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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vitia J Aug 26. 2022

안드레아스 거스키 전을 다녀와서

사진은 왜 예술인가


Before the 1990s, Gursky did not digitally manipulate his images. In the years since, Gursky has been frank about his reliance on computers to edit and enhance his pictures, creating an art of spaces larger than the subjects photographed. (위키피디아 인용)


안드레아스 거스키가 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솔직하게 컴퓨터를 의존하여 편집해서 picture를 향상시켰는데, 사진으로 된(photographed) 대상을 예술의 공간으로 보다 더 크게 창조하였다.”  

 중복을 피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을 photograph라고는 표현하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을 사진을 넘어선 어떤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가 frank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컴퓨터에 의존했다는 사실, 아니면 창조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인지는 한 문장 가지고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그의 사진이 재현이 아니라 창조라고 분명하게 언명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안드레아스 거스키전을 하고 있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전을 보고 거스키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았다. 사진, 추상, 유형적 사진, 신이 눈으로 본 사진, 사진을 추상화로 승화시킨 작가. 어떤 글에서는 사진에서 서사가 제거되었다고 했다가 말미에서 서사가 장엄하다는 말로 끝난다. 

사진작가로서 현대예술에서 손에 꼽히는 작가에 대한 설명으로는 혼란스럽다. 사진과 회화, 사진과 추상화에 대한 관련성,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는 무의미한 말이다. 유형적 사진이라는 말은 무슨 뜻 인가. 이해력이 부족한 탓에 유형적 사진이라는 설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안드레아스 거스키 작품 군 이외의 사진은 유형을 담은 사진이 아니라는 것인지. 다른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겠지만 명료하게 정의되지 않은 명사는 단지 현학적 수사일 뿐이다. 


현대예술에 관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침묵하거나(어렵다 등으로 얼버무리거나) 근사한 언어로 포장한다. 현대예술은 과거예술과의 단절에서 시작했다. 현대인이 모두 현대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현대예술은 몰이해에 시달린다.


사진은 현실을 모방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예술이 된다. 가끔 유럽이나 미국에 여행가서 공항에서 여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이 있다. 이민국 심사관이 눈을 껌벅껌벅 뜨고 서있는 나와 나의 여권사진을 일치시키지 못한다. 여권의 사진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워한다. 사진이 현실을 모방한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사실은 인간이 사물을 보는 하나의 관습적 방식이고 습관이다. 


안드레아스 거스키 사진이 위대한 것은 단지 그의 사진이 추상화에 가까운 것 때문만이 아니라 사진기와 사진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심오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냈기때문이다. 소설가와 화가가 각각 펜을 사용하고 붓을 사용하듯이 사진가는 사진기를 사용한다. 


거스키의 작품을 보면 사람들은 압도당한다. 크기와 사진에 담긴 스케일에 대해서 먼저 놀란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에 대한 낯설음 역시 놀라움이다.. 사람들이 거스키의 사진에서 추상화의 흔적을 느꼈다면 그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분명 주식 거래소나 슈퍼마켓, 라인강은 자신이 익숙히 알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거스키의 사진에서 재탄생된 너무 많이 봐서 무심코 지나쳐 버린 장소들은 그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꿈을 꾸듯 환상적 공간으로 탈바꿈된다.   


그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단순히 형용사와 부사로 치장하고 싶지 않다. 그는 차가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작품에 대한 감정이입을 배제하여 삶의 단면과 대면시키는 정면성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현대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은 모든 문화구조물은 그 원인에 의해 설명될 수 없으며 따라서 우연에 의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문명이 현재의 그것과 같을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 또한 그것은 다른 것이 될 이유도 없었다. 무엇인가가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동의를 요청하고 있다면 그것은 세계의 종합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준수시켜야 할 하나의 단면으로서이다. 이러한 종류의 세계관이 예술 양식에 있어서 ‘정면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frontality’를 부른다.’(현대예술;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 저 전문 인용)


 정면성의 원리가 희곡에 도입된 것을 소격효과라고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은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폐쇄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 희곡 속 배우는 관람객에게 질문하고 스스로의 역할에 의문을 표현한다. 드라마는 세계에 대해 열린다. 관람객은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고 날 것 그대로 세계와 맞닿뜨린다. 이것이 현대예술이 특징중 하나이다. 인간에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웃음보다 슬픔과 고통을 더 주었다고 느꼈을 수 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기획자가 거스키의 작품에서 비극성이 느껴진다고 말한 점의 근거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한다. 


 거스키 작품에 대한 감상은 그와 같다. 컴퓨터로 이어 붙여진 엄청난 규모의 공간에 삶의 흔적이 드러난다. 라벤더 농장을 찍은 사진에서는 일하는 이들이 하나의 점으로 보인다. 사실을 말하지만 그것이 라벤더 농장인지도 구분하기 힘들고 그 사이에서 라벤더 꽃을 운반하는 사람들을 찾아보려고 했을 때 있는 듯이 없는 듯이 보인다. 정면성의 원리가 도입된 거스키의 작품은 감정이입을 감상자에게 돌린다. 작품에 몰입해 고단한 삶은 잠시 잊어보려 했건만. 광대한 규모를 담은 작품 속에 나는 치열했는데 작은 점에 불과했다. 걱정과 근심, 슬픔도 작아진다. 거스키 작품의 위대성은 진정한 현대예술을 구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스키 작품에 대한 구성을 살펴보면서 그의 사진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본다. 거스키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때 한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을 인화하지 않는다. 오래도록 여러 장면을 자신이 원하는 형상일 때를 기다려서 촬영한다. 그리고 형상에 대한 여러 사진은 거대한 규모로 조합된다. 

피카소는 입체파로 분류 된다. 회화는 입체를 담지 않는다. 원근법과 명암 등으로 3차원을 구성 한다. 입체해체파로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초기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도 입체파의 그것과 유사한데 신체를 해체해서 다시 조합한 것이다. ‘게르니카’에서 조각난 사람들을 이어붙인 것이 왜 입체로 보였는지 의문이다. 


 거스키 작품도 우선 사진이 가지는 특성인 분절성을 가지며, 이것을 모아 붙였다는 점에서 입체파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이 가지는 위트는 입체파가 제시한 재치에 못지 않다. 평양의 국가 행사를 담은 사진이 평양이라는 제목을 달지 않았으면 꽃 모양의 아름다운 매스게임으로 보이듯이.


안드레아스 거스키전을 보러 간 날은 너무나도 무덥다 못해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안드레아스 거스키전이라는 캡션을 보는 순간부터 시원한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기획과 전시를 훌륭하게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에서 익숙한 장소를 낯설게 하여 환상을 제시하면서 환상을 깨버리는 날카로움을 느꼈고 또한 그는 사진의 작품세계를 확장하여 사진작품 분야를 승화시켰으며 현대예술이 지향하는 바를 명료하게 담았다. 행복한 미술관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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