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상념의 서랍
길고 긴 여행을 마친 나그네는 작고 희미한 자신의 오두막에 몸을 눕힌다. 딱딱한 나무 침대 위에는 오랜 시간 그 대신 누워있던 먼지만이 그를 감싸 안을 뿐이다. 온기. 사람의 온기를 찾아 여행을 하던 지난 시간들을 고요히 떠올린다. 작은 소녀의 웃음, 향기의 흐름, 진한 비애 섞인 여인의 손. 나그네의 여행은 온통 기억들로 뒤섞여 온기 없는 오두막을 떠다닌다. 기운을 차리면 가장 먼저 정리를 시작하리라. 나그네의 몸이 혼곤한 침묵 속으로 녹아든다.
어둠의 깊이를 잴 수 있을까. 나그네는 생각한다. 잠의 침묵 속에서 삶을 가장한 소란함을 만난다. 꽃이 핀 넓은 들판 위에 손이 하얀 여인이 노래를 부른다. 그 손으로 오라 오라 이야기하며, 가라 가라 이야기한다. 나그네는 알 수 없는 손짓에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걸음을 옮긴다. 사유의 물컹이는 오솔길 위에서 나른한 여인의 손끝을 향해 앞으로 뒤로 나아간다.
노래가 멈추고 여인의 감정 없는 눈동자가 나그네의 발끝을 가리킨다. 맨발을 보여주오. 여행을 끝낸 나그네의 발이 맨몸으로 여인을 대한다. 좀처럼 부끄러움이 없다. 다시 노래가 이어진다. 여인의 노래가 보드라운 깃털이 되어 나그네의 발등을 덮는다.
"여행자 그대의 길 위에 맨몸의 발로 작은 시작을 열어주오. 그대의 길 위에. 그대의 길 위에.... 그대의 길 위에......"
어둠의 깊이를 잴 수 있을까. 다시금 멈춰 선 노래의 자취를 찾아 허우적대며 귀를 내세운다. 찾을 수 없다. 어둠의 깊이를 잴 수 없듯이 여인의 노래도 찾을 수 없다. 나그네는 경련을 일으키며 잠에서 깬다. 삶으로의 회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꿈인가를 오래도록 생각한다. 늦가을의 스산바람이 가득한 오두막이 거짓인지, 아니면 들판 위로 피어오르던 아지랑이가 거짓인지.
의지로 몸을 움직여 유리컵이 놓여 있는 식탁으로 간다. 식탁 역시 뿌연 시간의 흔적들이 먼저 와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시들어버린 꽃과 액자의 부조화가 식탁 앞에 서 있는 그를 더욱 이방인처럼 느끼게 한다. 전날 밤 먹은 사과와 몇 개의 빵조각이 아직도 위 속에 남아, 살아있는 자의 거추장스러운 식감을 일깨워 준다. 사인용 식탁의 의자 하나를 빼어 앉는다. 바닥과 맞물린 채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있었는지 의자는 힘겨운 신음을 한다. 멍하니 멈춰버린 시계를 바라본다. 눈을 깜빡. 한번 더 깜빡. 나그네는 눈꺼풀이 스치는 사이에도 스리슬쩍 세계는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나그네 이야기_정새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