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인도네시아 #발리 #서핑 #로컬음식
#2017년3월
처음으로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학교에 갔을 때, 처음으로 사랑을 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인생의 '처음'을 마주할 때 조금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때로는 실패하면 어쩌지 아프면 어쩌지 따위의 걱정들로 인해 시작되기도 전에 폐기되는 '처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언제나처럼 밀려드는 '설렘'에 몸을 맡기고 두려움을 타고 넘어 '처음'을 시작한다. 그것은 굉장한 경험이 되기도 하고 또 쓰라린 아픔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늘 '처음'을 기대한다.
발리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처음'은 멋진 꾸따 해변에서의 서핑이었다. 수영을 잘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엄청나게 마셔댈 바닷물에 벌써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멋진 일이 아닌가. 나의 버킷리스트 속 '새로운 운동 배워보기'를 클리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기에 서둘러 검색을 시작했다. 조금 찾아보니 발리에서 현지인과 결혼한 한국 여성 분이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서핑 교실이 있었다. 카톡으로 가격과 몇 가지 사항들을 문의하니 빠르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발리에서 서핑할 생각이 있다면 이곳 <서프 212>를 적극 추천한다. 특히 초심자들은 1:1로 가르쳐 주는 시스템에 굉장한 심적 안정을 느낄 수 있다. 래시가드 및 보드 대여까지 포함하여 250,000루피아(약 23,000원)로 가격도 굉장히 저렴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비치 쪽으로 걸어갔다. 만나기로 한 곳에서 연락을 드리니 바다쪽 쪽문(?)으로 체구가 작은 여성분이 쏙 하고 나오셨다. 서핑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와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참 예쁜 분이셨다. 극진한 배려와 함께 10분 정도 기초 교육을 받고, 스트레칭을 한 다음 1:1로 배정된 현지 강사님을 따라 바다로 들어갔다. 적당한 물 온도에 기분이 좋아졌다. 바닷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곳에서 보드 위에 올라 타 납작 엎드렸다. 초심자들은 큰 파도를 탈 수 없기 때문에, 강사가 보고 적당하다 싶은 것들을 골라 준다. 하지만 맞춤형 파도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처음 거대한 파도가 코 앞까지 닥쳐올 때는 정말이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때마다 강사는 보드 앞판을 들어 자연스럽게 파도를 타고 넘어가도록 해주었지만, 나는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보드를 미친 듯이 붙잡았다. 그래서였는지 나중에 보니 양쪽 손바닥에 모두 멍이 들어있었다. 그렇다. 살고자 하면 다 살게 되어 있다.
조금 기다리다 보니 주문한 맞춤 파도가 다가오기 시작했나 보다. 강사는 외국인 특유의 억양으로 '줜비'라고 했고, 나는 손을 가슴 옆쪽에 대고 상체를 물개처럼 들어 올리는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이어진 강사의 앙칼진 '이러낫!' 구호에 맞추어 하나 둘 셋의 박자로 오른발 왼발 중심잡기를 시전 했다. 첫 시도는 조금 가다 물에 첨벙 빠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게 몇 번을 물에 빠지고 나니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어쩌면 인생은 이렇게 미지의 두려움을 뛰어넘어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가는 여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그 두려움을 뛰어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게 뭐 어떤가. 실패도 나를 대변하는 삶의 한 단락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 날이 적당한 그 어느 날,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내가 넘지 못한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다섯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멋지게 파도를 타고 해변에 닿았다. 감각을 한 번 몸에 익히니 점점 일어서기가 수월해졌다. 그래서 신나게 타고 있는데 갑자기 옆 사람의 보드가 나에게 날아왔다. 나는 살기 위해 물어 뛰어들었지만, 아쉽게도 보드는 정강이를 제대로 치고 지나갔다. 순간 매우 아팠기 때문에 나에게 보드를 던지고 사과도 없던 그 여자분을 진심 바다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피도 안 나고 해서 그냥 보드를 계속 타기로 했다. 한 시간 강습이 끝난 뒤 잠시 쉬는 시간을 갖은 뒤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강사님이 이번에는 조금 더 쎈 파도를 골라 주셨다. 보드 위에서 느껴지는 속도가 이전보다 훨씬 빨라진 게 느껴졌다. 정강이의 아픔 따위는 처음 맛보는 스릴에 씻겨 말끔히 사라졌다. 바다 바람을 모래 위에서가 아닌 바다 위에서, 그것도 물결의 힘을 오롯이 느끼며 맞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다. 포세이돈이 된 느낌이랄까. 포크라도 하나 쥐고 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든다.
2시간의 폭풍 같은 서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을 샀다. 여기도 편도(편의점 도시락)가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국에서 즐겨 먹던 혜자 님의 도시락이 생각났다. 그땐 그렇게도 질리던 게 왜 이렇게 그립던지, 사람은 참 알다가도 모를 존재이다. 후식으로 먹을 멜론과 치토스도 구입하고 물도 한 병 더 샀다. 여기 음식은 대부분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한국에서도 많이 먹는 나시고랭과 미고랭은 정말이지 특화되어있다. 오히려 호주 가게에서 팔던 음식들보다 훨씬 맛있는 것 같다. 도시락으로 배를 채운 뒤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싹 빨아 널어 둔 뒤 시간을 보니 12시였다. 보드를 8시부터 탔더니 아직도 한낮인 것이다. 밥도 든든히 먹은 데다 안 쓰던 근육을 양껏 사용 한터라 낮잠이 솔솔 날아들었다. 2시간 정도 꿀잠을 자고 일어나, 남편과 내일모레 시작될 대장정의 세부 루트에 관한 회의를 시작했다. 이곳 여행사를 통해 가면 1인당 40만 원 정도가 드는 여정인데, 좀 힘들더라도 우리가 직접 찾아가면 1인당 11만 원 정도로 줄일 수 있다. 다행히도 세세하게 이동 경로를 적어 놓은 블로그가 있어서, 그곳에서 크나큰 도움을 받았다. 장장 3시간이 넘는 회의를 마치고 이것저것 자료들을 정리하니 금방 7시가 되었다.
저녁은 저렴한 음식과 과일주스로 유명한 로컬 음식점을 찾아가 해결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걸어 나가는데 골목은 여전히 개똥밭이었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조심조심 가는데 저 멀리 두꺼비 같은 게 보였다. 아니 두꺼비를 가장한 개똥이었다. 어휴 놀래라. 끊임없이 새로움이 솟아오르는 동네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잔상을 지워 버리고 럭키스 와룽 Lucky's warung이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실패할 확률이 제로인 치킨 나시고랭을 시키고 닭볶음탕처럼 생긴 치킨 요리 하나를 더 시켰다. 주스는 파인애플과 그냥 애플을 시켰다.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싱싱한 주스가 나왔다. 날씨가 많이 더워 목이 탔기 때문에 파인애플 주스를 시원하게 쭉 들이켰다. 맙소사. 이것은 정말 파인애플이다. 과일 외에 들어간 것이라고는 얼음뿐인 것 같은 이 태초의 맛은 무엇이란 말인가. 재료 자체의 단맛으로만 만든 진짜 생과일주스. 가격도 우리 돈으로 700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남편이 시킨 사과 주스도 마찬가지였다. 으어(아재톤) 정말 장난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음식을 다 먹고 오렌지 주스를 추가로 주문해서 가지고 갔다고 한다.
달달한 주스를 입에 물고 어둠이 내린 거리를 걸었다. 화려한 네온사인들과 늦게까지 문을 열어둔 가게들로 인해 밤은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뱀을 목에 두르고 펍에 들어가는 사람, 현지인의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 이동하는 외국인들, 가게에 앉아 우리에게 일본말 중국말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타국의 신기한 풍경들을 감상했다. 모두가 이방인인 이 곳에서 우리가 더욱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이제 며칠 뒤면 화려한 관광 도시가 아닌, 자바섬의 평범한 시골 도시들로 이동하게 된다. 아마 발리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발리를 떠나자 비로소 인도네시아가 좋아졌다는 말을 했다. 자바섬이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가는 길이 결코 평탄할 것 같진 않지만 또 다른 '처음'을 맞이하기 위해 두려움은 내려놓고 무작정 가보려 한다. 좋은 여행, 나쁜 여행, 이상한 여행 가리지 않는 우리는 지금 '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