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푸르스트의 예술사 방법론
'자신의 중년을 예언하는 점성술을 읽고 있는 한 젊은이를 상상해 보라. 다가올 세월과 그 시간이 자신에게 가져다줄 변화를 알지 못하는 채, 그는 장차 마주하게 될 터무니없는 불일치와 부조화를 짐짓 진지하게 대면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점성술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미래’라는 요소를 고려해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판단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예언들처럼 예측 불가능하며, 따라서 실질적인 흥미가 결여된 채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예언자가 지적으로 평범하다는 뜻은 아니다. 가능한 것을 존재하게 하거나 부정하는 힘이 반드시 천재의 능력 범위 안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도나 비행기의 미래조차 믿지 않았던 천재가 있었듯이, 뛰어난 심리학자이면서도 정작 애인의 불성실이나 친구의 배신은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배신은 훨씬 재능이 덜한 사람에 의해서도 쉬이 예견될 수 있는 것임에도 말이다.'
나는 이 우아한 미술사 방법론에 생각에 잠긴다.
자신의 운명이 궁금한 젊은이는 점성술을 본다. 한창 어린 친구들의 입에서 “신점(神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속으로 무척이나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일 분 일 초에도 나, 혹은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단순히 정신적 위로를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행위라고 한다면야 칭찬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의 시간은 다르다. 한참 지난 낭만주의 음악을 현대에 답습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라흐마니노프는 내게 시대착오이자 키치(Kitsch)로 다가온다. 반면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혹은 필립 글래스는 현대의 가치 있는 예술가들이다.
‘서울아트쇼 2025’에 다녀왔다.
전시장에는 왜 그렸고, 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작품들이 가득했다. 그 공간 속에서 문득 맥주 한 잔이 간절해졌다. 예전 어떤 아트페어에서는 주류 회사가 스폰서로 참여해 술을 마시며 관람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오늘날의 예술 중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알기 위해서는 엄청난 통찰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표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행위이다.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면 판단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물론 비판 Judge이 아플지라도 말이다.
나의 글들은 내가 아끼는 작가들,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예술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로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내가 아는 그들은 희미한 성운 속에서 반짝이는 핵과 같다.
지금 현대(Contemporary)의 창작은 신사실주의가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범주 안에 있다. 새로운 세계를 창작하고 유희하거나, 혹은 무엇인가에 스스로 말려들어가 그것을 파괴(Deconstruction)하거나.
다음에도 내가 응원하는 창작자의 작품이 전시되는 곳이 아니라면 굳이 발걸음을 하지 않을 것 같다. 고윤전 작가님과 홍대의 작가님, 이 두 분은 이번 서울아트쇼 2025에서 알게 된 반짝이는 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