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가

잡다한 상념의 서랍

by 정새롬

어느 날 내가, 서울역사박물관 앞뜰 벤치에 앉아 있을 때였다. 하늘은 맑고 차들은 많고 나는 그냥 작은 사람인 그런 날이었다. 오후 2시 서울 한 구석탱이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때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사뿐하게 내 옆에 앉는 이가 있었다. 회색 양복을 차려입고 주황색 구두를 신었다. 차림이 이상했지만, 왜인지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여기에 앉아 뭘 하시나"


시간을 죽이며 앉아 있는 나에게 그가 질문을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가만히 말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 앉았다네.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많은 힘을 써서 지금 매우 피곤해. 잠시 쉬었다 가는 걸세. 여기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거야."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것 같아 자리를 이동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피해 가면 또 어디를 가겠는가. 그냥 앉아 가끔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세어 볼 심산으로 자리를 지켰다.


"나는 이동할 때 누구보다 빠르게 이동하길 원하지. 빠르게 이동을 할수록 큰 수익이 생기기 때문일세. 아가씨는 어떤 일을 하지? 나처럼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그런 일을 하는가? 그러면 아무래도 뒤처질게 뻔하군. 그렇게 가느다란 팔로 쯧쯧."


그는 검은 가방에서 회색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는다. 입술이 가을 단풍처럼 붉은빛을 띤다. 이마의 땀을 좀 닦더니 수첩을 꺼내 밑줄을 긋는지 글씨를 적는지 한다.


"규칙이 있지. 이동에도 규칙이 있다네. 그날의 목표를 세워 정해진 곳에 누구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이 첫 번째 규칙이라네. 그다음은 그곳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 담지. 아, 바로 이 가방이네. 이 검은 가방에 담아 가지고 가는 거지. 그리고 오후가 되면 공원으로 가서 다른 이들을 만난다네. 사람들은 나와 같은 자가 갈수록 많아져 골치가 아프다고들 하네만, 나는 우리 같이 성실한 이들도 없다고 생각한다네. 우리는 서로를 만나고 정보를 공유하지. 그리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도 만난다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일들을 하는지 지켜보거나 이렇게 대화를 하지. 남는 시간에는 신문을 본다네. 종이 위에는 많은 일들이 얹혀있지. 하지만 눈으로만 먹기에도, 그 글밥들이 너무 지저분하지 않은가. 자네는 어떻게 생각을 하나. 먹을 수 있는 깨끗한 글밥이 담긴 신문지를 본 적이 있는가?"


낙엽을 세며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쓰고 있던 나는 신문지라는 단어에 갑자기 낙엽 세기를 멈췄다. 몇까지 세었는지 까먹었다. 그리고 먹을 수 있는 신문지라니. 친환경 종이에 인쇄하는 신문이 새로 나왔다는 말인가.


"자네는 신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일면에 자주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말일세. 그들도 나처럼 이런 양복을 입고 있지 않은가. 주황색 구두를 좋아할 이는 없겠지만 말일세."


그러면서 그는 짧고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지만 너무 짧고 큰 소리라서 어떤 소리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귀티가 흐르는 검은 양복을 입고, 중후한 고동색 책상을 밀치며 멱살을 잡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양복이 구겨지면 새로 드라이를 맡겨야 할 터인데, 참 알 수 없는 노릇일세.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다르거나,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그냥 웃고 자리를 떠난다네. 그래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지. 그 중후한 고동색 의자가 아무래도 멱살을 잡으라고 시키는 모양인데, 그래서 이참에 내가 아는 의자 만드는 이를 소개하여 줘야겠다는 결심을 했네. 그래서 내 지금 거기에 가는 길일세. 그 둥근 지붕이 있는.... 그.... 아.. 흠. 자네 그 이름을 아는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말일세."


국회의사당을 말하는 것 같다. 거기에 저 주황색 구두를 신고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어찌 되었든 그가 자리를 뜰 수도 있다는 작은 기대를 조용히 내밀어 보지만, 다시금 그의 가을빛 입술이 떨어지며 말이 시작됐다.


"사실 좀 전에 의자를 만드는 이에게 다녀오던 참이네. 그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하더군. 중후한 고동 빛 의자 말고는 양복 입은 자들의 마음을 앉힐 수 있는 게 없다는 게야. 나는 가볍고 따듯한 색을 가진 의자를 만들면 그들의 생각이 변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의자장이는 노란 어린이 벤치에 사포질을 하다 말고는 어려울 거라고 말하더군. 나는 바닥에 깔면 엉덩이도 시리지 않고, 폭신한 박스 재질의 의자를 만들어 보라고 권했지. 299개의 박스 의자를 주문해 넣고는, 한 개는 조금 특별하게 만들라고 말해두었어. 한 개는 반드시 다른 의자들보다는 특별해야 하니까. 그것이 규칙이지."


한 개만 특별해야 한다니. 박스가 특별해 봤자지 하는 생각을 하니, 늘어지게 하품이 나왔다. 손목시계의 긴 바늘은 힘들게 기뚱 기뚱 6을 마중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잠이나 자야지. 그는 가방 아래은 흙 비슷한 것을 털어내며 뭐라고 뭐라고 계속 말을 했다. 슬쩍 일어나 가려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올해가 가면 이 박물관 어딘가에 내가 주문제작해둔 특별한 박스 의자와 한 명의 이야기가 검은 역사로 남을 걸세. 그때 나를 기억해두었다가 자랑해도 좋네. 아가씨라면 내가 허락해주지. 그럼 나도 슬슬 일어나 보아야겠군. 동료들이 이 근방에 왔다고 신호가 오고 있다네. 빠르게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지."


그러면서 그는 또 한 번 아주 짧고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너무 짧고 큰 소리라서 하하하라고 웃었는지, 구구구 라고 웃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주황색 구두를 신고 발소리 하나 없이 종종걸음을 걷다 파란 하늘 위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소리쳤다.


"아가씨, 말을 하게나. 아니면 자네도 고동색 의자 때문에 드라이클리닝을 일주일에 열 번씩이나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말을 하게나."


나는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앉았던 자리엔 의뭉스레 새하얀 새똥이 누워 있었다.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어 졌지만, 그냥 조용히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 말을 하기보다는 그냥 그곳을 지나쳐 돌아갔다. 역사박물관 앞뜰의 누렇게 마른 잔디처럼 그렇게 말라서 돌아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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