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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새롬 Nov 02. 2017

#92.네세바르, 흑해의 곁에 서서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불가리아 #네세바르 #고대도시

#여행은살아보는거야

#2017년8월12일~24일


<불가리아 동쪽 끝에 자리잡은 고대도시 네세바르>

 검을 흑(黑) 자에 바다 해(海) 자를 쓰는 흑해. 이름만 들으면 블랙홀처럼 무시무시하게 검고 거친 바다가 떠오르지만 실제로 만난 흑해는 햇볕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바다였다.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때로는 옥빛이었고 때로는 쪽빛이었다. 거친 바다가 아니라 고운 바다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터를 잡고 잠시나마 살아 보기로 결정했다.

<멋진 그림이 세 개나 걸려 있는 네세바르 우리 집>

 부르가스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리면 그보다 더 작은 네세바르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 조그마한 마을은 3천 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대 도시인데, 기원전 트리키아 인들이 정착한 이후 로마를 거쳐 비잔틴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한때는 그리스와 터키의 지배하에 있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문화재들이 이곳에 쌓이게 되었고 결국 1983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렇게 엄청난 마을 인근에 2주간 머물 수 있는 집을 얻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언제든 고대도시에 닿을 수 있는 위치에 말이다.

<작지만 아늑한 우리 집>

 침대 하나에 주방과 화장실 그리고 작은 테라스가 딸린 우리 집은 둘이 살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이곳에서의 일과는 대략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시리얼을 먹고 테라스로 나가 글을 쓴다. 그리고 뜨거운 햇볕이 조금 잦아들면 옷 안에 수영복을 입고 커다란 타올을 들고 5분 거리에 있는 해변으로 나간다. 작지만 사랑스러운 해변에서는 타올을 깔고 누워 노래를 듣거나 수영을 한다. 바다지만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하기 때문에 나 같은 수영 초보자에게 안성맞춤이다. 수영이 끝나면 대충 물기를 닦고 타올만 걸친 채 집으로 돌아간다. 이 마을은 그렇게 돌아다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곳이다. 모두가 그렇게 돌아다니니까.

<5분만 걸으면 짠하고 나타나는 리치 비치>

 우리가 머무는 마을은 아주 조용하다. 집에서 해변으로 가는 길에는 꽤 커다란 슈퍼마켓도 있다. 필요한 식재료는 거의 이곳에서 조달을 하는데 가끔은 걸어서 20분 떨어진 곳에 있는 대형 마트에도 다녀온다. 집 앞 슈퍼에는 야채와 과일이 부족한데 대형마트에 가면 아주 신선한 것들로 구매를 할 수 있다. 고기 종류도 저렴한 편이어서 돼지고기 목살 한 근을 오천 원 정도면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요리를 했다. 부대찌개도 해 먹고 비빔국수도 해 먹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직접 밀떡을 만들어 라볶이도 해 먹었다. 이곳에서의 요리 대첩은 별도로 풀어야 할 정도로 길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쓰도록 하겠다.

<2주 동안 우리의 식량 창고 역할을 해주었던 슈퍼마켓.>

 동네 놀이가 실증난 날은 이층 버스를 타고 네세바르 고대 도시로 향했다. 천정이 뻥하고 뚫린 관광버스는 한 번 타는데 2레바(약 1,280원) 정도로 약간 비싼 편이다. 하지만 이 버스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기분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끝내준다.

<저거 봐 얘들아. 너무 좋다.>

 버스가 네세바르 고대도시에 멈추면 우선 이런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 그렇다. 흑해는 이렇게 아름답다. 무서운 바다가 전혀 아니다. 바다 앞에는 멍하니 앉아 있기 딱 좋은 벤치들이 여럿 놓여있다. 해가 지는 시간에 가면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바다만을 원 없이 바라볼 수 있다. 멍 때리기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볼수록 매력 넘치는 흑해의 자태.>

 바닷길 한쪽에는 18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풍차가 놓여있다. 몇백 년의 시간을 살아 왔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다. 하지만 풍차의 날개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멈추어 갈매기들의 놀이터가 되어 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고대도시의 입구를 지키며 멋진 안내자 역할을 하는 풍차가 좋았다.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이 들어 검고 희게 변한 나무의 결이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300년이 넘도록 이곳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물레방아>

 이제는 부서져 얼마 남지 않은 성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전능자 그리스도 성당'이라 불리는 성당이 나타난다. 다른 유적들에 비해 건물 자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데다 앞쪽에 꽃밭이 예쁘게 조성되어 있어 마을에 들어선 많은 여행객들의 이목을 끄는 존재가 되었다. 우아한 아치형 창문과 붉은 벽돌들이 당시 지어졌던 성당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자료가 되어 주기도 한다.  

<붉은 벽돌이 정원과 참 잘어울린다.>

 네세바르 고대 도시의 집들은 1층은 석재로 2층은 목재로 지어져 있다. 일본식 건축물을 떠올리게 하는 이 형태는 발칸 반도와 지중해 동쪽 지역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19세기의 집들은 하나 같이 지층에 상점이 들어서 있다. 보통 가죽 제품과 네세바르를 상징하는 기념품, 목재 장난감, 각종 장신구들을 판매하는데 여름에는 이렇게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네세바르만의 독특한 가옥 형태. 일본 느낌도 살짝 난다.>

 삼면의 벽만이 남아 옛날의 화려했던 영광을 보여주는 옛 주교구 건물은 네세바르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것 같다. 이단의 아치형 문들 사이로 스미는 햇볕이 시간에 따라 제각각 중후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떻게 찍어도 작품 같은 사진이 나오니 잠시 멈추어 서지 않고 배길 수 없는 것이다.

<이곳에 서면 순식간에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작품 같은 사진을 찍고 살짝 돌아서면 유서 깊게 생긴 우물 하나를 만날 수 있다. 과거에도 쓰였고 지금도 여전히 시원하고 맑은 물이 흘러나와 여행객들의 목을 축여주는 곳이다. 지나가던 아기도 물맛이 궁금했는지 아빠의 손을 빌려 한 모금 하는 중. 우리도 아기 뒤를 이어 기념으로 한 모금씩 마시고 조금 더 마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본다.

<우물가의 귀여운 아기>

 네세바르는 어떤 골목으로 들어서든지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것 천지여서 그런 것들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곤욕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액자에 담긴 작은 그림 한 점을 샀다. 당장은 짐이 되겠지만 훗날 이 그림을 바라보며 지금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결국 지나치지 못하고 액자 하나 삼.>

 이곳은 작은 섬 같은 곳이기 때문에 30분 정도 걷다 보면 바다가 보이는 도시의 가장자리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태닝 하는 사람들과 수영하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해변이 나타난다. 맑아서 속이 훤이 들여다 보이는 이곳의 흑해는 오늘도 파도 한점 없이 잔잔하다. 더운 날씨에 이런 바다를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되지만 아쉽게도 수영복을 입고 오지 않아 포기하고 만다.   

<오늘도 평화로운 네세바르 해변>

 해변의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다가 더위를 피하기 위해 그늘이 잘 조성되어 있는 골목 사이사이를 걸었다. 그러다 발견한 창문에 짜부된 강아지 인형. 누군가가 살고 있는 집이었는데 이런 일상스러운 모습 하나하나가 재미있다.

<안늉. 울굴이 쭈부지먼 나 기윱지?>

 거리를 가득 메운 레스토랑 중 한 곳에 들어가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고 나면 졸음이 몰려오는데 그때 다시 버스를 타고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면 딱 좋다. 우리는 2주간 네세바르에 머물렀지만 하루도 지루한 날이 없었다. 그냥 집 안에서 뒹굴던 어떤 날에는 마트에서 사 온 염색약으로 서로의 머리를 물들여 주기도 했다. 손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샀던 파란색 타올을 몸에 둘러야 한다. 그리고 미용사 역할을 맡은 사람은 한 땀 한 땀 신중하게 염색약을 바르면서도 경력 30년 된 동네 미장원 사장님처럼 이런저런 수다를 떨어 주어야 한다. 이 놀이의 긴장감은 30분 뒤 머리를 감고 나서 색이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하는 순간에 정점을 찍는다. 나는 노란색으로 염색을 했지만 밝은 갈색이 되었고 남편은 밝은 갈색으로 염색을 했지만 본인의 머리카락 색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한 때를 재미있게 보냈으니 그것으로 됐다.

<바람직한 손님의 자세>

 흑해의 곁에서 보낸 2주간의 시간은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흘러갔다. 하루하루 성실하게도 여유를 즐기며 말이다. 떠나기 전날은 해가 슬며시 지평선을 향해 내려앉을 때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스펙트럼 비치로 향했다. 우리는 모래 사장에 앉아 비치 발리볼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모래 위에 그림도 그렸다. 그리고 네세바르 생활이 어땠는지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지나간 시간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기에.

<스팩트럼 비치에서의 마지막 추억>

 냉장고 속에 재료가 남지 않도록 마지막 저녁까지 성실하게 먹고 난 뒤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그동안 철저하게 널브러져 있던 짐들을 하나 둘 끌어 모아 다시 배낭에 차곡차곡 담았다. 버릴 것들은 버리고 물건들의 위치도 전보다 더 효율적으로 배치해 본다. 갈수록 짐 싸는 기술이 느는 것인지 내 배낭은 이제 겨우 13kg 밖에 되지 않는다. 남편은 나보다 힘이 세다는 이유로 아직도 17kg 정도를 메지만 말이다.

<파도가 자꾸 지워서 쓰기가 어려웠던 우리의 이름>

 이제 우리는 2주간의 고대도시 생활을 접고 그동안 너무나도 궁금했던 터키 땅에 닿을 예정이다. 유럽과 아시아 두 개의 대륙을 모두 소유한 나라. 토속 신앙에서 출발해 기독교를 거쳐 지금은 이슬람 국가가 된 이 엄청난 나라에 가게 되다니. 지금껏 많은 곳을 다녔지만 이렇게 기대가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여유로웠던 지난 2주에 비해 앞으로는 조금 바쁜 일정이 이어질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설렘이다. 이 순간 가장 생각나는 말이 있다면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의 버즈 라이트이어가 했던 한 마디일 것이다. 가자,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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