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허스트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요즘 부쩍 철이 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 사소한 것에도 실없이 잘 웃는 편이었는데, 어느덧 웃음의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억지로 웃고 싶지도, 딱히 웃을 일도 없는 상태가 된 것이지요. 누군가의 에세이에서 읽은 “나이 듦의 관용과 수용은 하나둘 포기하는 과정에 있다”라는 말이 비로소 마음 깊이 이해되곤 합니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노력이 뒤따르지만, 때로는 성실함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네 삶을 어떻게 지탱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내려놓음’과 ‘수용’의 관점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으로도 이어집니다. 최근 리크리트 티라바니자가 갤러리에서 카레와 팟타이를 요리해 관람객에게 대접하고 대화를 나누었던 작업의 가치에 대해 고민해 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데미안 허스트나 백남준의 작업을 그리 유의미하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허스트의 작업은 자극적인 보여주기에 치중되어 있고, 백남준의 작업 역시 행위의 참신함도 매체 변주를 넘어서는 작가만의 고유한 언어도 충분히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작업에서는 예술 특유의 감동이나 심미적 아름다움, 혹은 일관된 미학적 깊이를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반면, 티라바니자의 행보에는 현대예술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집니다. 그의 작업은 마르셀 뒤샹이 보여준 혁명의 동시대적 확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뒤샹이 기성품(변기)이라는 오브제의 뒤집음을 통해 예술의 정의를 사물에서 개념으로 옮겨놓았다면, 티라바니자는 요리하고 대화하는 일상적 행위의 뒤집음을 통해 삶의 현장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입니다.
그의 요리와 대화를 예술로 수용하는 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처럼 '전시 공간 자체가 곧 작품이 되는 맥락'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현대예술(Contemporary Art)은 이처럼 그 범위를 무한히 넓히며 주변을 물들이고 있고, 그 경계는 점차 모호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