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인도네시아 #바뉴왕이 #오토바이 #현지화
#2017년3월
지난밤 에어컨도 없는 후끈한 열대야 속에서 우리는 한 번의 뒤척임도 없이 꿀잠을 잤다. 덥지만 개운한 기분으로 8시쯤 자리에서 일어나 10시가 될 때까지 뒹굴거렸다. 오늘은 밤 12시 반에 자바 섬의 자랑 '이젠 화산 ljen mountain'에 가야 하기 때문에 낮에는 최대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휴대폰으로 가족들과 연락을 하며 누워 있는데, 거실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조식일 것이라 직감하고 나가 보니 먹음직스러운 인도네시아 가정식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냉큼 접시를 가져다가 갓 지은 밥과 따끈한 반찬을 골고루 담았다. 돌아가며 하나씩 맛보는데 어쩜 하나같이 맛있다. 안주인의 요리 솜씨에 연신 감탄을 하며 식사를 하는데 남편은 좀처럼 먹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지 아니면 이곳 음식이 잘 안 맞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먹는 것을 옆에서 한두 번 먹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 수박은 3개를 먹었다. 더위가 아니고 서른네 살의 편식인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나갈 준비를 한 뒤 우리는 더위를 피해 큰 길가에 있는 카페에 가기로 했다. 집을 나서는데 주인장 베니가 자신의 스쿠터를 공짜로 빌려주겠단다. 남편은 한국에 있을 때도 그렇게 오토바이를 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다. 나는 일관되게 나보다 먼저 주님 만나러 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며 말렸다. 그러다 드디어 마주한 오늘의 기회. 표정 관리에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의 넓어진 콧구멍은 즐거움을 말하고 있었다. 헬멧을 쓰고 키를 받고 간단한 강습 후 출발. 몇 번 도랑 쪽으로 엑셀을 당기고 또 몇 번 남의 집 앞 마당을 침범하며 겨우겨우 큰 길가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레이싱을 즐기고 있는 현지인들을 보고 혹시나 사고라고 날까 싶어 다시 오토바이를 가져다 놓고 걸어가기로 했다.
다시 걸어서 카페에 가던 중 염소 같기도 하고 양 같기도 한 생물과도 마주쳤다. 염양이(헷갈려서 지음)는 우리를 빤히 보더니 갑자기 엑셀을 밟은 것처럼 마구 뛰어갔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염양이가 떠난 자리에 오소소 검고 동그란 것이 쌓여 있었다. 아 미안.
이곳 카페는 보통 작은 구멍가게에 나무 의자를 놓고 동네 주민이 삼삼오오 모여 커피나 주스를 마시는 식인데 우리가 간 곳은 현대식 건물에 무려 녹차 블랜디드를 팔고 있었다. 심지어 지나치게 맛있었다. 우리는 에어컨 바로 앞 명당자리에 앉아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여행은 만나는 모든 곳이 낯설기에 꼼꼼한 준비가 없으면 그만큼 고생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어떤 시점에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인연과 사건 그리고 풍경들은 하기 싫은 고생을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있기도 하다. 호주의 따듯한 노을, 페리에서 만난 방랑 청년, 바뉴왕이 아이들의 해맑은 인사까지 모두가 그런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내가 가진 '가치'의 기준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고, 어제보다 더 이타적인 사람으로 살도록 이끌어 준다.
시원한 카페에서의 4시간을 4초처럼 흘려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나는 자박자박 밟히는 흙길 소리를 좋아한다. 바로 그 흙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묵는 숙소가 나온다. 낮은 연보라색 담장과 야자수가 어우러진 정겨운 풍경. 그 풍경의 완성은 동네 어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흐르는 이국적인 인도네시아 노래들이다. 그리고 집 앞 원두막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베니의 환한 미소가 포인트. 더워도 그것을 참을만한 충분한 매력이 분명히 이곳에 있다.
조금 뒤 시작될 화산 투어를 위해 초저녁잠을 좀 자두어야 하는데, '이젠 화산 ljen mountain'에서 볼 수 있다는 블루 파이어를 만날 생각에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활발하게 활동 중인 활화산에 언제 또 올라가 볼 것이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푸르스름하게 피어나는 몽롱한 불꽃을 언제 또 마주할 수 있을까. 결국 나는 지나친 두근 거림에 진정제로 미드 세 편를 연달아 투여한 뒤 덕후 같은 말을 중얼대며 잠이 들었다. 화산아, 꿈에서 짧은 예고편 좀 틀어주겠니. 직접 널 만나면 아무래도 심쿵 예약일 것 같구나. 어찌 되었든 이따 약조한 시간에 만나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