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내 친구 우딘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말레이시아 #피낭 #친구

#로컬여행 #2017년3월18일~19일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 눈앞에 빛나는 태양, 옆에서 함께 가는 친구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리

-에런 더글러스 트림블


어른이 되어갈수록 나에게 어려워지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새 친구를 사귀는 일이다. 어릴 땐 그것만큼 쉬운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조차 사라져 간다. 회사와 집을 오가며 내 인생에만 초집중된 삶 속에는 새 친구가 들어 올 자리 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에 오른 지금 우리의 삶에는 많은 빈틈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틈새로 내가 떠나오지 않았더라면 절대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페리에서 바라본 피낭의 첫 모습>

싱가포르 호스텔에 묵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짐을 풀고 얼마 있지 않아 맞은편 침대에 남자 두 명이 새로 들어왔다. 남편은 그들과 눈이 마주쳤는지 가볍게 인사를 했고 아래층 침대를 사용하게 된 남자와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말레이시아의 피낭이라는 도시에서 친구의 결혼식 참석차 싱가포르에 왔다고 했다. 며칠 뒤 말레이시아에 갈 계획이었던 우리는 어디가 좋은지 물어보았고, 그는 자기가 사는 동네에 온다면 가이드를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으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우리도 자주 하는 말이었다. 한국에 오면 가이드해주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대화가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비행기 가격을 알아보고 굉장히 저렴하니 정말 오고 싶다면 오라고 또 한 번 말을 걸어왔다. 계획에 없던 도시라 우선은 생각을 좀 해봐야 했기에, 가게 되면 연락하겠다고 하고 페이스북으로 친구를 맺어두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친구는 결혼식 참석을 위해 아침 일찍 숙소를 나갔다. 그것이 마지막인 줄 알았던 '우딘'과의 첫 만남이었다.

<세상 착한 남자 우딘과 신이 날대로 난 우리들>

다시 생각해도 어른이 되는 것은 정말이지 지루한 일이다. 친구 사귀는 법도 몽땅 까먹게 만드니 말이다. 우딘이 한 번 더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나는 피낭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냥 잊고 살았을 것이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가 어떤 친구인지도 모른 채로 말이다. 하지만 우린 과감히 계획을 수정했다. 친구 사귀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할 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말라카에서 출발한 버스는 12시간을 달려 피낭에 도착했다. 시간은 밤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우딘이 추천해준 저렴한 숙소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 때문에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카운터에 여권을 내밀며 체크인을 하려 하니, 몇 가지 조회를 해보던 직원이 '네 친구 옆 방으로 배정해줄게'라고 했다. 우딘이 우리 옆방에 묵는다는 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메신저로 물어보니, 도시 구경을 시켜주고 싶은데 본인 집이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라 불편할 것 같아서 예약을 했다고 했다. 뭐지. 이런 세상 친절한 친구를 봤나. 그의 넘치는 친절에 우리는 조금 당황했다.

<튀긴 치킨을 두들겨 팬 뒤 찹찹 썰어 매운 소스&밥과 함께 먹는 나시레막>

짐을 대충 내려놓고,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로컬 음식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마치 로봇처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로컬 중의 로컬, 맛집 중의 맛집으로 데려갔다. 치킨 나시레막 3인분과 과일주스를 시켜 놓고 맛있게 먹으며 피차 어설픈 영어로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떠들썩한 야시장과 노래가 흐르는 밤바다를 구경시켜 주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우딘이 내일 일정을 알려주었다. 본인의 집에 데려가 부모님께 우리를 소개하고, '로띠 차나이roti canai'를 먹으러 갔다가 피낭이 온통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언덕에 데려갈 예정이니 8시까지 나오란다. 뭐지 이런 세상 꼼꼼한 친구를 봤나. 그의 넘치는 계획성에 우리는 조금씩 감동하기 시작했다.

<7남매 자식 농사 성공 신화의 주인공 우딘네 아부지 어무니>

다음 날 아침, 차를 타고 우딘네 마을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는 7남매 중 여섯째로 스물아홉 살의 요리사이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식당을 형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을 하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한 뒤 다음날 장사할 재료들을 사둔 뒤 집에 와 쉬는 것이 일상인 그는 정말이지 바른 사람 같아 보였다. 어찌나 성실히 살았는지, 곧 입주하게 될 자신 명의의 새집도 있었다. 멀리서 집을 구경시켜 주며, 몇 년 동안 형과 함께 계획한 일이고 형도 자신의 옆 옆집을 샀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일하고 있는 식당 옆도 지나갔다. 그의 삶의 일부를 구경하며 도착한 부모님의 집. 처음 가보는 현지인의 집은 아늑하고 따듯했다. 우딘의 부모님은 우리가 도착하는 소리를 들으셨는지, 문 앞까지 나오셔서 환영해 주셨다. 거실에 앉아 이제 막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셨다는 그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보다 영어를 잘하셨다. 되게 용한 영어 교실을 다니시는 듯했다.

아버지는 거실에 걸려있는 커다란 가족사진을 보여주시며 자식들이 각자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셨다.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가득이셨다. 내가 어떻게 7남매를 훌륭히 키워내셨냐고 물으니, 젊은 시절 우체부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으셨다고 했다. 월급이 매우 적어 고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자녀들이 다들 잘 돼서 매우 기쁘다고 하셨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해 오신 우리네 부모님과 다르지 않았다. 진심으로 존경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띵동. 다음 냥이 들어오세요.>

단란한 수다를 마치고, '로띠 차나이roti canai'를 먹으러 이동했다. 카레에 밀가루 빵을 찍어 먹는 음식인데, 남편과 우딘은 두 그릇씩을 먹었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갑자기 지나가던 고양이들이 번호표를 뽑더니 남편 가방 옆에 줄을 섰다. 애절하게 쳐다보던 검은 고양이가 포기하고 돌아서자 얌전히 기다리던 노란 고양이가 똑같은 자리에 똑같이 앉아 우릴 올려다보았다. 검은 놈은 안 주고 노란 놈만 줄 수 없는지라 끝까지 안 줬더니 둘은 영영 가버렸다. 재미있는 놈들이다.

<피낭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언덕>

배를 든든히 채우고 피낭 언덕으로 향했다. 급경사의 초고속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니 발 밑으로 풍경이 가득이다. 눈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카메라는 절대 담을 수 없음에 다시 한번 슬퍼하며, 천천히 피낭을 내려다보았다. 올라오는 레일을 1시간이나 기다렸기 때문에 우딘이 피곤할까 봐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연신 괜찮다며 우리를 걱정했다. 정말 너란 남자. 어디까지 착할 생각인데, 어?

<새로운 튀김의 장이 열리던 날>

언덕을 내려온 뒤 꼭 먹어야 할 것이 있다며 우릴 데려간 곳은 바나나 튀김집. 요리사라 그런지 맛집에 대한 엄격한 기준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굳이 20분을 운전해서 이곳에 온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두 봉지의 따듯한 튀김을 우리에게 안겨주고는,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무슬림인 우딘은 정해진 시간에 집이나 모스크에서 기도를 해야 한다고. 비록 믿는 신은 다르지만 그의 성실함에 부끄러워졌고, 나의 신앙의 위치는 어디인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소금과 식초에 절여진 과일 세트. 유일하게 먹기 힘든 맛이었다.>

오후 4시쯤이 되자, 그는 우리를 시장으로 데려가 이곳 사람들이 먹는 특유의 절인 과일을 사주었다. 뭘 이렇게 자꾸 사주는지 꽁으로 무얼 받는 게 익숙지 못한 사람으로서 참 곤욕스러웠다. 그때마다 우딘은 자신의 기쁨이라며 꼭 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말레이시아 전통의상인 사롱을 하나씩 선물해 주었다. 그에게 받은 모든 것들을 되돌려줄 수 있는 날이 올까. 나중에 반드시 한국에 초대해서 내가 받은 행복의 꼭 두배만큼을 나눠 줄 것이다. 그는 우리 여행의 첫 '친구'이니까.

<왜이렇게 루브루 박물관 뭐 그런거 같은 건데>

우딘 투어의 마지막 장소는 KFC. 점심을 거르고 돌아다닌 탓에 급 패스트푸드가 땡긴다는 그는 우리를 박물관 같은 곳으로 데려갔다. 아니 이게 뭐죠. 이 정도면 KFC 할아버지 생가 느낌인데. 우리는 과하게 화려한 KFC 앞에서 왜 이렇게 지었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우딘의 말에 웃음이 났다. 아쉬운 마지막 식사를 하며 종교, 문화, 정치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덕분에 말레이시아를 더욱 가까이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난 그에게 '넌 왜 이렇게 착한 거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좋은 사람 옆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 모이니까'라고 말했다. 참나, 끝까지 멋있네ㅋ

<숙소 앞, 신나게 웃으며 안녕>

말레이시아를 떠나는 날 아침, 우딘이 사준 사롱을 입는 법을 몰라 대충 걸친 뒤 사진을 찍어 메시지를 보냈다. 고마운데 이거 이렇게 입는 게 맞냐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한참 뒤 그는 '그거 아닌데 하하하'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 친절하게 입는 법을 찍어 보내왔다. 친구 사귀는 법도 까먹어가며 지루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우딘 덕분에 재미있는 어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여러모로 참 고맙고 좋은 친구다. 계획한 모든 곳에 가지 않아도, 계획한 모든 것을 보지 않아도, 이런 친구를 얻는 여행을 하고 돌아간다면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늘 내가 바라던, 바로 그런 사람이 정말로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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