이제 새하얀 테이블 앞으로 가서 새파란 의자에 앉는다. 노트북을 켠다. 대여공간으로 문을 연 이 공간이 어떻게 하면 손님들을 많이 끌어당길 수 있을지, 광고비 1도 없는데 어떻게 입소문을 탈 수 있을까 궁리해야 한다. 문득 노트북 화면에 뜬 파일 목록들에 눈이 간다. '극본작업'... 지나친다. 차기 공연을 위해 새로 대본을 쓰기 시작했는데 말그대로 시작만 한 상태로 멈춘 게 벌써 세 달여. 숨을 깊게 내쉰다. 잠시, 잠시만 이별하는 거니까. 지금은 공간 대여하는 소상공인 역할에 집중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