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기억의 기록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말레이시아 #조호바르 #머물기

#2017년3월


어느 날 문득 뽀얗게 먼지가 쌓인 기억들을 들여다보았을 때, 기대보다 많은 것들이 남아 있지 않아 실망하곤 했다. 어떤 순간에 대한 그 '감정'은 오롯한데, 감정의 근원이 되는 말들이나 함께했던 이들의 표정 행동들이 그곳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희미해져, 늘 자락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이나 글이나 영상을 통해 순간을 기록하려 노력한다. 지난밤, 12개의 이층 침대가 놓인 호스텔 한켠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남아있는 거라곤 할머니 무릎에 앉아 대성통곡하던 나의 돌사진뿐이었다. 눈을 감고 할머니 얼굴을 그려보았다. 아직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5년 또 10년이 지나도 나에게 이러한 되새김이 가능할까. 덜컥 겁이 났다. 미처 남기지 못한 기억은 이렇게 또 후회를 남긴다.

<인도 아저씨, 이 사진 주인공 나에요. 시선 강탈 하지 마요.>

나는 사진을 찍는 행위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잠시 필름 카메라의 매력에 빠져 공짜 강좌 들으러 사진관에 두 달 왔다갔다한 것만 빼면, 음식이 나올 때 사진부터 찍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여행을 시작하고, 이 순간들을 조금씩이나마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당장 이틀 전에 무엇을 했는지도 '가만있어보자~'를 세네 번은 해야 기억이 나는 판국이니, 사진을 찍는 것은 어쩌면 보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숙소를 떠날 때면 꼭 그 앞에서 한 컷씩 사진을 남기려고 노력 중이다. 어떤 곳에 머문다는 것은, 곧 그곳에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두고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주 잠시일지라도 말이다.

<내 기억 중 가장 싱싱하게 남아있을 싱가폴의 마지막 모습>

몸이 단련되었는지, 예전보다 짐이 가볍게 느껴졌다. 싱가포르를 떠나 말레이시아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매우 간단하며 가까웠다. 숙소 근처에 위치한 익스프레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남짓을 달리면 국경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려 간단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다시 15분 정도 버스로 이동해 입국 수속을 한다. 그러고 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네 번째 국가인 말레이시아에 도착해 있었다.

<작업하는 남편 너머로 보이는 요상한 '패밀리 문' >

사실 이곳 말레이시아 국경 도시 조호바르에 온 이유는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이동 속에서 매일매일을 기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글은 어디서나 쓸 수 있지만, 영상은 한 번 시작되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까다로운 부분이 있어서 한 곳에서의 머묾이 절실했다. 그래서 결국 이곳 조호바르에 체류를 결정하게 되었다. 우리가 지내고 있는 호텔은 왕년엔 화려했으나 현재는 낡아버린, 그렇지만 지내기에 매우 편리한 곳이다. 문이 굉장히 가정집 방문 같은 나무 재질로 되어 있다. 그리고 침대 맞은편에 패밀리 스타일이라는 이름도 낯선 제도로 옆방과 연결되는 문도 하나 달려 있다. 꼭꼭 잠가두었지만, 옆방에 묵는 소녀(?)들의 수다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바람에 모두가 한 가족인 양 지내고 있다. 그녀들도 나와 남편의 정체모를 노래들을 듣고 있을 것이다. '영원한~ 동반자여어♪ 헛!'

<공사판과 어울리지 않게 나름 감각적인 파스타 가게>

호텔 앞은 온통 공사판이다. 소음이 하루 종일 들려오는데 예민하지 않은 우리 둘은 큰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있다. 한참 작업을 하다 배가 고파지면 한 끼는 호텔 앞에 딱 2개 있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다. 둘 다 이상하게도 이탈리아 음식을 판다. 파스타와 피자 이런 것들 말이다. 파스타는 6링깃(약 1700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배부르게 먹고 돌아와 또 각자 할 일에 몰두한다. 저녁으로는 컵라면을 먹고, 다운받아 둔 OCN 드라마 '보이스'를 보며 동네 슈퍼에서 사 온 과자를 먹는다. 며칠째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것도 이것대로 매우 매력적이다.

<두근두근 국외 투표의 시작>

그리고 중간에 짬을 내 4월 말쯤 도착할 나라를 체크한 뒤, 국외부재자 신고도 완료했다. 신청하면서도 내내 설레었다. 국민들의 노력으로 지켜낸 선거라 기뻤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아직 일말의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에 기뻤다.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장미가 5월의 하이라이트인 것처럼, 선거는 민주주의의 하이라이트이니 우선 나를 기뻐하게 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또 다른 혼란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끝까지.

<밥 먹으러 나갔다가 그림자 놀이>

후회 없이 지금을 기록하기 위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여행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 기록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나에게 남아 있는 기억의 공간은 너무나 작다. 내가 작아서인지, 마음의 그릇이 작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렇게나 많은 하루들을 다 담아낼 여력이 없다. 때문에, 남길 것은 남기고 또 버릴 것은 버려가며 그렇게 시간의 자락을 붙들어 두고 있다. 꼭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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