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아이처럼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말레이시아 #조호바루 #레고랜드

#2017년3월


내 안에 잠재워진 동심은 몇 퍼센트일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는 웃기게도 아직 '어른'이 아닌 것 같다. 해가 쨍쨍인 어느 날 바닥에 깔린 그림자와 즉석 탭댄스를 추고, 여전히 파랑과 노랑의 유치뽕 조합을 사랑하는 것이 어쩌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나 나는 그것을 나에게 남은 마지막 동심으로 정의해버렸다. 그리고 나와 사는 남자는 정말이지 이런 '재미있는 것'과는 눈곱만큼의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심심한 어른이다. 싱가포르 호스텔에서 조금 친해졌던 옆 침대 네덜란드 친구에게 나중에 또 만나자고 페이스북 아이디를 물어보겠다고 할 때도, 그는 지루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유치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별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가 설명을 요구하면 나는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못한 아이처럼 풀이 죽게 되는 것이다.

<저 색깔들 어쩔꺼야. 너무 예뻐. 취향저격.>

이런 횡포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며칠간의 칩거를 끝내고 크게 내켜하지 않는 그와 조호바루 외곽에 위치한 레고랜드를 찾았다. 오. 입구에서 알록달록 컨테이너 박스만 봤을 뿐인데도, 톡톡톡 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뚜루뚜룰루. 시키지도 않은 노래와 룰루랄라 스탭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남편은 '얼마나 재미있는지 두고 보자'는 표정으로 자신은 '동심'이 1도 없는 사람이라고 선언을 했다. 나는 그냥 마음을 열고 네 안의 '아이'를 허락하라고 조언했다. 그게 '핵노잼 말기 환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었다.

<어서 왓.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한 번 놀아 보자꾸나.>

레고레고한 입구를 지나니, 이 곳에선 내가 지나온 세상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냥 이곳은 다른 차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벤치에 앉아 코를 골며 졸고 있는 아재도, 작은 호수를 바라보며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언니도, 스타워즈 영화 속 주인공들도 모두 다 레고였기 때문이다. 그냥 여기서는 코에서 나오는 숨까지도 노랑 빨강 파랑의 레고 조각일 것만 같다. 색깔이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많은 연구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기에, 제발 이 알록이 달록이들이 남편의 동심을 찾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자고로 사진은 이렇게 찍어야 제맛>

첫 삽은 역시나 나였다. 레고 주민들을 하나씩 찾아가 극사실주의 포즈들을 연출하며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이 혼미해진 틈을 타, 스타워즈 전시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라고 요청했다. 살짝 어색했지만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슬슬 재미를 느끼고 있는 눈치였다. 몇 개의 놀이기구를 대기 없이 슝슝 탄 뒤,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양껏 준비된 레고로 자유롭게 자동차를 만들어 경주를 할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여기부터 진정한 동심 힐링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한 때 각기좀 추던 아재의 로봇 따라잡기>

내가 영유아용 큰 블록을 가지고 놀 동안, 남편은 수많은 어린이들 틈에서 용케도 바퀴 여섯 개를 얻어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모습을 더욱 자세히 구경하러 다가가니 '잘 못하겠어. 나는 상상력이 없나 봐'라며 수줍어했다. 나는 '그런 게 어디 있어. 다 자기 방식대로 만드는 거지. 이것도 잘 만들었는데?'라고 진실을 말해주었다. 아마도 남편은 전형적인 한국식 교육의 피해자인 것 같다. 나도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어릴 적 만난 몇몇의 좋은 선생님들 덕분에 크게는 아니어도 나름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창의력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을 만들어 내도 그것이 누군가의 평가나 비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안정감이다. 하지만 내가 받아 온 교육 속에 그런 안정감은 없었다. 늘 선생님의 평가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적는 일기도 매일 검사를 받아야 했고, 그들은 거기에까지 코멘트를 적는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숫자로 개인의 적성이 정해졌고, 누군가는 항상 누구의 위 아니면 아래였다. 그런 환경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 아닐까. 조금은 슬픈 생각이 들었다.

<초집중 모드 가동해서 완성한 오토바이>

한 시간가량을 공들여 만든 남편의 첫 레고 작품. 구조가 완벽한 오토바이였다. 작은 부속품 하나까지도 세밀하게 고른 정성이 엿보였다. 그의 작품은 나에게 큰 감동이었다. 자신에게 한계를 두지 않고 끝까지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이 자랑스러웠다. 정작 본인은 별거 아닌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가 스스로 매우 뿌듯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 남편에게 이런 기회를 몰래 그리고 더 자주 만들어 주게 될 것 같다. 그가 심심한 어른이라고 판단만 하기보다 나의 색을 좀 더 넓게 퍼트려 그에게 물들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봄같이 차분하고 착한 심성이 나를 조금씩 물들게 하고 있듯이 말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줄 모른다더니>

이후 남편은 재미의 급물살에 몸을 내던졌다. 내가 극사실주의 사진을 찍었다면, 그는 극극사실주의 사진을 찍었다. 흔히들 정신줄을 놓았다고 표현하는데, 그게 내가 딱 좋아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늘의 처방은 아주 효과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레고랜드를 나오면서 남편이 말했다. '없었던 동심이, 쪼오금 생긴 것 같아'라고.

<데헷.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이렇게 다르다>

누구나 마음속에 '동심'이 있다. 다만 그것을 되찾는데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어른이라고 딱 '어른의 삶'만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 때로는 철없게, 때로는 엉뚱하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 가끔씩은 내 안의 '어린이'를 깨워 신나게 놀아도 좋을 것 같다. 나노 블록을 사서 맞추거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 보거나, 정 어렵다면 조카 또는 아들 딸들에게 놀이에 대해 한 수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엇이 됐든, 우리가 가졌었던 그 유연한 마음을 영영 놓쳐버리기 전에 시작해보도록 하자. 지금 이 순간 '아이'처럼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4.기억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