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여행의 순기능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싱가포르 #차이나타운

#가든스바이더베이 #육포

#2017년3월


전날 밤, 더위에 지친 남편은 가져갔던 이발기로 결국 머리를 밀었다. 소림사에서 막 수련을 마치고 속세로 복귀한 무도인의 포스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그와 함께하면 어딜 가든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할 것 같다. 참 든든하다. 그리고 밤톨같이 오소소 해진 머리를 꾹 눌러 쓰다듬는 일이 재미있다. 마치 어릴 적 과학 시간에 자석으로 철가루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것 같은 느낌이다. 나의 이상한 즐거움 목록에 당당히 추가할만하다. 여하튼 오늘은 고생의 한 획을 그었던 인도네시아를 떠나 싱가포르로 가는 날이다. 다음에 인도네시아에 또 온다면 족자카르타만 다시 방문하고 싶다. 그때는 돈이 없어 사지 못했던 전통 그림 바틱 한 장을 꼭 사고 말 것이다. 무라삐 화산도 가보고, 소토도 매일매일 먹어야겠다. 이렇게 이런저런 다시 올 궁리들을 싸매며 새로운 여정에 몸을 맡긴다.

<소림사 아저씨 무술해봐요. 쌍절곤 돌려봐요. 왜 못해요?>

싱가포르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동안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중요한 판결이 발표되기로 한 시간이 30분 정도 지났기 때문이다. 비행기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와이파이 잡기를 시도했다. 그리고 드디어 잡힌 신호와 쏟아져 들어오는 기쁨의 메시지들. 하마터면 공항에서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출 뻔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민중이 또다시 지켜낸 날이었다. 하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 벌 받을 사람들은 아직도 두발 뻗고 편히 자고 있다. 그들 모두 합당한 벌을 받을 때까지 절대 관심을 멈추어선 안된다. 때가 아닌 순간에 이 땅을 떠나야 했던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모든 사건은 지나간다. 하지만 영원히 지나가지 못하고 마음에 남는 일들이 있다. 그런 일들이 지금 대한민국엔 너무나 많다. 나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왜 아직까지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다. 정의가 승리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다 간 이들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정말 그 시작에 서 있다. 나와 남편은 비록 먼 타국에 있지만 이번에도 반드시 투표에 참여할 것이다. 반드시.

<여행 전 친구에게 부탁하여 제작한 노란리본 뱃지>

격앙된 감정을 가라 앉히고 수속을 마친 뒤 시티로 나가는 전철을 탔다. 싱가포르는 엄청 깨끗하고 안전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정말 딱 그랬다. 전철은 바닥에 누워서 자도 될 정도로 깨끗해 보였다. 그리고 객차에 붙어 있던 안내 표지판이 아주 흥미로웠다. 객실 내 음식 섭취 금지, 흡연 금지, 발화물질 금지 그리고 '두리안 금지'. 아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기다. 저 단호한 'No durians'을 보라. 두리안 냄새에 나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인데, 여기 사람들도 좋아하는 과일이지만 냄새는 별로라고 생각하나 보다. '시장에서 두리안을 산 날은 지하철 타고 집에 못가는 건가'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공공장소에 대한 엄격함이 엿보이는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냄새가 심해 슬픈 과일이여ㅋ>

깨끗하고 안전하고 모든 게 나이스한 이곳에도 사악함이 존재했으니, 그것은 바로 '물가'. 배낭 여행자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호스텔이다. 첫날 묵게 된 곳은 차이나타운 안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하룻밤에 한 사람당 20싱달러(약 16,400원)로 저렴한 편이었다. 우리는 40싱달러를 내고 2층 침대 하나를 빌렸다. 나는 아래층 남편은 위층에 입주했다. 처음 호스텔 앞에 도착했을 때 사실 조금 놀랐었다. 외관이 우리나라의 사설 도박장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굉장히 외부와 단절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내가 조금 좁다 뿐이지 그것만 빼면 아늑하고 지낼만했다. 우선 샤워실에 도마뱀이나 거미 같은 건 나오지 않으니까 나는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발 밑에 내짐+남편짐을 놓고도 편히 잤다. 호빗 승!>

이제 이슬람권 나라를 벗어났으니 나도 치마 및 반바지를 입을 수 있다. 만세. 짐을 풀고 딱 한 장 있는 원피스로 옷을 갈아입은 뒤 숙소를 나섰다. 거리는 온통 도시 도시했다. 서울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여의도만 함축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규모가 어마 무시한 고층 빌딩들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게 공원과 초목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마치 지구가 오염되어 인류의 생존을 위해 인공 돔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영화 더 아일랜드 the island나 기버 giver같이 말이다. 그러면서도 도시 곳곳에는 다양한 색들이 존재한다. 차이나 타운, 아랍 스트릿, 리틀 인디아. 중국인과 아랍인과 인도인들이 각자 자신의 문화를 그대로 들여와 이곳에 정착시킨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거리에 가면 아랍 스트릿이 아닌 정말 아랍 문화권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양파 같은 매력을 가진 나라이다.

<다양한 음식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호커센터.>

아침도 못 먹고 이동해온 터라 많이 배가 고팠다. 우리는 맛있는 식사를 싸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푸드 센터를 찾아갔다. 여기서는 이곳을 호커 센터라고도 부르며, 중요 포인트가 되는 위치마다 하나씩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호커 센터는 로컬 푸드인 치킨라이스가 유명하다. 우리는 치킨라이스 중간 사이즈 하나와 숙주 볶음을 시켰다. 숙주 볶음은 적절히 짭짤하고 아삭한 식감이 예술이었고, 치킨라이스는 특유의 육수로 지어낸 쫀든한 밥과 닭고기가 입 속에서 사교 땐스를 추는 듯했다.(미스터 초밥왕.st)

<내 입에서 4분의3박자로 왈츠를 추는 치킨라이스.>

밥을 호로록 먹어 치우고, 천 원짜리 생과일주스도 두 잔을 사 마셨다. 그리고 공짜 레이저 쇼가 펼쳐진다는 가든스 바이더 베이로 슬렁슬렁 이동했다. 공원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인공 나무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중간중간 공룡도 있었다. 작은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까 받았던 인공도시의 느낌도. 공원 건너편에는 싱가포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꼭대기 수영장으로 유명한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이 있었다. 장난 아니게 높다. 거짓말 살짝 보태 꼭대기를 올려다보려면 뒤로 넘어져 뇌진탕에 걸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높은 건물을 보면 나도 모르게 '우어 우어'소리가 남>

우리는 눈치 백 단 레이더를 활용하여 인공 나무 레이저쇼가 잘 보일만한 위치를 찾았다. 밤 7시 45분이 되자 간단한 안내방송이 나왔고, 유명한 영화 OST와 내가 사랑하는 디즈니 명곡들에 맞춘 화려한 레이저쇼가 시작되었다. 나는 인어공주 OST <Part of Your World>가 나오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사십이 되고 오십이 돼도 늘 그럴 것 같다.

<여름 밤, 감성 돋는 31살 아줌마의 눈에 비친 싱가폴 풍경.>

알찬 공짜 공연을 보고, 하룻밤에 얼마인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마리나 호텔의 중간층으로 올라갔다. 연결된 구름다리(?)를 통하면 쇼핑몰인 뒷건물로 넘어갈 수 있다.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그곳은 1층에 물길이 있어 배를 타고 다니면서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별게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바다가 나타났다. 읭?ㅋㅋ. 한강공원처럼 사람들이 어울려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꾸며진 공간에서, 뜻밖의 밤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여가수가 부르는 라이브를 들었다. 그녀는 <Hey soul sister>도 불러주었다. 아우 좋다. 사람과 노래와 밤바다가 있는 곳에 음식이 빠질 수 없지. 끔찍할 정도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 코너에서 마카로니&치즈라는 메뉴를 시켰다. 양해를 구해 프랑스인 가족들이 앉은 테이블 한켠에단출하지만 기분 좋은 저녁 식사를 했다.

<바다가 갑자기 '툭'하고 튀어 나와 '탁'하고 펼쳐졌다.>

천천히 흘러가는 물의 자락을 바라보며, 이번 여행을 통해 내 안 뒤틀렸던 것들을 하나씩 흘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파도를 만들고, 때로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지루하다. 그 시간들이 나에게 남긴 어떤 주름들은 여전히 펴지지 않은 채 세월에 감추어져 왔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풀어져야 할 것들이고, 그래야 내가 이전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가진 바보 같은 면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그런 사 말이다.


아마도 이런 나를 내가 좀 더 알아 갈 수 있도록, 그 많은 것들을 두고 떠나 온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순기능은 '정화'. 나를 씻어내는 일에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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