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먹고 사는 것에 관하여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싱가포르 #맥도널드

#서울스파이시버거 #칠리크랩

#2017년3월


인류의 역사 속에는 풀지 못한 난제들이 여럿 있다.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도 그중 하나라고 자신한다. 이 명제가 해결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저 둘 사이 어딘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에' 아주 예민한 것 같다. 회사를 나오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갔다 와서 뭐 먹고살래?'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1960년대가 아니다. 건강한 신체와 정신만 있으면, 이 목숨 먹여 살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음'에 있어 정말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삶을 위해 먹는가'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무거운 명제라고 생각한다.

<먹으러 가는 길 발견한 우산 나무 공원>

어떤 사람이 그랬다. 싱가포르를 '보기' 위해 왔다면 하루 만에 모든 구경이 끝난다고. 하지만 '먹기' 위해 왔다면 삼일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말이다. 난 대식가도 그렇다고 미식가도 아니지만, 며칠 이곳에 지내면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먹을 것도 많고 맛있는 것도 참 많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하루 중 저녁만 기다리며 살았다. 아침은 부족한 잠을 위해 사라진 지 오래고, 점심은 부족한 시간을 쪼개 일 하기 위해 먹는 충전에 불과했다. 때문에 저녁은 어떤 맛있는 것을 어떤 좋은 사람들과 먹을까 생각하는 것이 굉장한 기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 세 번, 그 행복한 생각에 빠진다.

<호기심 자극! 한류의 끝은 어디인가.>

우선 우리가 새롭게 시작한 맥도널드 프로젝트. 전 세계의 맥도널드에 가서 그곳에만 있는 스페셜 메뉴들을 섭렵하는 것이다. 마침 싱가포르점에는 한류가 가미된 매운 버거가 출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라니, 더 기대가 되었다. 이 메뉴의 특이한 점은, 김치 맛 쉑쉑 감자를 먹을 수 있다는 것. 감자튀김을 봉투에 넣고 김치 맛 가루를 뿌린 뒤 마구 흔들면 완성. 맛은 김치 사발면 스프를 감자에 뿌려 먹는 것 같다. 버거는 패티를 치킨과 소고기 중 고를 수 있었는데 우리는 하나씩 시켜보았다. 매우면서도 달콤한 닭강정 같은 맛이 많이 났다. '우어 한국의 맛이다'. 근데 두 번 시켜먹을 만한 맛은 아니다. 단호.

<케이스가 너무 예뻐서 가져오고 싶었으나 버림.>

그런데 이 버거 광고, 유튜브에서 찾아봤는데 가히 충격적이다. 한번 찾아보시길. 한류 광고의 잘못된 예임이 틀림없다. 이상한 한국어 대사며 컨셉까지. 이건 정말 아니다. 전에 이슈가 되었던 발로 만든 평창올림픽 홍보 영상만큼 엄청났다. 든든하고 흥미로운 식사를 마친 뒤 오후 시간은 내내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영상 작업을 했다. 우리가 머물렀던 카페 이름은 '눈송이'. 한글로 당당하게 적혀 있고, 국내에 많은 빙수 체인점들과 같은 메뉴를 팔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이곳의 한류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참을 시원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밖으로 나와 리틀 인디아 거리를 걸었다. 인도는 힌두교 국가로, 어제 보았던 아랍 스트릿과는 또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번화가의 커다란 힌두 사원은 다신교의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신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슬람 사원이 차분한 느낌이라면 힌두교 사원은 화려함의 정점을 찍는다. 한 나라 안에 이렇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아직 안가봤지만 진짜 인도와 뭐가 다를까>

누군가가 말했듯, 이곳의 구경은 이틀째인 어제부로 끝났다. 하지만 우리가 남아 있는 까닭은 며칠간 벼뤄온 '칠리크랩'을 먹기 위함이다. 가격이 굉장히 비싸기 때문에, 며칠간 밥값과 숙박비를 아껴가며 마지막 날이 되길 기다렸다. 각고의 노력 끝에 정해진 예산 중 50달러를 크랩이에게 쓸 수 있게 되었고, 드디어 '오늘'이 된 것이다. 가장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는 습성은 나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오늘의 마지막 식사를 성대하게 치르리라. 슬슬 배에 허기가 질 무렵 전철을 타고 칠리 그랩을 가장 저렴하고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진 뉴튼 호커 센터 Newton Food Centre에 갔다.

<탁 트인 야외에 꾸며진 호커 센터. 우왕 굳.>

지난번 갔던 차이나타운의 호커 센터처럼 답답한 실내에 있을 줄 알았는데, 마치 하와이 바비큐 파티장(가본 적은 없지만) 같은 느낌으로 꾸며져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이 추천한 27번 가게가 어디 있나 둘러보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앉고 보니 바로 앞에 가게가 있었다.

<칠리 크랩 판매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지 우리말로 '의리! 여기가 제일 맛있어요'라고 쓰여 있었다. 옆 옆에 위치한 라이벌 가게에는 또 이렇게 쓰여있다. '먹고 죽자'. 우리나라 조폭이 와서 한국말을 알려줬는지, 아주 문구들이 마초마초하다. 우리는 '죽음'보다는 '의리'를 택했다. 다가가니 주인 아재가 서둘러 메뉴판을 건넨다. 한국인 취향저격용 세트메뉴들이 적혀있었다. 나는 세트메뉴는 필요 없으니 단품을 보여 달라고 했다. 메뉴판을 뒤집어 35달러짜리 칠리크랩 1kg 하나와, 5달러짜리 새우 볶음밥 하나를 시켰다. 그리고 음료수 가게로 가서 파인애플 주스 한잔과 맥주 한잔을 샀다.

<윤기 나는 칠리 크랩과 곁들이면 딱 좋은 볶음밥&빵>


잠시 뒤 싱가포르 체류의 원대한 목표가 우리 테이블 위로 착륙했다. 윤기가 흐르는 붉은 게딱지가 영원히 마를 것 같지 않은 소스에 몸을 담근 채 앉아 있었다. 살이 통통한 다리 하씩을 먹으며 말은 못 하고 '음!!' 하고 감탄사만 연발했다. 서비스로 나오는 따끈한 빵에 소스를 듬뿍 찍어 먹을 때면, 그동안 아껴왔던 식비들에 대한 분노도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부드러운 칵테일 새우가 더해진 볶음밥. 게딱지를 뒤집고 그 안에 밥을 넣어 소스를 투하한 뒤 쓱싹쓱싹 비볐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다시 침이 고인다. 특유의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정말 예술이었다.

<소스에 비벼 먹는 밥은 언제나 진리.>

정신없이 먹고, 입가에 묻은 칠리소스를 닦으며 즐겁게 웃었다. 천천히 내려앉는 밤공기까지도 맛있었다. 우린 그 순간 먹기 위해 사는 것도 살기 위해 먹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어떤 삶을 위해 먹는가'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삶'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답은 아마도 여행의 말미에 가면 조금이나마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나는 좀 더 풍미 있는 시간들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유가 분명한 오늘의 식사처럼, 의미가 분명한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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