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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코끼리와 함께한 토요일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태국 #치앙마이 #코끼리돌보기

#2017년4월15일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과자를 주면은 코로 먹지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모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이 노래를 부르며 자랐고, 코끼리는 거진 다 아저씨고 과자를 좋아하며 코로 음식을 먹는 약간은 해괴한 동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치앙마이 코끼리 보호소에 다녀와보니 그동안의 오해에 대해 코끼리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코끼리는 과자를 먹지 않는다. 주로 바나나랑 사탕수수 나무 등 과일과 야채를 먹는데, 과자를 주면 먹을 수야 있겠지만 나름 호불호가 분명한 아이들이라 싫어할 것 같다. 그리고 코로 먹는다는 이 부분, 맞는 말이지만 정확히 하자면 코로 집어 입으로 먹는다. 어린 시절의 나는 당연히 코끼리가 청소기처럼 코로 음식물을 빨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전히 다 저 노래 때문이다.

<코끼리 보호소에 도착을 했습니다아>

아침 일찍 픽업 온 차량을 타고 1시간가량을 달려 치앙마이 북부에 위치한 치앙마이 마운틴 생츄어리 chiangmail mountain sanctuary에 도착했다. 이곳은 무분별한 트레킹으로 상처 입은 코끼리들을 돌보는 공간이다. 처음 여행 계획을 세울 때 태국에 가면 꼭 코끼리를 타봐야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코끼리를 타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트레킹 조련사가 뾰족한 갈고리가 달린 막대기로 코끼리를 계속 찔러대며 조종하는데, 고통이 가득한 그 눈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또한 편한 탑승을 위해 코끼리 등에 얹는 의자는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확인시켜 준다. 코끼리 입장에서는 하루 종일 시달리다 일정이 끝나면 짧은 쇠사슬에 묵인채 창살에 갇히는 것이 트레킹인 셈이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 대해 무지했던 나를 반성하고, 어떤 학대도 없이 코끼리와 함께 놀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원래부터 여기 직원인듯 지나치게 잘 어울림>

코끼리와 놀다 보면 옷이 더러워질 수 있으니 보호소에서 준비해준 파랑색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안전교육을 들었다. 코끼리는 기분이 좋을 때 춤을 추는 것처럼 귀와 몸과 꼬리를 흔든다고 했다. 반면 화가 났을 때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상대를 쳐다본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전속력으로 도망가되, 시속 40km로 달리는 코끼리보다 빨라야 살 수 있다고ㅋ. 100m 달리기가 30초도 넘게 걸리는 나는 최대한 코끼리님 신경을 거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니저 마지막으로 코끼리는 시야가 정말 좁아 주변을 살필 수 없으니 엉덩이 쪽에 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말과 엄청난 명언 하나를 남다. 바나나가 있으면 친구, 없으면 남이라고ㅋ

<왼쪽 매니저는 설명 담당, 오른쪽 매니저는 코끼리 대역ㅋ>

테이블 한쪽에 마련된 바나나를 천가방에 가득 담으니 저 멀리서 매니저들과 코끼리들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도 그 묵직한 걸음걸이는 위엄이 넘쳤다. 느리지만 한 걸음이 나의 열 걸음은 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남편은 수줍게 바나나 하나를 건넸고 코끼리는 침인지 콧물인지가 촉촉하게 묻어있는 코로 착 감아서 입안에 쏙 넣었다. 디테일한 움직임으로 바나나를 움켜쥐는 코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번에는 바나나 2개를 한꺼번에 건네면서 코 만지기에 도전했다. 단단하면서도 주름진 표면에 조금 억센 털들이 송송 돋아 있었다. 오 내가 코끼리 코를 만지다니! 왜인지 모르게 출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나나 있어요? 어디? 어디?>

매니저의 말처럼 가방에 담아 온 바나나가 동이 나면 코끼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이런 비즈니스 마인드 같으니라고ㅋ 하긴 하루에 3시간 자고, 나머지 21시간 동안 100kg 이상의 풀과 과일을 먹어야 저 몸매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하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번 더 가방 가득 바나나를 채우고 코끼리에게 다가갔다.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탐색을 한다. 바나나 하나를 건네고 귀를 만져 보았다. 손 끝에 전해진 낯선 촉감은 눈 앞의 거대한 생명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거칠지만 따듯한 살결, 힘 있고 유연한 코 그리고 맑은 눈까지. 동물원이 아닌 자연 속에서 만난 코끼리는 연신 몸과 꼬리와 귀를 좌우로 움직였다. 행복한 것 같았다.

<생수 무한 리필 중. 한잔 더? 콜!>

맛있게 1차 바나나 식사를 마치고 2차로 바나나 나무줄기와 잎사귀들을 나눠 주었다. 단단한 줄기를 코로 우직 부러트려 잘도 먹는다. 그때 매니저들이 코끼리들에게 호스로 물을 뿌려주기 시작했다. 알려준 대로 남편도 물 주기에 도전해 보았는데, 엄청 신기한 광경이었다. 우선 코끼리가 컵처럼 코 끝만 위로 향하게 만들면 거기에 물을 콸콸 부어준다. 본인이 원하는 만큼 받아지면 코를 입속에 쑥 넣어서 물을 쭉 빨아들인다. 내 입장에서만 보면 완전 코가 매울 것 같은데, 코끼리는 그런 건 신경도 안 쓰겠지.

<누가 누굴 산책 시키는거지>

이번에는 가방에 바나나 대신 사탕수수를 가득 담고 코끼리와 산책에 나섰다. 내가 앞장서서 사탕수수를 들고 '이리 와'라는 뜻의 '마'라고 말하면 코끼리가 따라온다. 우리는 같이 터벅터벅 걸으며 바나나 나무들이 있는 들판으로 향했다. 산책은 10분 정도로 짧았지만 오늘의 전체 활동 중 가장 좋았던 것 같다. 강아지 또는 고양이와의 산책은 내가 동물들을 리드는 느낌이라면 코끼리와의 산책은 '동행'의 느낌이 강하다. 어쩌면 코끼리가 날 리드하고 있는 것일지도.

<먹방계의 대왕 샛별>

그렇게 도착한 넓은 바나나 나무 들판. 코끼리는 단단한 나무줄기를 입에 넣기 좋게 부러트렸다. 이렇게 힘이 세니 거대한 사원을 지을 때 코끼리를 데려다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시켰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끼리의 3차 식사를 지켜보는데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루에 100kg 이상 먹는다고 주는 건 아무거나 다 먹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편견. 이 놈들도 편식을 한다. 어떤 코끼리는 부드러운 잎사귀 부분만 먹고 어떤 코끼리는 가리지 않고 엄청난 먹부림을 뽐낸다. 그리고 어떤 코끼리는 바나나만 먹으려고 한다. 나름 자신들만의 식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치 않는 먹이를 주면 일단 받기는 하는데 바로 바닥에 버린다. 호불호가 분명한 너란 코끼리. 매력적이다.

<지금 어디서 주름을 잡냐고오>

남편은 한창 풀을 먹고 있는 코끼리 옆으로 다가가 고전 중의 고전인 '코끼리 코'를 시전 했다. 처음에 자신을 따라 하는 김영철이 싫었다던 김희애처럼 코끼리는 자신을 따라 하는 남편이 싫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눈길 한 번을 안 준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코끼리가 약간 웃음을 참는 것 같은 표정이다. 그래. 나도 웃긴데 넌 오죽하니.

<네네 다음 손님 들어오세요>

세 번째 식사를 마치고 길을 따라 5분간 더 걸어가니 진흙탕이 나왔다. 코끼리들은 자연스레 들어가 온몸에 머드팩을 시작했다. 매니저는 안으로 들어와 같이 마사지를 해주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지저분해 보이는 에 흔쾌히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만 할 수 없지'라는 생각에 제일 먼저 신발을 벗고 진흙탕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코끼리는 얌전히 앉아 있었고 나는 커다란 등에 부드러운 진흙을 발라주었다. 얼굴, 코, 귀까지 꼼꼼하게 머드팩을 발라주면 코끼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러면 진흙탕 밖으로 이끌어 옆에 마련된 커다란 수영장에 데려가 씻어주면 된다.

<신나는 코끼리 목욕&스페셜 쏭크란>

코끼리는 기분이 좋은지 씻어주는 손길들을 가만히 즐겼다. 그래서 나도 최선을 다해 솔로 쓱쓱 문지르며 세신을 해주는데 갑자기 매니저 한 명이 '사와디 삐마이 크랍'을 외치며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아, 오늘이 쏭크란 마지막 날이지. 모두가 잠시 잊고 있던 축제를 떠올린 듯 신나게 물을 끼얹졌다. 코끼리와 함께 쏭크란을 즐기게 될 줄이야. 상상에도 없던 일들이 마구 벌어진 오늘, 무엇이 이보다 더 완벽하고 특별할 수 있을까.

<집에가서 또 먹어야지 룰루랄라>

시원하게 목욕을 마친 코끼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홀딱 젖은 우리도 샤워를 해야 했다. 나누어준 수건과 옷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서자 물이 받아진 커다란 대야와 바디 샴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코끼리처럼 씻으면 된다는 매니저의 말이 이런 것이었구나. 현실을 인지한 뒤 가능한 빠르게 씻고 화장실을 나왔다.


우린 코끼리 보호소 반나절 코스에 1인당 1500밧(약 50,000원)을 냈고 이것은 분명 코끼리를 타는 트레킹보다 비싼 금액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보다 귀하게 여겨져야 할 기본적인 가치들이 절대로 홀대받지 않는 세상이 오려면 나부터라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물질 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미래의 내 아이들에게 조금 더 따듯한 삶의 방식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늘 그렇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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