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인도네시아 #발리 #수영장 #라면
#2017년3월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삿날. 3일째 묵고 있는 개똥 골목의 숙소를 떠날 수 있는 행복한 날이다. 3박만 예약해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가 절로 나왔다. 체크아웃 전 예약 어플을 켜고 주변 숙소들을 알아봤다. 단 하루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더 투자해 좋은 곳에서 묵고자 했던 우리는 수영장이 딸린 거금 3만 4천 원짜리 방을 예약했다. 물론 조식 포함이었다. 거리는 지금 숙소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고민 끝에 짐을 메고 걸어가기로 했다. 체크 아웃 시간은 정오. 새 숙소의 체크인 시간은 오후 2시였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덜 더울 때 행군을 시작하자며 11시가 조금 넘은 시점에 정들었던 개똥 골목 숙소를 빠져나왔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나온 지 1분 만에 온몸이 땀으로 뒤덮였다. 묵직한 짐을 등에 지고 걷는 것은, 지구보다 강한 중력이 작용하는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열심히 걸어 꾸따의 작은 골목들을 벗어나자 왕복 4차선 이상의 큰 도로들이 나타났다.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끝없는 행렬을 따라 우리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새로운 숙소. 와. 이곳은 숙소가 아닌 정말 '호텔'이었다. 일단 로비가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리셉션이 있고, 그곳에서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응대를 한다. 별 것 아닌 장면인데 며칠간 여관(?)에 머물던 우리에겐 이 모든 것이 칠성급 호텔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에어컨에서 찬 바람이 원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 직원이 웰컴 드링크로 시원한 망고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체크인 시간인 2시까지 기다리면서 뭔가 먹고 싶으면 로비 옆쪽에 위치한 호텔 식당을 이용하라고 했다. 당장 할 것도 없고 점심도 먹어야 했기에, 테이블 하나를 잡고 음료와 감자칩을 주문했다.
파인애플 주스는 언제 어디서나 실패하는 법이 없다. 쾌적하고 시원한 공간에서 비싸고 양적은 만찬을 즐긴 후 호텔 뒤편에 있는 수영장 구경에 나섰다. 와와. 비수기라 그런지 수영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내려와 시원한 물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1시간이 더 남아있기에 썬베드에 누워 시간을 흘려보냈다. 순간 내 자신이 한량이 된 것 같았고, 배꼽이 간지러울 만큼 행복했다.
기분 좋은 공간에 있으니 생각보다 1시간이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잠시 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입성한 우리의 하루짜리 숙소! 신동엽의 러브하우스 OST였던 '따라라라라 딴 따라라라'가 울려 퍼지는 듯한 환청을 들었다. 넓고 깨끗한 침대, 튼튼한 금고, 세계 여러 나라 채널이 나오는 TV까지. 무엇보다 우릴 감동시킨 것은 전기 포트였다. 끓인 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드디어 컵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오늘 저녁은 무조건 신라면이다'라고 정한 뒤 우리 부부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사막에서 한식당을 찾은 기분이랄까.
일단 저녁시간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빠르게 수영복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수영장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파워 발차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지난번 서핑을 할 때 남편은 얼굴과 목만 타버려서 아직 하얀 몸을 좀 그을려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얼굴에 티셔츠를 올려둔 채 썬배드에 누웠다. 하지만 5분도 안돼 물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견디기 힘든 뜨거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물속에 몸을 담근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타겠지만 천천히 조금씩 타고 싶은 게 내 심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탈대로 탄 얼굴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수영이 끝나고 길 건너 슈퍼에서 물건을 계산하려는데, 직원이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이해 못하겠다고 하니 사과를 하며 인도네시아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과 함께 까르르 웃었다. 얼굴의 현지화. 이보다 완벽한 적응이 어디 있을까 싶다.
1시간가량의 물놀이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 물을 끓였다. 신라면과 현지 컵라면은 용기에 물을 부으면 됐지만, 불닭 볶음면은 봉지채로 조리해야 했다. 남편이 군에 있을 때 많이 해봤던 뽀글이 실력을 십분 발휘했다. 그래서 결론만 말하자면, '인도네시아 음식이 우리 입에 맞는다해도 라면 국물 따라갈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공수해 온 전용 포크&수저를 꺼냈다. 이것은 회사를 나오기 전 옆팀 과장님이 특별히 우리의 이름까지 새겨 선물해 주신 아이템이다. 이렇게 유용하게 쓰게 되다니.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의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라면의 맛은 가히 환상이었다. 국물도 국물이지만 불닭볶음면의 매콤함이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한국의 맛이 혀 끝으로 느껴지니, 잠재되어 있던 먹부림 리스트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짜장면, 떡볶이, 오징어 덮밥 등. 예산이 여유로운 나라에 가게 되면 반드시 꼭 한인 식당에 한 번쯤은 가볼 생각이다. 상상만 해도 침이 고인다. 3개의 라면을 남김없이 비우고 우리는 꿀 같은 낮잠을 잤다. 그리고 저녁 6시쯤 일어나 글과 유튜브 작업들에 집중했다. 환경이 좋으니 아무래도 작업에 속도가 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빠르게 마감을 치고, 미드 한 편을 보며 여유를 즐겼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극한 이동의 시작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밤을 충분히 즐겨야 할 것이다. 장장 9시간에 걸친 자바섬 바뉴왕이로의 여행. 제발 어떤 삥땅도 없이 안전하고 저렴하게 도착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