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우연히 행복해지다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싱가포르 #아랍스트릿

#무르타박 #벼룩시장

2017년3월


사람들은 보통 일상의 무료함을 덜어내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낯선 그곳에서의 '우연'들을 꿈꾸곤 한다. 영화 어바웃 타임 about time에서 처럼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난다거나, 구글&블로그에도 나와있지 않은 맛집을 찾아낸다거나, 잘못 든 길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난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 치여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삶.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유독 여행에 집중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예측 불가한 삶의 로맨스들이 충분히 실현 될 수 있는 공간, 그곳이 바로 '여행'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주 기능은 점차 카메라로.>

옛날 사람들은 길을 나설 때 종이 지도를 봤을 테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스마트폰 '검색'에 의존한다. 그래서 남편은 이 여행에서 스마트폰을 빼고 싶어 한다. 뜨겁게 달아오른 기계를 손에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 가방에 잘 들어 있는지 가다 말고 흠칫 놀라는 것도 매우 별로이다. 하지만 이 문명의 혜택을 고스란히 거부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에, 최소한의 도움만 받는 방향으로 가려한다. 그래야 '우연'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꺼내 쑥 잘라 과자에 끼워주신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차이나 타운에 위치한 숙소 앞에서 기절초풍할 정도로 맛있는 것과 마주쳤다. 아주 우연히. 별건 아니고 납작한 직사각 형태로 만든 콘과자 두장 사이에 두툼한 아이스크림을 끼워주는 것인데 가격도 1.5 싱달러(약 1200원)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무조건 하나만 산다. 뭐든 부족하게 먹어야 더 맛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히덕 대면서 한 입씩 나눠먹는 게 우리 스타일이다. 그러면 맛에 재미가 더해진다.

<무엇이 숨어 있을까 기대감에 부풀게 하는 장면들>

입안을 시원하게 채우고 아랍 스트릿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번에도 '아주 우연히' 내가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을 만났다. 벼룩시장. 나는 낡고 요상한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는 벼룩시장을 좋아한다. 이곳을 열심히 뒤지다 보면 정말 보물 같은 것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빈티지한 옷과 액세서리들에서부터 왜 파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까지. 그냥 구경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장면이다.

<벼룩시장의 핫아이템들.>

쭉 구경을 하다가 무더기로 옷이 쌓아 올려진 매대 앞에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춰 섰다. 그리고 1초간 남편의 눈치를 본 뒤, 마치 포크레인이라도 된 것 마냥 옷더미를 헤치기 시작했다. 다년간 연마해온 스캔 기능으로 좋아하는 패턴의 옷감을 찾고, 집어 올려 디자인을 보는 것. 간단하지만 아주 신중함이 필요한 작업이다. 나는 재빠르게 원피스 하나를 낚아 올렸다. 가격은 2 싱달러(약 1800원). 아마도 돈을 쓰면서도 돈을 번 것 같은 행복감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세상 흐뭇한 표정으로 원피스 득템 기념 촬영>

가방 속에 원피스를 넣고 행복하게 도착한 아랍 스트릿 초입에는 '잼잼'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남편이 배틀트립에 나왔던 곳이라 가보면 좋을 것 같다고 추천한 곳인데, 사람이 엄청 많았다. 가서 우리는 이름도 재미난 '무르타박'이라는 로컬 음식을 시켰다. 그리고 오늘도 빠질 수 없는 나시고랭과 내 사랑 나의 사랑 밀크티까지 시키면 완벽. 무르타박은 꼭 우리나라 부침개같이 생겼는데, 안에 닭이나 소고기를 넣어서 판다. 그리고 카레에 푹 찍어 먹는 것이 정석이다. 쫀득한 식감에 치킨과 카레가 어우러져 참 맛있다. 사실 향신료 냄새가 강한 편이긴 하지만, 나도 남편도 그다지 예민 보스들이 아니기에 다양한 로컬 음식 체험이 용이하다. 그리고 같이 나온 나시고랭은 빨갰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색감이었는데, 조금 놀랐지만 특유의 매콤한 맛이 입맛을 돋웠다.

<카레와 무르타박의 케미가 오지명+선우용녀 급.>

든든해진 배를 두드리며 아랍 스트릿 구경에 나섰다. 우리나라는 인천 차이나 타운에 가도 한국 사람들이 더 많지만 이곳 아랍 스트릿은 90% 이상이 아랍 사람이다. 거리도 건물도 식당도 온통 아랍풍이고, 커다란 이슬람 사원도 있다. 옛날부터 장사꾼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중국, 인도, 아랍 사람들이 몰려들어 지금의 이 거리들을 만들었고, 그들의 문화까지 고스란히 들여와 싱가포르의 색을 다양하게 물들였다. 그래서 참 끝없이 다채로운 국가라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웅장한 이슬람 사원>

싱가포르는 예전부터 참 요상하리만큼 획기전인 곳에 위치해 있어 서구 열강들의 끝없는 침략을 받았다. 동서양 무역의 요충인 이곳은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수많은 나라의 식민지배를 거쳐 옆 나라 말레이시아와 연방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인종적 이념적 갈등으로 하루아침에 연방 국가에서 강제로 내쳐진다. 말 그대로 토사구팽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워진 싱가포르에게는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 총리 '리콴유'가 있었다. 그는 쓰러져가는 싱가포르를 일으켜 세워 지금의 무역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국민들의 신뢰 속에 무려 26년간 총리직에 있었다. 물론 경직된 정치 형태에 대한 비판의 입장도 있다. 하지만 분명 배울 점이 많은 놀라운 인물이다.

<아랍스트릿에 사진관 차린 소림사 무도인>

아랍 스트릿은 우리나라의 가로수길을 꼭 닮았다. 컬러풀한 건물들과 아기자기한 로드숍들이 가득하다. 카메라가 예쁘게 디피 되어 있는 가게에 들어가니 포켓몬부터 원피스, 심슨, 토토로 등 덕후샘을 자극하는 굿즈들이 가득했다. 돈만 있었으면 너희들을 다 데리고 갔을 텐데. 마음이 허했지만 심슨과 기념사진 한 방 찍고 돌아 나왔다. 물질에 대한 포기가 익숙해져 간다. 나는 사람과 마음에 더 큰 가치를 두고, 물질을 소유하는 것에 욕심 내지 않는 방향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나이 들어 내 아이와 손주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그래 엄마는, 할머니는 그런 분이셨어'라고 회고할 수 있도록 살고 싶다.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더욱 단련해야 함을 안다. 때문에 이 여행을 통해 그 시작을 배워가고 있다. 아주 천천히 말이다.

<다음에 가면 널 집어 올거야. 기다리고 있어 심슨.>

요즘 하루 10km 이상, 때로는 무거운 짐을 진채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가 뒤뚱뒤뚱 귀여운 걸음을 걷는 아기들도 보고, 보물창고 같은 벼룩시장도 만나고, 알록달록 다양한 색감을 입은 도시들도 지나친다. 모두 다 '우연'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우연'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계획'을 벗어나는 일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우연'도 흔쾌히 맞이 할 수 있다. 헝클어질 것들은 이미 모두 버리고 떠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걷는 여행길 위에서는 '우연'이 '계획'이 된다. 그래서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한 치 앞에 멋진 것이 기다리는. 그게 바로 오늘, 우리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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