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캔버스와 고통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빈 캔버스를 '작품'이라며 내놓은 사건이 있었다. 사기냐 예술이냐를 두고 논란이 무성했지만, 결국 그것은 작품으로 인정받아 가격이 치솟았다.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의 행위나 퍼포먼스 자체도 작품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벽에 붙은 바나나,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적 화풍, 혹은 마오쩌둥이나 마돈나의 이미지를 수없이 복제한 앤디 워홀의 작품들. 사실 이런 것들을 고심하며 들여다보거나 긴 시간을 들여 감상할 필요는 없다. 뒤샹의 변기 앞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으려 애쓸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생활의 맥락에서 벗어나 미술관과 박물관이라는 생경한 공간에 놓인 사물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그리고 그 흥미로움은 곧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예술이란 때로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단 한 번의 일회성 행위만으로도 비로소 '작품'이 되기도 한다.
이런 글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문장이 이어지지 않는다. 13년을 함께한 나의 사랑하는 강아지, 멜루가 멀리 여행을 떠났다.
진부한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나의 삶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 나는 밥도 잘 먹고 출근도 하며, 때로는 웃기도 한다. 멜루와 나만 아는 이 거대한 균열을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순식간에 과거로 편입되었는데, 세상 모든 것은 그대로다. 눈은 펑펑 내리고 바람도 여전히 분다.
지나가는 이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묻고 싶다. 나의 하늘이 무너졌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느냐고. 내 심장이 찢어져 바닥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고. 땅을 두드려 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려 본다. 내 삶의 13년이라는 실타래 위로 흩어진 기억의 잔상들이 보인다.
좋은 곳으로 갔겠지. 멜루야, 다음에 인연이 닿는다면 그때는 꼭 내 아이로 태어나주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