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나의 고백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말레이시아 #말라카 #고백

#2017년3월


나는 장진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만의 시답잖은 농담이 곁들여진 장면이 좋고, 그 속에 진하게 녹아있는 사람에 대한 관찰들을 사랑한다. 그의 영화 중 <아는 여자>는 아마도 스무 번은 족히 본 것 같다. 수수하고 담백한 대사들이 참 마음을 울린다. 주인공 동치성은 사랑 때문에 빈볼을 던지는 야구선수이다. 그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속 한 장면_출처: 네이버 영화>

'저요, 사랑에 대해 잘 몰라요. 근데 사랑하면요, 그냥 사랑 아닙니까. 무슨 사랑, 어떤 사랑 그런 거 어디 있나요. 그냥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죠. 도둑이라서 잘은 몰라요.'


극 중 동치성의 집에 든 도둑이 남긴 말이다. 우린 이 복잡한 감정에 대해 정말로 잘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수많은 것들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정의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영화 속 대사처럼 무슨 사랑 어떤 사랑 그런 게 어디 있나 싶다. 그건 그저 자신에게 덜 솔직한 결과가 아닐까. 눈 앞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그리고 넘어가고 있는 마음의 페이지를 깨끗하게 인정하면 문제는 더욱 간단해진다. 사랑은 그냥 사랑이다.

<도시의 첫 얼굴은 늘 인상 깊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세 시간 가량 달려 도착한 바닷가 도시 '말라카 malacca'. 말레이시아의 유럽이라는 애칭답게 베네치아를 많이 닮았다. 강을 따라 주황빛 지붕을 얹은 집들이 이어져 있고, 건물 벽마다 다채로운 컬러의 그림들이 한창이다. 가벼운 옷을 꺼내 입은 뒤 거리로 나와 도시의 품을 파고들었다. 적도의 해는 어느 때보다 강렬했고, 금세 몸이 축축 쳐질 정도로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도시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마음을 동요하게 한다. 파란 하늘 아래 세워진 붉은 교회. 지붕이 뾰족한 중국식 모스크. 이 모든 것이 과거 침략의 결과물임에도 내 눈은 끊임없이 이끌렸다. 사랑이었다.

<핑크빛에 가까운 교회와 중국식 모스크>

이동하느라 챙겨 먹지 못한 식사를 위해 유명한 식당에 들렀다.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존커 스트릿에 위치한 존커88.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주로 말레이시아 빙수인 첸돌을 먹는다. 우리는 오는 길에 우버 기사님께 추천받은 아쌈이라는 국수와 첸돌을 함께 시켰다. 아쌈에서는 신기하게도 묵은지 김치찜 맛이 났다. 밥 말아먹으면 감기도 뚝 떨어질 정도의 칼칼함이 있었다. 이 사람들 어디서 김치 국물만 수입해다가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우리의 맛이 우리나라에만 있을 것이라는 편협한 생각은 이제 고이 접어 두어야겠다. 그리고 첸돌. 이 디저트는 시원한 우유 얼음에 땅콩엿을 녹여 얹은 것 같은 맛인데 먹을수록 중독적이다. 이 두 음식의 조합은 운명임에 틀림이 없다. 아쌈을 먹은 뒤 첸돌을 먹지 않는다면 왠지 슬플 것 같다. 이 둘은 반드시 만나게 해줘야만 한다. 이것도 일종의 사랑일지 모르니까.

<비주얼은 육계장이요 맛은 묵은지찜이라.>

내 뱃속이 아쌈과 첸돌의 오작교 역할을 한 것에 뿌듯해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어딜 가나 마주치게 되는 이곳의 근거리 교통수단 릭샤는 다른 곳과 사뭇 다른 비주얼을 가지고 있다. 자전거와 좌석과 피카츄가 한 몸이 되어 신나는 땐스곡과 함께 도시를 내달린다. 보고 있는 사람은 신나는데, 왠지 타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 창피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예산을 아끼느라 못 타봤지만, 내가 탔다면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창피해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볼수록 매력적인 릭샤들은 밤이 되면 번쩍번쩍 조명을 켜고 달린다. 흥겨움이 배가 된다. 이 도시가 점점 좋아진다.

<낮에는 요조 피카츄, 밤에는 날라리 피카츄.>

점점 기승을 부리는 더위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단 하루를 묵어도 숙소를 '우리 집'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그러면 맘이 편안해진다. 숙소는 매일이 낯선 이곳에서 우리가 쉼을 찾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집에 가는 길, 골목골목을 지나다 에그 타르트를 발견했다. 5링깃(약 1300원)을 내고 2개를 구매했다. 이곳 음식 치고는 비싼 가격이었다. 이 귀한 것을 하나는 먹고 하나는 아껴먹으려다 개미에게 몽땅 털린 사건은 그만 넣어두기로 한다. 속상하니까.

<개미한테 삥 뜯기기 전 고귀한 자태의 에그타르트>

하루 종일 사랑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붉은 교회가 세워진 네덜란드 광장의 'I LOVE MALACCA' 조형물을 보고 깨달았다. 아, 내가 있는 지금 이곳이 사랑이구나. 이 시간이, 언제 친구가 될지 모르는 내 옆의 낯선 이가, 달리는 피카츄가 내 사랑들이구나. 깨달음의 완성은 언제나 실천이라고 배웠다. 전 세계 관광객이 모인 광장 한켠에서 마음의 입을 열어 즉시 고백을 시작한다.

아름다운 것들아, 내가 너를 격하게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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