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인도네시아 #바뉴왕이 #이젠화산
#2017년3월
깊은 밤 모험을 위한 준비물은 간단했다. 두툼한 겉옷과 랜턴 그리고 물 한병. 밤새 더워하던 참에 산으로 올라가면 곧 추워질 거라는 말이 왠지 반갑게 느껴졌다. 이제 막 시작된 오늘은 아직 어둠이 가득하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집 앞으로 나가니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주인장 베니가 원두막에 앉아 있다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랜턴 챙겼니? 물도 챙겨야 해.' 베니는 필요한 물건들을 한 번 더 체크해 주고 곧 짚차가 올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참 낯선 이곳에서 우리는 참 좋은 사람을 만났다. 그의 따듯한 친절을 가슴속에 담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베니가 되어 주겠다는 다짐을 한다.
잠시 뒤 굉음을 내며 짚차가 멈춰 섰다. 안에는 다른 여행자 둘이 먼저 탑승해 있었고, 우린 수줍게 인사를 나눈 뒤 맨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동네를 벗어나 산길에 접어들자 짚차는 내달리다 못해 우당탕탕 굴러 올라갔다가 와장창창 굴러 내려갔다. 그동안 내 엉덩이는 방방에 맛 들인 아줌마처럼 주책없이 점프를 계속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정신없이 가다 보니,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 나타났다. 작은 매점과 화장실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를 가장한 텐트촌등으로 구성된 그곳에서 우리는 1시간 반 정도를 대기해야 했다. 그동안 전 세계 각지에서 이젠 화산을 보러 15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날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해 너무나 배가 고팠던 나는 매점에서 딸기 크림빵 하나를 사 먹고, 남편은 걸쭉한 자바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가이드가 나누어 준 방독면이 독한 유황 가스를 잘 막아주기를 바라며 열심히 테스트해두었다.
새벽 3시. 각자 담당 가이드들을 앞세워 이젠 화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지난다. 랜턴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지만,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오히려 즐거운 축제 기분이 들었다. 처음 5분간은 상쾌한 산 공기를 맡으며 오솔길을 걸었다. 하지만 산책은 거기까지. 가파른 오르막길에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 소리도 점점 사라지고 가뿐 숨소리가 가득했다.
나도 초반에 너무 빠르게 올라갔는지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남편은 내 상태를 보고 늦어도 괜찮으니 천천히 올라가자고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 묵묵히 올라가다 보니 어둠 속에서 흐릿한 웅장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없어 그 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책에서나 보던 화산 분지 테두리쯤에 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300m를 더 가니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 틈에 끼어 허술한 나무 난간 아래로 까마득한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서 푸르스름한 불길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블루 파이어! 니가 바로 그 블루 파이어구나!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요염하게 피어오르는 불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곤히 잠든 이젠 화산의 푸른 숨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코 앞이 낭떠러지라 오금이 저려왔지만, 그 풍경은 두려움마저 굴복시켰다. 이래서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치명적인 것이다.
이제 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고도가 2600m 정도 되는 데다 새벽 시간이라 기온이 매우 낮았다. 추위와 졸음을 애써 물려내며 바위에 기대 1시간쯤을 보냈을까, 지난밤 화산이 덮고 잠든 어둠을 해의 손길이 조금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드러난 이젠의 어깨에는 세월이 심어 둔 깊은 주름이 가득했다. 왠지 우리네 아버지들의 어깨 같았다.
어둠이 멀어질수록 감동이 다가왔다. 이젠은 큰 하품을 하듯 유황가스를 연신 뱉어냈고, 그 사이로 에메랄드빛의 화산 호수가 보였다. 여행 전 즐겨보던 다큐멘터리 같은 곳에서나 나오던 풍경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가르침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에 풍경을 새겼다.
한참을 멍하니 있는데, 분화구 가까이로 누군가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는 방독면도 마스크도 없이 바구니에 커다란 유황 덩어리를 담아가지고 올라왔다. 힘들것이 분명한데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친절하게 사람들과 사진도 찍어주고, 틈을 타 유황 비누 판매에도 열심히였다. 누군가의 치열한 삶 속에서 단순히 여행을 즐기고 있는 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우리의 여행이 타인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도록 보다 조심스럽게 이어져야 함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모든 감상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 또 다른 선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건너편 화산이 흰 구름을 걸치고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픽사에서 내놓은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이 시작할 때 나왔던 '라바'라는 짤막한 영상 속 화산을 꼭 닮았다. 그래서인지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주아주 인심 좋은 얼굴로 말이다.
한참을 내려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산길. 무료함을 달래고자 기념사진들을 남겼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우리 둘의 사진은 예쁘게가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 다큐로 변모되어 왔다. 그래서인지 못생김이 가득 뭍은 모습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남편이 나를 보며 '어휴 못생겼다. 사진 찍게 다시 한번 해봐'라고 할 때면 나는 신이 난다. 힘들어서 정신줄을 놓은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나는 남편이 웃는 게 좋다. 그래서 나는 늘 묻는다. '웃기지? 나 웃겨 안 웃겨?'
올라가는 것 못지않게 힘들었던 하산의 길. 한 시간 정도 가파른 내리막에서 동글동글 뭉쳐진 마른 흙들 때문에 스무 번은 족히 미끄러질 뻔했다. 겨우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니 우리랑 같은 차를 타고 왔던 프랑스 여자 두 명은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린 따듯한 햇볕에 잠시 앉아 몸을 녹이고, 차 뒷좌석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시 뒤 일행들이 돌아왔고 우리 못지않게 피곤한 얼굴로 '와 좋은데 너무 피곤하다'라고 연신 하소연을 했다. 서로 고생했다 격려하고 다시 기절 수준의 잠에 빠졌다. 조수석에 앉았던 남편 말로는 기사님이 험한 산길을 엄청난 스킬로 달려가셔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업어가도 모르게 꿀잠을 잤다. 역시 모르는 게 약이다.
9시경 집에 돌아온 우리는 피곤을 등에 업은 채 샤워를 하고 차려져 있던 조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1시 30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수라바야라는 도시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7시간을 가야 하는 먼 여정이기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지난번 24시간 걸려 호주 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적은 예산 때문에 주로 육로 이동을 하다 보니 시간을 값으로 지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우리 여행의 매력이다. 머물던 곳을 최대한 천천히 떠나, 머물 곳에 가능한 느긋하게 다가가는 것. 그렇게 오늘도 진득하니 익어가는 아주 보통의 두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