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말레이시아 #말라카 #성바울교회
#2017년3월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보고 또 담으며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별된 장면들을 보고 선택하며 기억한다. 나는 쓸데없지만 색감이 예쁜 많은 것들을 기억한다. 분홍빛 꽃 앞에 세워진 파란 오토바이. 말라카의 명물도, 역사적 장면도, 유명인의 소유품도 아닌 이런 장면이 나에게는 감동이다.
우기는 분명 비가 많이 오는 기간을 일컫는 단어이다. 그리고 동남아는 지금 우기이다. 하지만 여행이 한 달을 넘어선 지금, 우리는 단 한 차례도 비를 맞은 적이 없다. 올 것 같다가도 길만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쨍쨍이다.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을 때 비가 마구 쏟아져도 다 먹고 나면 금세 말짱해진다. 참 신기한 노릇이다. 때문에 여행을 떠날 때 회사 같은 팀 과장님께 선물 받은 예쁜 우비는 아직도 개시 전이다. 아쉽지만 맑고 청명한 날씨에 감사하며 발길을 옮긴 곳은 술탄 박물관과 성 바울교회. 옛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두 곳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장면들을 기대하며 천천히 눈과 귀를 열었다.
세월에 낡아 외벽만 남은 교회 안에는 커다란 묘비들이 쓸쓸하게 놓여있다. 묘비에는 어떤 사람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살았다는 간략한 내용과 가문의 문장 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의 인생이 새겨진 돌은 아무도 남지 않은 이 곳의 마지막 존재들 같았다. 묘비들을 지나 교회 안쪽으로 들어가는 빨간 아치형 문은 유독 그때 그 시절의 왕성함을 보여주는 듯한 색감을 가졌다. 지붕이 뻥 뚫린 교회 중앙에서 올려다본 네모진 하늘과 빨간 문은 정말이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눈부신 색감들에 감탄하며 목에 담이 오도록 하늘을 바라보던 그때, 어디선가 슬프고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더듬어 찾아간 그곳에서는 오랜 여행의 흔적을 입은 남자가 난생처음 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가마솥 두 개를 이어 붙인 것 같은 모양의 악기는 완벽하게 오묘한 음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슬픈 듯 신비한 연주는 허물어져가는 교회와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나중에 찾아보니 스위스의 '행 드럼 hang drum'이라는 악기였다. 장인이 한땀한땀 직접 제작하기 때문에 가격도 몇천만 원을 호가하며, 그 장인이 세상에 딱 2명뿐이어서 돈이 있다고 해도 막 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역시 세상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지난날의 나는 그저 손톱만큼의 세상을 이해한 뒤, 마치 어른인 양 행동했던 것이다. 연주를 듣는 내내 부끄러웠다. 모름에 대한 것이 아닌 앎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좁고 얕았는지를 말이다.
말라카 시내가 온통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교회에서 천천히 내려와 술탄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특이하게 맨발 입장이다. 삐걱거리는 나무 마루를 밟으며 과거 말라카의 역사를 둘러보았다. 박물관 한 켠에는 시청각 자료가 방영되는 TV와 전통 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 모습을 자세히 보니 그릇에 있는 구슬을 집어 한 칸에 하나씩 놓으며 이동하는 게 기본 규칙 같아 보였다. 놀이의 이름은 '총칵'. 집중하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웠다.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만난 꽃무늬 계단. 할머니 보석함 위에서 본 것 같은 엔틱한 느낌이 물씬 난다. 나는 이런 멋스러운 촌스러움을 좋아한다. 이런 멋은 오래될수록 더 짙어진다. 그래서 난 낡고 오래되어 세월을 입은 것들이 참 좋다. 지인들과 남편은 나에게 할망구 같은 옷 좀 그만 입으라고 타박하지만, 내가 선천적 할망구 지향형 인간임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오늘도 이런 장면에 마음을 빼앗기고만다.
잠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뒤, 금토일 밤에만 메인 거리에 열리는 야시장을 찾아갔다. 거기서 저녁 식사를 핑계로 다섯 가지의 군것질을 하고, 부른 배를 퉁퉁 두드리며 거리를 걸었다. 우연히 지나치던 골목을 보고 남편은 시대극에 나오는 우리나라의 옛날 거리 느낌이 난다며 사진을 찍었다. 정말 '야인시대'나 '왕초' 같은 드라마에서 본듯한 세트장 느낌이었다. 운치가 있을 대로 있는 말라카의 저녁은 그렇게 기분 좋게 흘러갔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만남과 모험에 설레며 깊은 잠에 빠졌다. 이 모든 여행의 장면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