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6시간 기차 원정대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고난역경

#해피엔딩 #2017년3월


한국에 차차 봄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을 떠나온 후로 줄곳 여름을 살았던 나로서는 참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봄이 오려는 낌새로 마음이 간지러운 어느 날 '성시경의 좋을 텐데'를 들으며 밤 산책을 나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진짜 봄'을 위한 중요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멀리에 있어도 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앞으로 부대끼며 살 곳은 여전히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곳이 조금 더 살기 좋아지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안녕 오싱 베케이션. 고마웠다.>

오전 11시. 순박한 도시 바뉴왕이를 떠날 시간이다. 주인장 베니는 숙소 근처에 있는 다른 게스트하우스 운영도 맡고 있어 오전 시간에는 집에 없었다. 안주인도 기척이 없는 것 같아 메모지에 감사 메시지를 남긴 뒤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새벽 내내 이어진 화산 투어로 인해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1시 30분 기차를 타야 너무 늦지 않게 다음 도시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발길을 재촉했다. 큰길로 나가니 비싼 택시들만 신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저렴이 애마 '베모'를 타야 하는 가난한 배낭 여행자. 길가에 앉아 계시는 동네 아재들께 최대한 궁금한 표정으로 '베모'라고 말씀드리니 한 네다섯 분이 오셔서 베모를 잡아주시고 기사분께 통역까지 해주신다. 인도네시아가 이런 나라다. 데헷.

<천장에 도마뱀 30마리 붙어있는 바뉴왕이 기차역>

베모를 타고 20분을 달려 바뉴왕이역에 도착했다. 역 안으로 들어가 티켓 창구 직원에게 당당하게 1시 30분 수라바야행 기차표 2장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매진이야. 다음 차는 밤 10시야'. 하. 내가 글에 '하'를 안 쓰게 되는 날이 올까 싶을 정도로 깊은 빡침이 몰려왔다. 조금 일찍 와서 기차를 기다린다고 12시까지 왔건만 앞으로 10시간을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우선 취소되는 표가 1시에 나올 수도 있다고 하니 진정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매점에 가서 천 원짜리 오렌지 주스 두 잔도 사 왔다. 신나게 마시고 있는데 옆에서 갑자기 '후두둑' 소리가 났다. 새똥이었다. 나참 정말 가지가지한다ㅋ

<인도네시아 새똥 맞아본 사람. 이정도면 로또도 될 기세.>

물티슈로 응가를 닦아내고 자리를 옮겼다. 밤새 한잠도 못 잔 나는 순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잠깐만 짐에 기대 있으려 했지만 어느새 기절. 깜짝 놀라 일어나니 취소 표가 나온다는 1시가 다 되어 있었다. 표 확인을 위해 고객센터 창구로 갔다. 직원은 몇 번의 클릭으로 정보를 확인하더니 매정하게 '여전히 매진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10시 티켓 2장을 달라고 했고, 조금 편하게라도 가기 위해 비즈니스석을 선택했다. 가격은 1인당 12,000원.

공기가 갇혀있는 대합실 안은 상상 못 할 정도로 점점 더워졌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부는 곳에 앉아 있고 싶다는 남편의 의견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역 벽면 한쪽에 짐을 내려놓고 신발까지 벗은 채 앞으로 10시간을 어찌 버티면 좋을지 이야기했다. 배도 고프고 더위에 머리가 정지됐는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서로 분출 못한 짜증만 쌓여가던 그때 남편이 셀카 모드를 들이댔다. 처음에는 웃을 기운이 없었다. 하지만 억지로 웃으며 사진 한 방 박으니 또 피식 기운이 새 나왔다. 우리는 결국 이곳에서 10시간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베모를 잡아 탄 뒤 다시 시내로 이동했다.

<이제 진짜 그만 기다리고 싶은 아재.jpg>

KFC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그곳에서 2시간을 버텼다. 그리고 어제 갔던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카페에 가서 음료 2잔으로 4시간을 버텼다. 그래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에서의 기다림이라 참을만했다. 버티기 한판으로 6시간을 보내니 어둑어둑 저녁이 찾아왔다. 너무 늦으면 베모 잡기가 힘들까 봐 7시 반쯤 가게를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베모가 안 보인다. 불안한 마음으로 차가 가장 많이 다니는 교차 지점까지 걸어갔다. 한참을 두리번대고 있는데, 저 멀리 노란 베모 한대가 신호 대기에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저걸 놓치면 오늘의 모든 기다림이 물거품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짧은 다리를 잽싸게 놀려 운전석까지 돌진했다. 아재는 다행히 기차역에 간다고 했고 우리는 구사일생으로 진짜 마지막 노란 베모를 탔다.

<기차역 정전. 마지막까지 다채로운 바뉴왕이>

아직 채워지지 않은 기다림을 위한 2시간이 또 지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기차에 올라 탔다. 우리는 분명 편안한 이동을 위해 비즈니스석을 구매했다. 그런데 웬걸. 좌석에 앉으니 의자 속 딱딱한 쇠 덩어리 같은 것이 엉덩이를 짓눌렀다. 화산 투어 간다고 집을 나온 시간으로부터 22시간이 흘렀다. 체력이 흐물흐물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가야 할 길이기에 열심히 7시간을 참아냈다.

<엉덩이 인생 최대의 고비>

밤새 서늘하게 흘러나오는 에어컨 바람은 이상할 만큼 축축했다. 습도가 높아지면 아무래도 시원하다는 생각보다 몸이 찌뿌둥 해지는 느낌이 든다. 침낭을 하나 꺼내 덮고는 격동의 7시간을 달려 다음날 새벽 4시 30분 수라바야에 도착했다. 본래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고자 했으나, 시간이 애매하여 그냥 바로 족자카르타로 넘어가는 7시 30분 기차표를 샀다. 비즈니스석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가 없기에 그냥 나쁘면 얼마나 더 나쁘겠냐는 심정으로 이코노미를 골랐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사 온 컵라면 두 개로 대충 끼니를 때웠다. 잠시 뒤 해가 뜨고 역사 한편에서 멋진 밴드의 공연이 펼쳐졌다. 새벽 6시 반에 기차역에서 밴드 공연이라니. 여행의 의외성은 언제나 즐겁다.

<버스킹은 아침 댓바람에 하는게 제맛>

우리는 마침 흘러나오는 베사메무초를 들으며 기차에 탑승했다. 세상에나. 자포자기 심정으로 고른 이코노미석이 왜 이렇게 쾌적한 것인가. 뽀송한 에어컨에 편안한 좌석까지. 정말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또다시 느꼈다. 가지려고 할 때 앗아가고, 또 내려놓으려 할 때 배로 주는. 알 수 없는 세상의 이치에 그저 난 머리를 끄덕일 뿐이다.

<고생 끝에 낙을 태워 온 족자카르타행 기차>

엉덩이 어택 기차에서 도무지 청하지 못했던 잠이, 화수분처럼 쏟아졌다. 침낭에 몸을 돌돌 감고 여행의 동반자 핑크색 다이소 목베개를 둘러맨 채 신나게 꿀잠을 잤다. 그렇게 또 5시간을 달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족자카르타 Yogyakarta에 도착했다. 화산 간다고 일어 난지 36시간 만이었다. 휴.

<우리가 사랑한 족자카르카 시티>

지금까지 몇 개의 도시를 지나왔지만, 이곳 족자카르타는 또 느낌이 다르다. 호객 행위도 훨씬 적고,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시티 중앙에서 만난 지상 4층짜리 백화점은 굉장히 인상 깊었다. 피자헛에 맥도널드까지 갖추고 총 4개 층이 걸쳐 다양한 외국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었다. 심지어 더 바디샵도 있었다.

<신기하고 예쁜 옷 천지>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조금 쉬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맛있는 것좀 먹자는 남편의 주문에 부응하여 피자헛에 들어갔다. 조그만 스몰 사이즈 피자 한판과 새우 파스타 그리고 음료를 시켰다. 와. 이렇게 맛있는 피자헛은 난생처음이었다. 음식들은 순식간에 두 개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릇까지 먹을 뻔 한 긴박했던 순간>

느낌이 좋은 족자카르타와의 첫 만남. 내가 사랑하는 우리나라 '경주'의 모습을 닮아 더욱 정이 가는 이곳에, 아마도 나는 폭 빠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불교 사원 보로부두르와 힌두 사원 프람바난에 얽힌 전설, 그리고 골목골목 차려진 맛난 로컬 음식까지. 나는 바짝 마른 스펀지처럼 정신없이 이야기를 머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한껏 부푼 보따리를 조금씩 짜내 그 옛날 장터의 이야기꾼처럼 맛깔난 '한판'을 벌이고 싶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참 '재미있는 사람'이 되면 참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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