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태국 #치앙마이 #호시하나빌리지
#영화<수영장> #2017년4월17일~18일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
-영화 <수영장> 中 쿄코의 대사-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무엇보다 사람과 삶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는 일본의 슬로우 무비들을 사랑하는데, 영화 <수영장>이 꼭 그렇다. 특별한 배경음악이나 촬영 기법 같은 것은 없다. 영화는 시종일관 정지된 듯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 익숙한 삶의 소리들을 들려준다. 수영장 물에 발 담그는 소리, 뜨거운 기름에 바나나 튀기는 소리, 낮과 밤을 움직이는 새들의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쓸어내리는 소리, 자박이는 발자욱 소리, 오래된 나무문이 기지개 켜는 소리. 그 사이로 인물들은 천천히 인생을 곱씹듯 이야기를 전한다.
파란 수영장에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는 이 장면은 내가 영화 속 가장 사랑하는 풍경이다. 여기서 '수영장'은 인물들의 감정을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저마다의 사연이 무겁기도 할 텐데 모두들 자신이 선택한 길을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 영화에 빠져 열 번 정도를 보고 또 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여행길에 오른 지금 문득 영화의 배경이 태국이었다는 점이 떠올랐고 검색을 해보았다. 놀랍게도 저 맑고 파란 수영장은 세트가 아닌 실제로 운영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곳이었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두 밤을 예약했다.
치앙마이 도심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이 게스트하우스의 진짜 이름은 '호시하나 빌리지'이다. 우리말로 호시는 별이고 하나는 꽃을 의미한다. 체크인 시간은 오후 3시였지만, 우리는 조금 서둘러 오전 10시까지 도착을 했다. 고요한 리셉션에는 사람 대신 고양이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비치되어 있는 작은 종을 울리니 직원분이 나오셔서 예약 확인을 도와주셨다. 이곳은 주변에 식당도 편의점도 없기 때문에 식사를 게스트하우스 측에 주문을 하거나 직접 해 먹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벼르던 한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시장에 가기로 했고, 근처 '항동시장'까지는 게스트하우스의 셔틀버스를 이용했다. 셔틀버스는 예약이 있는 날만 운영되며, 오전 11시 45분에 출발해 한 시간 정도 장을 본 뒤 돌아온다.
시장에는 각종 야채부터 시작해서 닭, 오징어, 돼지고기 등의 주재료와 고춧가루, 설탕, 참기름 등의 부재료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출발 전 게스트하우스에서 일본어로 된 시장 지도를 쥐어 주셨는데, 함께 셔틀버스를 타고 온 일본인분들이 영어로 해석을 달아주셔서 손쉽게 다닐 수 있었다. 초스피드로 장보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우리가 묵을 방의 준비가 끝났다고 이른 체크인을 진행 해주셨다. 비가 내려 촉촉이 젖은 풀들 사이로 묵직한 가방을 들쳐 메고 직원분을 따라나섰다. 이곳은 모든 숙소가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방해받지 않도록 지어졌다. 우리 방의 이름은 '수이카 SUIKA'. 영화 속 주인공이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두 개의 독립된 숙소로 이루어져 있는 수이카는 중앙에 위치한 주방 겸 거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창문도 문도 없이 자연의 일부인 듯 존재하는 주방에 서서 점심을 준비했다. 문득 고개를 들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졌고, 다시금 고개를 내리면 단정한 나무 도마가 보였다. 거추장스러울 것 하나 없는 담백함이었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냉면이다. 쟁여둔 인스턴트 냉면을 꺼내 하나는 물냉면으로 만들고, 나머지 하나는 백종원 양념장을 제조해 비빔냉면으로 만들었다. 아삭한 오이와 삶은 계란까지 올리니 그럴싸한 두 그릇의 냉면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정다운 나무 식탁에 마주 앉아 여름날에 어울리는 점심을 먹었다. 도자기 그릇에 나무젓가락이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가 참 좋았다. '맛있다'하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남편의 얼굴이 참 좋았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빈 시간들도 참 좋았다. 그렇게 좋은 것들이 눈 앞에 느리게 느리게 흘러간다는 것이 정말로, 참, 좋았다.
방 전면에는 실외와 온전히 연결될 수 있도록 커다란 접이식 창이 나있다. 낮동안 이곳을 활짝 열어 두면 햇볕과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공간을 더욱 평화롭게 만들어준다. 한낮의 도심에서는 엄청난 더위로 인해 에어컨이 없으면 생활이 안됐지만 이곳의 더위는 조금 달랐다. 사람과 차들과 답답한 아스팔트에서 나오는 열기가 아닌 자연이 만든 순수한 여름은 신기하게도 더위보다 포근함에 가깝다. 여전히 땀은 흐르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달달 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로도 충분히 쾌적하다. 호시하나에 오기 전에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남편이 조용히 낮잠에 빠져든 동안 나는 방 한켠에 놓인 작은 나무 책상에 앉아 글을 썼다. 펄럭이는 무명 커튼과 그 사이로 스미는 뽀얀 햇볕 속에서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정말 큰 호강이다. 좋아하는 영화 속 한 장면에 앉아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니. 감사함과 행복감에 취해 단어 하나하나 정성껏 골라 오래도록 글을 썼다. 스무 살 이후로 '글만 쓰며 살고 싶다'는 꿈을 한숨처럼 내뱉곤 했는데, 어쩌면 그 꿈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달콤함이 느껴졌다. 물론 글을 쓰는 게 쉬운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인생의 한 페이지 정도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었으면 좋겠다.
한낮이 지나가기 전 알록달록 재활용 끈으로 만든 가방에 커다란 타월과 물안경을 넣고 수영장으로 향한다. 햇볕에 알맞게 데워져 온도까지 완벽한 수영장에서 마음껏 다이빙도 하고 수영도 하고 썬베드에 누워 태닝을 즐기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이곳 수영장이 호시하나빌리지 게스트하우스가 생기게 된 이유라는 점이다. 이곳은 원래 에이즈로 부모를 잃었거나, 부모에게 에이즈가 유전된 아이들을 보호하는 재단인 '반 롬 사이'에서 아이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만든 곳이었다. 이후 수영장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던 중 게스트하우스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지금의 호시하나 빌리지가 세워지게 된 것이라고. 사실 재단은 후원금에 의지 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 게스트하우스가 그 활동의 일환인 셈이다.
재단의 비밀(?)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찾아보니 설립자가 무려 '조르지오 아르마니'였다. 그는 태국에 왔다가 에이즈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고, 일본인 디자이너 '나토리 미와'와 상의 끝에 이 재단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재단 설립 초창기에는 여러 열악한 상황들 때문에 아이들이 많이 죽었지만, 신약이 개발되고 여러 환경을 정비한 이후로는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니 참 다행이다. 현재 '반 롬 사이'에서는 3세부터 18세까지의 아이들이 보호받고 있으며 세 가지 방법으로 후원이 가능하다. 직접 후원과 '반 롬 사이'에서 제작한 옷이나 지갑 등의 물건들을 구매하는 것, 그리고 이곳 호시하나빌리지에 투숙하는 것이다. 사실 숙박비가 이곳 물가에 비해 굉장히 비싼 편이지만 후원도 하고 멋진 수영장에서 수영도 할 수 있으니 1석 2조! 그래서 우리는 이 멋진 휴가를 하루 더 연장하기로 했다.
이곳 호시하나 빌리지의 모든 건물들은 후원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각 코타지에는 후원자의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그중 '클레이'라는 방은 한 남성이 1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직접 지어 올린 것이라 더 의미가 큰 공간이라고. 이렇게 따듯한 사람들이 한땀한땀 지어낸 곳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하나같이 따듯하다. 나무로 엮어낸 지붕부터 수영장 옆 낡은 벤치까지 모두. 다만 밤이 되면 불빛을 찾아 어슬렁대는 날벌레들이 방안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경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래도 난 이곳이 지나치게 좋다. 이곳의 존재 이유부터 그 이유를 위해 행하는 부수적인 활동들까지 모두 다 말이다. 작지만 그들의 일에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도 나에겐 큰 감동이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묵묵히 가는 멋진 사람들. 그들을 통해 오늘도 더 나은 삶에 대해 배운다.
만나게 되어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