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터키 #안탈리아 #파묵칼레
#가족상봉 #2017년9월6일~8일
터키는 땅이 굉장히 넓다. 그래서 각 지역을 연결하는 버스망이 아주 잘 구축되어 있다. 고속버스는 보통 벤츠사의 차량으로 운행하기 때문에 승차감이 좋을 뿐 아니라 커피와 간식 등을 나누어 주는 서비스도 매우 발달해 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도시와 도시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기본 일곱 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저녁에 출발해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버스를 많이 이용하는데 이렇게 이동하면 하루치 숙박비가 절약된다는 장점이 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쪽잠과 불편한 자세는 여행자가 감내해야 할 숙명이지만 말이다.
밤 9시쯤 괴레메를 떠난 버스가 지중해 도시 안탈리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새벽 6시. 보통 때 같았으면 저렴한 호스텔을 찾아가 체크인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이름도 은혜로운 '올 인클루시브 리조트' 즉 '모든 것을 네 맘대로 먹고 쓰고 마시고 즐기는 리조트' 에 와있다. 평소 허리띠 졸라매며 여행하던 사람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 1박에 15만 원이나 하는 리조트에 갔나 싶겠지만 여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7개월만의 가족 상봉이 이곳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1957년 7월 11일 경기도 하남에서 태어나신 우리 어머님은 올해 환갑을 맞으셨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는 먼 이국땅에서 떠도는 중. 그래서 환갑 선물로 아버님과 어머님을 우리가 있는 터키로 초대하기로 한 것이다. 두 분은 한국에서 출발하는 투어 상품을 이용해 터키에 입국하신 다음 일정대로 이스탄불, 앙라카, 괴레메를 구경하신 뒤 안탈리아로 오시기로 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묵으실 리조트와 동일한 곳에 묵으려고 했었는데 전 객실 매진. 그래서 약간 애매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리조트를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부모님보다 한 발 먼저 도착한 우리는 리셉션에 다가가 체크인 시간을 물었다. 직원은 12시면 입실이 가능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그의 말에 우리는 만세를 불렀다. '올 인클루시브' 서비스는 지금부터 바로 이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한층 내려가면 커피부터 칵테일까지 맘껏 주문할 수 있는 24시간 바가 있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8시에 조식 뷔페가 문을 여니 아침 식사도 할 수 있다고. 우리는 당연히 체크인 이후부터 서비스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정말이지 돈 낸 보람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칵테일도 마시고 아침도 든든히 먹고 리조트 앞바다 구경도 하고 로비 소파에 누워서 잠깐 눈도 붙이고 나니 드디어 체크인 시간이 다가왔다. 밤새 쩌든 머리를 드디어 감을 수 있겠구나 싶어 카드키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직원이 우리가 묵을 방을 업그레이드해주겠다고 했다. 이게 무슨 횡재인가. 이 리조트에서 가장 저렴한 트윈룸을 예약했을 뿐인데 안내받은 방은 으리으리한 패밀리룸이었다. 두 개의 싱글 침대와 소파가 놓인 거실을 지나면 널찍한 욕실이 딸린 별도의 침실이 나오는 이 방은 가격 대비 파격적인 업그레이드였다.
사실 방에 들어오면 짐 풀고 편하게 누워서 바로 한숨 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리셉션 소파에서 잠깐 자서 그런지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도착하실 때까지 '올 인클루시브' 서비스를 온몸으로 즐겨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이용한 장소는 리조트 수영장. 강렬한 햇볕 아래 청량감 가득한 수영장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 부대끼지 않으니 수영하기도 좋고 말이다. 오랜만에 파워 자유형을 시전 한 뒤 이번에는 아이스크림 부스로 향했다. 그늘에 앉아 시원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연어가 고향을 찾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 우리는 또다시 칵테일 바로 직행. 체크인 시 나누어준 팔찌 하나면 그 어떤 추가 결제 없이 이 모든 서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올 인클루시브'. 정말이지 히트다 히트.
부모님은 우리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쯤 리조트에 도착하셨다. 그래서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부모님이 계신 옆 리조트로 이동하려는데 왠지 정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조트마다 정해진 팔찌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리조트들이 쭉 연결되어 있는 해변 길을 이용해 부모님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미리 근처 베이커리에서 사 온 미니 케이크와 괴레메에서 산 목걸이를 잘 챙겨서 말이다. 근데 리조트가 엄청 커서 방 찾아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미로 같은 건물들 사이에서 10분 정도 헤매다가 겨우 가는 길을 찾아서 올라가는데 갑자기 어머님이 마중 나오시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안돼! 아직 아니에요 어머님!
당시 우리는 초에 불을 붙인 케이크를 들고 생신 축하 노래를 부르며 방 안으로 진입하려는 아주 깜찍한 계획을 세워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계획을 알리 없으신 어머님께서는 7개월 만에 아들 내외 보실 생각에 버선발로 마중을 나오셨던 것이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숨긴 뒤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 앞에 있는 화장실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편의 첩보 영화를 찍듯 재빨리 성냥을 그어 초에 불을 붙였다. 내가 나가는 순간 남편이 조명을 꺼줘야 그나마 구색이 맞을 텐데. 하지만 눈치 없는 남편은 이미 케이크 이벤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케이크 초는 왜 이렇게 빨리 녹고 난리인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던 나는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었고, 가다듬어지지 않은 완벽한 생목으로 생신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잊고 지냈던 20년 전 약속이라도 떠오른 듯 서둘러 내 목소리 위로 자신의 생목을 더했다. 어머님은 우리의 어설픈 작전을 눈치채지 못하셨고 행복해하셨다. 과정은 좀 매끄럽지 못했으나 결과가 성공적이니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의 대화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원래 과묵한 남편과 아버님은 오랜만에 정겹게 소주잔을 기울였고, 원래 말하기를 좋아하는 나와 어머님은 소소한 이야기들로 한바탕 수다를 펼쳤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아가씨 부부와 귀요미 조카들 소식도 듣고 건강하신 두 분 얼굴도 뵈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지금까지의 성공적인 세계여행 뒤에는 언제나 무탈히 잘 지내주는 가족들이 있었다. 힘든 여행길에 힘이 되어주고, 행복한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 맛있는 것 먹을 때 같이 먹고 싶고, 좋은 것 볼 때 같이 보고 싶었던 그 마음을 이제 잠시나마 부모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되어 행복했다.
가족들과 리조트에서의 즐거운 이틀을 보낸 뒤 부모님이 타고 오신 패키지 투어 버스에 빈대 붙어 파묵칼레까지 함께 이동했다. 패키지 투어 일정상 안탈리아를 떠나기 전 선택 관광으로 '유람선 타기'와 '올림포스산 케이블카 타기'를 진행해야 했는데, 부모님이 우리 몫의 투어비를 내주셔서 오랜만에 편한 관광 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해적선을 닮은 유람선은 햇살이 쏟아지는 파란 지중해 바다 위를 시원하게 가로질렀다. 늘 우리끼리만 좋은 곳 다니다가 부모님 모시고 이렇게 나오니 평소보다 더 신이 났다. 배에서는 간식거리와 시원한 터키 맥주가 제공되었는데 평소 음주를 안 하시는 어머님도 분위기에 취해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셨다. 그리고 잠시 뒤 강남스타일을 필두로 신명 나는 트로트 곡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분명히 출발할 때는 BGM이 타이타닉 OST였는데 말이다. 지중해 바다 위 유람선이 순식간에 몽키매직 관광버스로 돌변하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두 번째 관광 코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이 산다는 올림포스산의 케이블카를 타는 것이었다. 케이블카는 '신들의 산' 답게 웅장한 기운을 뿜어내는 산줄기를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정상에 올라가면 엄청난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엄청난 양의 구름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기념사진 하나는 제대로 찍고 가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셀카봉의 버튼을 눌렀다.
정상에 있는 카페에 앉아 가이드님이 돌리신 커피 한잔씩을 마시고 내려갈 때가 되니 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잠시 옅어진 구름을 배경으로 우리는 또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버님 어머님께 빙글빙글 제자리 돌기와 점프샷을 주문할 정도로 말이다.
안탈리아에서의 모든 선택 관광이 끝나자 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고 석회 온천으로 유명한 파묵칼레로 향했다. 원래 부모님과의 여행은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었는데, 투어 일행분들과 가이드님의 배려로 버스를 얻어 타고 파묵칼레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해 질 무렵 도착한 파묵칼레는 온통 눈 내린 듯 새하얀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석회 지대에는 중간중간 푸른빛의 자연 온천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가족끼리 놀러 온 터키인들에게도 엄청나게 인기 있는 장소였다. 우리도 한쪽에 신발과 양말을 벗어두고 천천히 온천 쪽으로 걸어갔다. 따듯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
온천에서 신선놀음을 마치고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곳에 모여 잠시 석양을 보다가 부모님이 묵으시는 호텔로 이동했다. 그리고 또다시 가이드님의 배려로 싱글 침대 3개 들어있는 방을 배정받아 부모님과의 마지막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나는 침대에 남편은 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잠이 들 때까지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3일간의 여행은 다시 헤어짐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에페소로의 이동이 예정된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부모님은 마지막까지 짐이 무거워 어쩌냐고 걱정을 하셨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자식은 부모 눈에 항상 어린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두 어린아이들은 다른 때 보다 더 늠름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에 오르는 두 분의 뒷모습을 챙겨 보았다. 서로의 건강과 행복이 세상에서 가장 걱정되는 사람들. 오늘도 가족이 있어서 다시 떠나는 둘만의 여행길이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