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살아가는 앎
감정이라는 갈대가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사소한 일에 변덕을 부리고 심지가 굳지 못하다는 것은, 결국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이가 든 어르신들을 뵙다 보면 느껴지는 두 가지 느낌이 있다. 하나는 세월이 그저 몸을 관통해 지나가 버린 듯한 허망함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눈빛이 반짝이는 생동감이다. 전자는 세월 속에서 아무런 지혜를 얻지 못한 채 시간의 강물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 이들이다. 반면 눈빛이 반짝이는 이들은 외양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날지언정, 그 투명한 눈동자로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들에게는 단순히 지식이 많거나 학위가 높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관용'이라는 품위가 배어 있다.
시간에 의해 해체된 듯한 빈 공간에는 감정과 고집, 그리고 외부의 자극들이 멋대로 모여든다. 경험론의 시대라 의미와 지향점이 사라졌다고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순간순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돛대 잃은 배처럼 물결 따라 흘러가 버리기 십상이다. 그렇게 흘러가기만 해도 괜찮다면 다행이겠으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특별한 질서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며 쌓이는 것은 결국 '무질서'뿐이다. 이 무질서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끊임없이 제곱으로 증가한다. 쓰레기가 쌓이고, 살이 찌거나 빠지며, 입을 옷이 없어진다. 혹은 생산적인 경제 활동을 멈춘 채 향락에만 빠진다면 생활 자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삶은 이토록 사소한 것들에 의해 무너진다. '삶'이라는 글자는 '살다'와 '앎'이 더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곤 한다. 대부분은 '살다'라는 행위 자체만 알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삶'이란 '사는 방법'을 깨달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지갑을 정리하다가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멜루의 발자국을 찍어놓은 쪽지다. 멜루가 여행을 떠난 뒤 무엇인가 남기고 싶어 찍어두었던 흔적이다.
어느 날 꿈에 멜루가 나왔다. 눈이 부셨다. 멜루는 원래 유기견 보호소에서 안락사를 기다리던 강아지였다. 그래서 나는 녀석의 등만 보고도 얼른 데려왔었다. 꿈에서도 멜루는 반짝이는 하얀 털과 검은 점박이만 보이는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늘 전까지는 멜루가 죽었다는 사실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사실이 공식화되는 것 같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두 번째로 주변 사람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첫 번째 말했을 때는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죽음을 점차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나는 잘 늙어가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칸트가 말한 선험적 카테고리인 시간과 공간, 그 새장 속에서 벽에 부딪히지 않고 유연하게 파닥이는 날갯짓이 아직은 어설프게 느껴진다.
꿈속에서 본 멜루는 천국에 있는 것 같다. 유난히 깨끗하고 반짝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