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인도네시아 #바뉴왕이 #기나긴여정
#2017년3월
아침 7시. 먼 여정의 동이 트고 우리는 다시 짐을 꾸렸다. 남편과 나 각자 하나의 배낭에 1년간의 생활을 모두 담는 것은 조금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이다. 하지만 여행 4주 차에 접어드는 지금, 자기 배낭 하나 정리하는 일쯤은 누워서 떡 먹기가 되었다. 심지어 줄어든 것이 없음에도 짐의 부피가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기분 탓이겠지만 말이다.
출발 전 숙박에 포함된 조식을 먹으러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열 가지가 넘는 다양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고, 이와 별도로 계란과 소시지도 준다고 했다. 먼 길을 앞둔 우리는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을 만큼만 먹었다. 여행을 하면서 '언제 또 먹겠어' 하며 한 번에 많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장시간 이동 속에 혹여 배라도 아프면 정말 난감한 상황이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체하는 것보다 배 고픈 게 낫다는 것이 우리의 논리였다. 이곳 음식은 대체적으로 맛있다. 평소 잘 먹지 않던 커피까지 에너지 발산용으로 한 잔 마시고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빼놓은 물건이 없는지 꼼꼼하게 방을 돌아보고 화장실도 미리 다녀온 뒤 가방을 메고 호텔을 나왔다.
밖은 딱 상상만큼 더웠다. 이제 땀범벅이 되는 건 거슬리는 일 축에도 끼지 못한다. 어느새 우리는 불편함을 자연스레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찾아갈 최종 목적지는 ''이젠 화산 ijen mountain'으로 유명한 시골마을 '바뉴왕이 banyuwangi'. 가는 길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베모 삼거리 → 떼갈 → 우붕터미널 → 길리마눅 선착장 → 바뉴왕이 선착장→ 바뉴왕이 시티'
전혀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고, 이동 시간도 거의 9시간이 걸린다. 이곳 여행사를 통해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1인당 45만 원을 달라는데 이건 누가 봐도 삥땅 빅 피쳐였다. 그래서 우린 고생길을 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서 택시 이외의 로컬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을 '모험'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나는 길 잘 찾는 남편 '네비규이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고민 없이 '모험'에 올라탔다.
우리는 이번 여정에 부서지기 일보 직전의 작은 마을버스 '베모'를 가장 많이 이용해야 한다. 말이 버스지 다마스보다 조금 큰 미니 봉고에 가깝다. 우리의 출발도 역시나 베모. 숙소에서 나와 베모를 타기 위해 베모 삼거리로 걸어서 이동했다. 거리 이름에 걸맞게 여기저기 베모로 추정되는 차량들이 지나다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길 건너에 정차해있는 차량에 다가갔고 '이거 떼갈 가요?'라고 물었다. 아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떼갈'이라고 말했고, 두 사람에 2만 4천 루피(2200원)를 불렀다. 그냥 냉큼 다 줄 수 없으니 흥정에 들어갔다. 현지인들은 더 저렴하게 이용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이곳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조금만 깎아 2만 루피(1800원)에 합의했다. 차 안은 굉장히 좁았지만, 우리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 우리가 작으니까. 이게 이렇게 또 편리할 때가 있구나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내 다리가 10센티만 길었어도 큰 불편을 감수할 뻔했다. 단신의 승리이다.
한 25분쯤 갔을까 아재는 여기가 떼갈이라며 내리라고 했다. 내리자마자 또 다른 베모 아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디서 뭘 탈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다가오는 사람 중 한 명에게 어디 가나 묻고 가격이 맞으면 그를 따라나서면 되는 시스템. 이번 베모도 동일하게 2만 루피(1800원)를 내기로 하고 탔다. 좌석이 마주 보는 구조여서 짐을 놓기가 더욱 수월했다. 10분 뒤 우린 우붕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우리가 내리기도 전에 표 장수들이 몰려들었다. 닥터 피시가 이런 느낌일까. 잠시 이상한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알아보고 온 가격은 길리마눅 선착장까지 4만 루피(3,600원). 하지만 나에게 다가온 그들은 10만 루피(9천 원)를 불렀다. 정신없이 달려드는 그들에게 나는 '4만 루피만 낼 거야'했더니 코웃음을 치며 그럼 자기들도 안 간다고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차는 많으니 우린 터미널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갔다. 그때 저 멀리 표 끊어주는 사무실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버선발로 달려 나와 흥정을 시작하셨다. 그녀는 10만 루피(9천 원)에 바뉴왕이로 넘어가는 페리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제안을 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내 머리에서 나사 하나가 빠져나가 땡그랑랑 하고 굴러가 버렸다.
이곳의 돈 체계는 대강 우리나라 돈에서 0을 하나 빼면 되는 구조인데, 나는 이게 늘 헷갈렸다. 아마 그 '헷갈림'의 틈으로 나사가 빠져나갔나 보다. 검색을 통해 정리한 금액은 버스 4만 루피(3800원)+ 페리 6천 루피(550원) 도합 4만 6천 루피였다. 근데 내 머리 속 계산기는 버스비 3800원+페리 6000원으로 계산을 마친 것이다. 맙소사. 남편도 나도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나의 터무니없는 계산 덕분에 우리는 결국 1인당 1만 루피(9,000원)를 내고 버스에 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그리고 10분 뒤, 우린 바가지를 쓴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의 종착역은 '우붕 버스터미널의 새로운 호구 탄생 설화'였다. 하. '당함'의 역사는 이렇듯 유구하다.
하지만 시원한 에어컨과 넓은 좌석 그리고 대형 버스채로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편리함까지 생각하면 큰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바뉴왕이 선착장에 도착한 뒤 시내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포함이어서 4천 원 정도 뜯긴 거면 나름 괜찮은 거라고 서로를 위로했다. 여하튼 우리는 안전하게 발리섬 옆 자바섬 '바뉴왕이'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 버스를 장장 5시간 정도 탔는데 그 안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많이 목격했다. 첫째는 중간에 탑승하신 할머니. 자리가 없어 남편과 나 사이에 앉으셨고, 현지어를 사용하셔서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열심히 손짓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는 갑자기 시작된 버스의 시장화였다. 페리에 버스가 실리기를 기다리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열 명이 넘는 장사꾼들이 버스에 막 올라타 음식과 물건을 팔았다. 과일부터 선글라스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리고 또 언제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버스를 빠져나갔다.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셋째, 노래하는 방랑 청년을 만났다. 그는 버스 앞쪽에서 멋들어지게 미니 기타를 치며 노래 한 곡을 뽑고, 중간쯤으로 이동해 한 곡을 더 뽑았다. 그리고 라면봉지로 만든 봉투에 돈을 걷으러 다녔다. 분위기가 우리도 넣어야 할 것 같아서, 동전 300루피를 꺼냈는데 그는 우리에게 다가오며 돈 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악수를 청했다. 어디서 왔냐 어디에 묵냐 여러 가지를 묻더니 마침 우리가 묵을 오싱 베케이션이 좋다며 추천을 했다. 그래서 '우리 거기 예약해서 가는 거야'했더니 놀란 눈치로 오 그러냐며 거기 좋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버스 차장에게 우리를 어디서 내려줘야 하는지를 현지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후 우리가 버스에서 내릴 때 따라내려 숙소까지 타고 갈 베모 잡는 것도 도와주었다. 경계했지만 그냥 좋은 동네 청년이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이름도 묻지 못한 채 남편과 하이파이브만 나누고 청년은 유유히 사라졌다.
발리의 숙소를 떠나온 지 9시간 만에 우리는 드디어 바뉴왕이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우 더웠고 에어컨을 기대했다. 하지만 정감 가는 선풍기만이 우릴 반겼다. 숨이 막힐 듯 더운데 선풍기라니. 처음에는 조금 두려웠지만, 씻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참을만했다. 역시 우리의 적응력이란. 하지만 복병은 화장실이었다.
사진 속 화장실+샤워실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천장에는 늘 도마뱀 한두 마리씩이 뛰놀고 밤이 되면 왕거미도 나온다. 그리고 굉장히 통통하고 덩치 큰 날벌레들이 어딘가에 붙어 샤워하는 또는 용변을 보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 벌레를, 특히나 날아다니는 것들을 조금 두려워하는 나로서 이것은 어마어마한 도전이었다. 갈 때마다 1분씩은 화장실 안을 자세히 살피고 재빨리 할 일을 마친 뒤 빠져나온다. 그 어떤 세기의 작전들 보다도 치밀하게 말이다. 그래도 몇 번 겪다 보니 도마뱀 정도는 극복이 되었다.
숙소 적응을 마친 뒤 주인장의 안내에 따라 큰 거리에 있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사진에 보이는 그릇에 담긴 음식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메뉴인데, 우리나라 곱창전골 맛이 났다. 안에 들어있는 재료들도 순댓국에 들어있을 법한 것들이었다. 나는 입맛에 잘 맞지 않아 남편이 거의 다 흡입했다. 그리고 후라이드 치킨을 먹었다. 아주 바삭하니 맛있었다. 가슴 부위로 2조각을 해치우고 오렌지 주스와 아이스티까지 싹쓸이 한 뒤 가게를 나왔다. 주인장은 초행길인 우리가 길을 잃지 않게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유심 사는 가게도 친절히 데려가 주었다. 그렇게 자바섬에서의 생존 조건이 주인장 베니 덕에 완성되었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긴 하루의 마무리를 하려는데 너무 더웠다. 그래서 거실로 나갔더니 도마뱀 7마리 정도가 벽을 타고 있었다. 넋을 놓고 구경하는데 베니가 나타났다. 손에 우쿨렐레를 들고. 나도 한 때 열심히 치던 악기였기 때문에, 베니에게 잘 치냐고 넌지시 물어봤고 그는 연습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칠 줄 안다'라고 했더니, 신기한 듯 쳐보라고 악기를 건넸다. 나는 그냥 알고 있는 코드로 몇 가지 스트록을 섞어 연주 아닌 연주를 했다. 그는 재밌다며 폰을 가져와 나를 찍어댔다. 그래서 나도 폰을 가져와 찍을 테니 한곡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베니는 연습 중인 멋진 곡의 일부를 들려주었다. 낯선 시골마을 바뉴왕이에서의 밤이 그렇게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