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삥땅 데이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인도네시아 #발리 #삥땅 #에휴

#2017년3월1일~2일


이곳 시간으로 밤 9시 40분경 우리의 두 번째 모험이 시작될 인도네시아 발리 공항에 도착했다. 동남아 특유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예전 같았으면 금세 불쾌지수가 하늘을 뚫고 올라갔을 날씨였지만, 오히려 친근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마 한국의 여름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떠나온 고국은 안녕히 잘 있는지 문득문득 그리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렇게 어지러운 시국에 세상 구경을 나온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때문에 언제쯤 대선이 치러질지가 우리 부부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국외부재자 투표'에 관한 법안들이 잘 준비되고 있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일과가 되었다. 이곳꽃은 없지만, 우리는 늘 '벚꽃이 흩날릴 날'만을 기다린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도착 시간이 늦어진 터라 잰걸음으로 수화물 찾는 곳으로 이동하여 짐을 찾고 입국을 했다. 공항에서 여행자 거리 꾸따kuta까지는 택시를 타고 가야 하는데, 검색해보니 바가지 쓰기 싫으면 블루버드그룹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택시가 서는 3층으로 가는 길에 계속 사람들이 자기 택시를 타라고 불러 세웠다. 하지만 꿋꿋이 노 땡스를 외쳤고 우리는 마침내 정품 택시(?)를 탈 수 있었다. 미터기를 켜고 점잖은 기사님이 운전을 시작하셨다. 시간을 보니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늦은 밤 낯선 곳에 오니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제발 한 번에 숙소에 닿을 수 있길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

그리고 이것이 '발리 삥땅 사건'의 시작이었다.

<애증의 발리 택시 아재. 거스름돈 천원 덜 줌.>

출발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우리의 저렴이 숙소는 굉장히 찾기 힘든 미로 속에 있었고, 택시 아재는 근처 골목에 차를 세우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재는 나에게 계속해서 숙소 이름을 물어보았지만, 내가 예약을 한 어플에는 한글로만 숙소 이름이 표기되어 있어서 보여 줘도 읽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읽어 줘도 못 알아 들었다. 버짓 도어 레기안 인. 이름은 왜 이렇게 또 어려운 것인가. 혀에 쥐가 나도록 굴려도 봤다가, 구수한 한국식으로도 해봤다가 갖은 방법을 써도 못 알아 들었다. 결국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어딜 가길래 그러냐고 묻기 시작했고, 나는 또 열심히 숙소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때였다. 우리의 첫 번째 삥땅맨이 등판을 한다. 그는 짝퉁 블루버드택시를 모는 기사였는데, 자기가 숙소를 안다고 했다. 데려다줄 수 있으니 탈거냐고 묻길래 한밤중 발리 최대의 클럽거리에서 커다란 짐가방을 매고 계속 서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그를 따라나섰다. 그는 2km 정도만 가면 된다고 했고,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차를 몰았다. 길이 굉장히 막혔고 피로가 쏟아졌다. 잠시 뒤 그는 우릴 내려주면서 여기서 가까우니 다른 택시는 안타도 된다고 챙겨주는 듯한 말을 남기고 3,500원 정도를 받은 후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아침에 안 사실이지만 삥땅 택시 아재가 우리를 태운 곳은 숙소 바로 옆 골목이었고, 데려다주는 척하면서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비슷한 위치에 내려 준 것이었다. 첫날부터 제대로 당했다. 하지만 양심적으로 숙소 간판이 보이는 곳에 세워주었고, 어두운 골목을 따라 150m쯤을 걸어 들어가니 드디어 우리가 묵을 곳이 나타났다.

<인간의 생존능력이란.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부서진 수납장, 더러운 침대 시트,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는 화장실, 매우 부실한 문까지. 미리 예약한 금액을 포기하고 내일 아침이 오자마자 새로운 숙소를 구해야 하나 깊이 고민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빵빵한 에어컨과 와이파이였다. 어찌 되었던 이 밤은 이곳에서 보내야만 했기 때문에 우린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모기 기피제를 잔뜩 뿌린 뒤 침낭을 깔고 누웠다. 좋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긴장이 풀어지며 잠이 솔솔 왔다. 그렇게 발리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이런 조식 포함 >

새벽 6시쯤 되니 내가 어젯밤 양계장에서 잠이 들었나 싶을 정도로 닭들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요상한 박자를 타면서 1시간가량을 계속 울다가 잠잠해진다 싶더니, 이번에는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아 어제 내가 정말 농장에서 잠이 들었나 보다'하고 1시간을 더 자다가 일어났다. 하루에 만 사천 원짜리 방에는 놀랍게도 조식도 포함이다. 싸긴 정말 싸다. 방문을 열고 나가 청소 중인 직원에'우리 아침 주세요' 했더니 작은 부엌에 들어가 열심히 요리를 시작했다. 버터 발라 구운 식빵 두 조각에 딸기잼과 스크램블 에그가 방 앞으로 배달되었다. 나름 룸 서비스인 것이다. 식사를 다 할 때쯤에는 커피 두 잔을 가져다주었다. 발리는 루왁 커피가 유명하다던데 그것일까 했지만, 그냥 설탕 커피였던 것 같다. 너무 쓰지 않고 달달하니 내 입맛에는 딱이었다. 생각보다 맘에든 조식 덕분이었을까, 어제는 보지 못했던 숙소의 장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여인숙 느낌이 물씬 나는 발리 최대 소음 보유 숙소>

침구가 더러운 것 빼고는 채광도 잘되고 숙소 앞 나무들도 참 예뻤다. 청소년쯤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는 닭과 이국적인 동상들, 아침마다 가게나 집 앞에 복을 기원하는 꽃과 향초가 놓인 풍경들. 모두 이 나라를 표현해주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골목이 개똥 밀집 지역이어서 발 밑을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이 매우 스릴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준비를 마치고 꾸따 구경에 나섰다. 거리마다 상점과 펍이 빼곡했다. 유심도 공항보다 거리에서 판매하는 것이 더욱 저렴하다고들 이야기해서 쭉 둘러보다가 한 가게에 들어갔다. 주인은 5기가를 2만 5천 원에 판다고 했다. 우리는 2기가를 8천 원에 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주인은 5기가 이하 칩은 자기 가게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돌아서 나오려는데 주인이 궁서체 표정을 하고 우리를 붙잡았다. '얼마 생각하는데?' 순간 그와 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나는 '8만 루피아(8천 원)'면 사겠다고 했고 몇 번의 입씨름 뒤 결국 그 가격에 하기로 했다. 주인은 유심을 끼워주려다 크기가 맞지 않는다며 잘라 오겠다고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때는 잘 몰랐다. 그가 발리에서 등판한 두 번째 삥땅맨이었다는 사실을.

<바다는 예쁘고 나는 호구고>

유심도 샀겠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꾸따 해변을 감상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유 꽂을 때 왔던 문자를 우연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알 수 없는 인도네시아어였지만 그 속의 아라비아 숫자들만큼은 너무나도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25,000루피아(2,500원)에 400MB+1GB 보너스 플랜이 장착되었다는 내용. 이래저래 검색을 하며 찾아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것이다. 유심을 자르러 들어간다고 하고 바꿔치기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남편과 나는 옷을 갈아 입고 15분을 걸어 다시 가게로 찾아갔다. 우리에게 유심을 판 아재는 없었다. 주인 대신 앉아있던 사람에게 왜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물었더니 모르쇠 일관. 낮잠 자러 갔으니 그 아재가 곧 올 거라고 이따 저녁에 다시 오라는 말 뿐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정말 저녁에 다시 갈 생각이었다. 그때 남편이 날 말렸다. 저녁 시간에 갔다가 괜히 봉변당할 수 있으니 그냥 잊자고 했다. 그 말이 맞았다. 여긴 우리나라가 아니다.

<이로써 우리는 삥땅 체험 전문가로 거듭나게 된다>

우리는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갔다. 날씨도 너무 덥고 짜증 나는 상황이라 편의점에 들러 시원한 맥주 한 병을 샀다. 남편이 먼저 한 모금을 마시고 병을 들여다보는데, 세상에 맥주 이름도 '삥땅'처럼 보인다. 원래는 '빈땅'.

숙소의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남편과 맥주를 마시며 발리의 삥땅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했다. 어이없고 화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냥 웃겼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여행길에서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버리고 줄여 꼭 필요한 것만 남기는 법, 삥땅 당할 시 멘탈 보존 법 등등.

<우릴 놀리는 듯한 이름의 맥주. 지금 놀리는거지 그치?>

좋지 않은 지난 일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여행자의 소양이다. 앞으로 더욱 조심을 하겠지만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그때마다 스트레스받고 화를 낸다면 여행의 의미는 퇴색되고 만다. 위기의 상황일수록 더욱 침착하고 느긋하게. 그래서 우리는 화를 내는 대신에 밀린 빨래들을 깨끗이 빨아 널었다. 우리의 실수와 삥땅 아재들에 관한 많은 기억들도 모두 함께 말이다. 빨래가 뽀송하게 마르면 우리의 안 좋은 추억들도 모두 뽀송하게 말라 있을 것이다. 그럼 고이 접어 기억의 서랍 한편에 잘 놓아두었다가 비슷한 상황에 다시 꺼내 참고용 자료로 사용하면 된다. 똘똘하게 말이다.

<빨래줄 덕에 본의 아니게 더욱 아늑해진 발리의 첫 숙소>

오자마자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난 이곳이 여전히 좋다. 800원이면 100% 천연 파인애플 주스를 사 먹을 수 있고, 걸을 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택시' 소리에 '노 땡스'로 화답할 수 있고, 멋진 수평선을 가진 꾸따 비치의 부서지는 파도를 감상하며 서핑을 배워볼까 꿈꿀 수 있는 곳.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발리'스럽게 살아봐야겠다. 이곳 '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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