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태국 #치앙마이 #쏭크란축제
#2017년4월14일
지난 이틀간 제대로 먹은 게 없어 허기짐에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이 상태로는 물 축제를 신나게 즐길 수 없다는 생각에 일단 밥을 먹으러 거리로 나섰다. 당연히 물싸움을 위한 무장도 잊지 않았다. 숙소를 벗어나니 바로 노천 식당이 나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익숙한 볶음밥과 볶음면을 시켰다. 33시간 만에 먹는 제대로 된 밥이었기 때문에 맛을 느낄 사이도 없이 방전된 휴대폰 급속 충전하듯 식사를 했다. 이제 물총을 사서 출동하기만 하면 된다. 거리에는 아침 일찍부터 물총과 바가지를 팔기 위해 많은 장사꾼들이 나와 있었다. 우리도 길 건너 좌판에서 300밧(약 9,900원)을 내고 장비 두 자루를(?) 구입했다.
남편은 '남자는 역시 핑크'라며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물총을 택했다. 써보니까 큰 것보다 정확도도 높고 수압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용량이 적어서 충전을 자주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 1.5리터가 들어가는 나의 큰 물총은 물은 많이 들어가지만 엄청나게 무겁고 팔이 아프다는 단점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좌판 앞에서 출격용 사진을 한 장씩 찍고 아저씨가 담아준 저 녹조라떼 같은 강물이 든 물총을 들고 길을 떠났다. 이곳 치앙마이는 '란나왕조'가 세운 왕국으로, 과거에 만든 성벽과 해자가 여전히 남아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성벽은 동서남북 각 면에 문이 하나씩 나있고, 그 문을 타페 게이트라 부른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바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동쪽 타페 게이트.
게이트로 가는 길, 엄청난 적극성을 가진 아재 한 분이 내 우비 모자를 벗긴 다음 얼음물을 목 뒤에 부어 넣으셨다. 나는 답례로 아재 얼굴에 물 몇 방을 쏴드렸다. 그리고 '사와디 삐마이 크랍'도 잊지 않았다. 사와디 삐마이 크랍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태국말이다. 쏭크란은 이렇게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물을 뿌려도 누구 하나 인상 찌푸리지 않고 오히려 복을 빌어주는 신비의 축제였다.
우리도 사람들이 뿌려준 복에 흠뻑 젖은 채 타페 게이트에 도착했다. 성벽을 통과하자마자 광장에서 프리허그를 하고 계신 할아버지를 만났다. 나는 다가가서 즐거운 마음으로 공짜 포옹을 했다. 이탈리아에서 오셨다는 할아버지는 멋진 수염과 알록달록한 바지를 입고 계셨다.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왜 여기서 프리허그를 하고 계신지 궁금했지만 갑자기 여기저기서 물을 뿌려대는 바람에 묻지도 못하고 할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다. 나도 여행을 하며 한 번쯤은 프리허그에 도전해 봐야지.
광장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성벽 주변으로 펼쳐진 해자에서 물을 길어다가 붓는 것은 기본이고 차가운 얼음물을 준비해 뿌리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도 핫한 축제를 본격적으로 즐겨 보려고 무리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는데, 와 이건 뭐 한 걸음에 물 한 바가지다. 거기다 다들 손목 스냅이 어찌나 좋은지 물이 '촤악'이 아닌 '촤아짝' 소리를 내며 얼굴에 꽂힌다. 그렇게 녹조라떼 열 바가지를 콤보로 맞고 나니 정신이 혼미하여 100미터도 못 가고 다시 무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만 맞을 수 없어 열심히 쏘아 댔더니 물탱크가 텅텅 비고 말았다. '누가 공격이라도 하면 그대로 당하고 말 텐데'하고 조바심이 들었다. 물 충전할 곳을 찾아 두리번 대는데 갑자기 중국 아이가 날 저격하기 시작했다. 방금 충전했는지 엄청나게 센 물줄기로 지치지도 않고 헤드샷을 날렸다. 나도 열심히 반격은 해 보았지만 물총에서는 '푸슈슈 푸슈슈' 바람 빠진 소리만 날 뿐이었다. 서른 하나 평생에 이런 종류의 치욕은 또 처음이었다. 꼬마야, 내가 물만 있었으면 넌 오늘 '물 반 콧물 반'이었을 거야!
즐거운 분을 삭이며 어디 더 재미있는 쏭크란 판이 없나 기웃대던 중, 어떤 호스텔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차량과 오토바이에 맹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호. 더 좋은 건 호스텔에서 끊임없이 물을 공급해준다는 사실! 우리도 이곳이 터를 잡고 놀아보자 하는 마음에 합류를 결심했다. 합류의 대가로 물을 2리터는 뒤집어썼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부어주는 일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트럭 뒤에 탄 사람들을 끝까지 따라가 물을 퍼붓고 또 그들이 뿌린 얼음물에 화들짝 놀라 다 함께 깔깔대며 웃었다. 오늘 이 순간만큼은 국적 나이 성별을 뛰어넘어 모두가 하나였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무한한 자유로움은, 눈부신 햇볕에 반짝이는 물방울들만큼이나 생기가 넘쳤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물탱크 빌 염려 없이 무려 3시간을 쉼 없이 놀다가 배도 고프고 해서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수많은 포장마차들이 공복을 유혹했다. 제일 먼저 선택한 메뉴는 지난번 방비엥에서 실패했던 팬케익. 바나나+누텔라 조합으로 60밧(약 2,000원)을 냈다. 따끈하고 달큰한 냄새를 풍기는 팬케익을 보니 식욕이 돋았다. 소중한 음식이 물 공격에 젖을까 봐 봉지로 꽁꽁 동여 가방에 넣고 다음 음식을 찾아 떠났다.
몇 걸음 더 걷다 보니 맛있을 수밖에 없는 비주얼의 음식이 나타났다. 이름은 모르지만 매콤한 간장 양념에 다진 돼지고기와 야채를 넣고 달달 볶아 흰밥에 얹어주는 덮밥 같은 것이었다. 가격도 50밧(약 1,700원)으로 매우 저렴했다. 이후로도 우리는 소시지 꼬치와 편의점 털기 1회로 음식을 바리바리 쟁인 뒤 숙소로 돌아왔다.
집에 다다르니 해가 서쪽으로 한껏 기울어 하늘에 붉은 기운이 가득했다. 숙소 입구도 그 빛에 물들어 아침과는 또 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우리는 물에 젖은 채 비까지 맞아 온몸이 노곤 노곤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시원한 방에 앉아 사 온 음식들을 먹었다. 음. 역시 악마의 잼 누텔라가 들어간 팬케익은 피곤을 사르르 녹일 정도로 달콤했다. 태국 고추의 매콤함이 더해진 덮밥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뱃속에 몽땅 들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나가다 집어온 10밧(약 330원)짜리 소시지 꼬치는 의외의 가성비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정말이지 태국 음식들은 사랑이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보라색 침대에 누워 이른 잠에 빠졌다. 쏭크란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자면서도 두어 시간은 물총을 쏜 것 같다. 사람 많은 것이 싫어 한강 불꽃 축제도 한 번을 안 갔는데 여행은 참 많은 것을 바꿔 놓는다. 소음과 북적임과 부대낌도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 그렇게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알아도, 무엇을 더 좋아할 수 있는지는 몰랐던 시간들이 하나둘 회복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