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랭피아를 위한 그럴듯한 변명

마네의 올랭피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명

by Divitia J


마네의 <올랭피아>에 쏟아진 당시의 비난과 야유의 이유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이 그림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연결해 비교하는 것은 많은 연구에서 이미 시도되었기에, 그 부분은 기존의 의견에 맡겨둔다.

대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사물의 핵심에 직접 다가가야 한다. 마네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올랭피아>라는 작품은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먼저 마네라는 작가에 대해 알아보고, <올랭피아>라는 작품에 대한 메타적 분석으로 그 원인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세계는 새장에 갇힌다(비트겐슈타인).” 세계가 어떠한지 보기 위해서는 새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네는 <올랭피아>를 그리기 전, <풀밭 위의 점심>이라는 작품으로 이미 한차례 논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다. 풀밭에서 식사하는데 옷을 벗은 여성(undressed)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작품에서 의미와 이야기를 읽으려는 무의식적 본능을 가진다. 그러나 이 욕구는 어느 정도 무의식적이며, 사회적 가면을 쓴 채 작동한다. 그동안 여성 누드화 속의 여성은 아르테미스이거나 성모여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예술 작품의 감상자는 기본적으로 사회 기득권층이다. 재화와 권력을 쥔 관람자는 자신들이 여성의 속살을 보고 싶어 한다는 솔직한 욕구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체면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다.

<풀밭 위의 점심>에는 이야기가 없다. 검은 정장을 입은 두 신사와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가진 여성들의 전라는 어떤 이야기도 담고 있지 않다. 마네는 예술가로서 색의 극적인 대비를 표현했을 뿐이다. 말하지 않고 보여주었다.


이야기와 의미가 사라진 작품 앞에서 관람자는 자신의 욕구를 들킨 것 같은 당황함을 경험한다. 누드를 위한 누드이고, 표현을 위한 표현이었다. 마네에게 사실 폭로의 의도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귀족이었기에 그럴 목적은 없었다는 진부한 설명은 그만두자. 예술가는 시대를 직관적으로 느끼고 표현한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부르주아의 영광을 뒤로하고 다수에게 태양이 비치기 시작했다. 세계가 왜 변하는지는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이다. 시대를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무용한 것은 의미가 없다.


나폴레옹 3세는 낙선전을 열어 대중에게 작품을 평가하게 했다. 인상주의 작품들이 낙선전에 전시되었고, 사람들은 상을 받은 작품들 앞에서보다 낙선한 작품 앞에 더 많이 모여들었다. 다수가 느끼고 있었다. 인상주의 작품이 시대가 이제 지향하는 예술세계라는 것을.


인상주의 작품 아래 흐르는 형이상학적 파도는 생철학(Lebensphilosophie)이다. 데카르트 이래 ‘저 하늘에 확고한 별’이었던 지성은 지고 있었다. 분명히 할 것은 생철학이 지성(intellect)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생철학은 ‘지성’과 ‘직관(intuition)’을 함께 강조한다. 지성만으로는 본질(essence)을 포착할 수 없다. 지성이 포기되는 때가 현대이다. 아직 현대는 오지 않았다. 르네상스가 매너리즘으로 넘어가듯이, 그렇게 근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로 다가가고 있었다.


“행동을 목적으로 하며 그에 따른 반작용을 기다리는 지성, 즉 사물을 느끼고 매 순간 변화하는 인상을 포착하는 지성은 절대적인 것의 일부와 맞닿아 있다.” (An intellect bent upon the act to be performed and the reaction to follow, feeling its object to get its mobile impression at every instant, is an intellect that touches something of the absolute.)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서문에 나오는, 인상주의가 가능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인상주의 그림은 대상의 윤곽과 배경을 분명하게 나누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쇠라는 대상을 점의 집합으로 환원시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세계를 바라보면 사물의 경계는 흐려지고 대상은 배경에 녹아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입체와 서사는 사라진다. 오로지 시지각만이 남게 된다.

올랭피아는 당시 몸을 파는 여성들이 많이 쓰던 이름이었다. 현실의 그늘에 있었던 수많은 올랭피아들. 그들이 더 이상 음지에 있기를 거부한다.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의 시선은 도전적이다. 감상자를 향해 있다. 부르주아의 세계관은 생철학이 아니다. 생철학일 수 없다. 그들의 세계관은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해줄 수 있는 실재론이었다. 실재론의 대응 관계(counterpart)가 경험론인데, 생철학이 곧 경험론인 것은 아니다. 생철학은 현대로 넘어오기 전, 근대를 마지막으로 안내했던 사상이다.

<올랭피아>는 여러모로 부르주아를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만들었다. 우선 인식론적으로 부르주아의 세계관이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정치적으로는 부르주아의 정치가 다수를 위한 정치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사회적으로는 부르주아의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모욕을 가했다. 부르주아의 분노는 비난을 넘어서 소요(騷擾)에 가까웠다.


<올랭피아>를 보고 감상자들은 이것을 읽어냈다.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대는 가차 없이 올랭피아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따라야 할 신념이 사라진 시대에는 두 개의 생활양식이 가능하다. 향락주의와 스토아주의(Stoicism)다. 올랭피아는 전자에 해당한다. 누가 옳고 그름을 정한단 말인가.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이제 법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를 이야기하면서 모네의 <해돋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만한 비평가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표현한 ‘인상적이다’라는 말에서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인상주의 그림이 왜 혁명적으로 인상적일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본다. 인상주의 회화에서 대상은 평면화된다. 인상주의 기법이 도입된 인물화에서는 주제가 되는 인물이 배경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즉자적(An-sich) 세계관에서 그림 속 입체는 사라진다. 대상이 납작하게 눌리는 것은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에서도 보인다. 입체가 사라질 뿐 아니라 소년의 눈빛도 흐릿하여 관람자에게 피리 소리를 낭랑하게 들려줄 것 같지 않다. 입체는 지성이다. 지성에 대한 불신이 싹트면서 감각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지성은 소유한 이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감각은 누구나 평등하게 가진 것이다.


반면 대자적(Für-sich) 세계관, 특히 르네상스 시기 인물화에는 입체감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기법이 사용된다. 자연에 우위를 주장하는 자신만만하고 도드라진 인물이 등장한다. 배경은 부가적인 장식일 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서 모나리자의 입술은 스푸마토 기법을 통해 사실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는 듯하다.


인상주의 그림에서는 배경으로 흘러들어가 버리기 위해 대상의 윤곽선이 흐리게 표현되었다면, 르네상스 때 <모나리자>는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입매가 흐릿하게 표현된다. 기법이 시대를 표현하지 않는다. 시대가 원하면 기법은 언제든지 그 역할을 다한다.

마네는 인상주의 작가 중에서도 혁명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혁명이라는 명제는 시대를 바꾼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마네의 작품들은 시대를 이끌고 갔다. <올랭피아>에게 변명은 필요하지 않다.

감각에 따라 행동하는, 자기 포기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여성은 부르주아 귀부인들이 가지는 도덕이 없다. 누구보다 가뜬하다. 그리고 솔직하므로 당당하다. 생존을 위해 거래하지 않는 관계는 없다. 귀족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거래로 삶을 유지한다. 거기에 조건들이 달리고 계산된다. 물론 안온함을 더해서 받는다.

올랭피아의 거래에는 조건이 없다. 주고받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의 지체 높은 권력자들도 자신 앞에서 허물어진다. 누구도 감각적 향락의 우위에 있지 않다.


새로 오는 시대에 올랭피아는 무언가를 얻었지만, 부르주아의 귀부인들은 무언가를 잃어야 했다. 사실 올랭피아는 무언가를 가지지도 않았기에 대중이 주인이 되는 때에 두려움이 없었고, 부르주아 귀부인들은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감춰질 수도 있었던 삶의 고뇌가 드러나고 말았다.

<올랭피아>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배경 속에서 읽혀야 한다. 사회학적 설명의 시도는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올랭피아>는 똑바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현대 역시 올랭피아의 시대이다. 언제까지 발 디딜 곳 없이 자기 포기적인 삶이 가능할까. 발생하는 것은 발생하는 대로,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 그러하였듯이, 올랭피아가 아래로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는 시대가 올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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