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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시하나 빌리지2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태국 #치앙마이 #호시하나빌리지

#2017년4월19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썬베드에 누워 책을 보다 파란 수영장에 첨벙 뛰어드는 일상. 이 평화로움에 반해 우리는 결국 이곳에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단 하루지만 여기서의 24시간은 마치 48시간과도 같다. 시간이 정말 느리게 느리게 흐른다. 6시에 눈이 떠지니 마음껏 여유를 즐겨도 여전히 오전이다. 시장에서 사 온 재료로 입맛에 맞는 식사도 만들어 먹는다. 쓸데없는 농담도 하고 앞으로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가게 될지에 대한 진지한 대화도 나눈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이 지나가는 하루를 천천히 세어볼 수 있는 지금이 참 좋다.

<정원 곳곳 이름모를 꽃들이 가득인 호시하나빌리지>

한낮의 햇볕이 내려앉은 정원은 가만히 걷기만 해도 설렌다. 이름은 모르지만 제각기 멋진 옷을 입고 만개한 꽃들이 여름에 향기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바람에 스치는 풀들의 소리를 들으며 덜 마른 빨래들을 대나무 빨랫대에 나란히 걸어두고 수영장으로 향한다. 먼저 온 남편은 썬베드에 누워 몸을 태우다 잠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물에 들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자유형을 해본다. 어떨 때는 잘 되는데 어떨 때는 숨이 모자라 꼭 중간에 멈추고 만다. 물소리에 잠이 깬 남편은 팔과 고개를 어떻게 해보라며 조언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육신은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냥 창고에 구비되어 있는 튜브 하나를 꺼내와 그 위에 걸터앉아 유유자적 물 위를 떠다녔다.

<쨍한 햇볕에 빨래 널기는 기분 좋은 노동>

한 2시간 수영을 하고 나면 낮이어도 약간의 추위가 느껴진다. 그럴 때는 방안에 갖추어진 일본식 작은 타일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아 폭하고 몸을 담근다. 은은한 주황색 불빛 아래에서 즐기는 짧은 목욕은 여행의 피곤을 녹여주기 충분하다. 물기를 닦고 기분 좋은 햇볕 냄새가 배인 바삭하게 마른 옷을 걸쳐 입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돌돌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에 머리를 말린다. 선풍기에 머리를 대고 아아아아 소리를 내며 장난도 치다가 과자를 우적우적 먹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져 든다. 이렇게 충실하게 게을러 보는 것도 여행이 주는 선물인 것 같다.

<욕실이 탐나고 난리>

이곳은 밤이 되면 생전 처음 보는 벌레들이 불빛으로 마구 달려든다. 그렇기 때문에 불이 없어도 요리를 할 수 있는 오후 4시쯤 저녁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남편과 나는 열린 주방에 서서 목살 파티를 준비했다. 야채들을 썰어 곁들여 먹을 샐러드를 만들고, 배추쌈도 씻었다. 전날 태국 고추를 너무 많이 넣어 지나치게 매웠던 핵 불닭 볶음탕도 맛을 재정비했다. 잘 구워진 목살에 도착한 날 만든 겉절이와 찹쌀밥을 곁들인 저녁식사가 완성되었다. 삐그덕 소리가 나는 나무 테이블에 매트를 깔고 음식을 올렸다. 태국 치앙마이 시골에서 조금씩 내려앉는 저녁의 기운을 즐기며 먹는 목살은 그 어떤 때보다 특별한 맛과 기억을 남겨 주었다.

<역시 고기는 목살이지>

이른 저녁을 마치고 우리는 자전거를 빌려 근처 슈퍼마켓 탐험에 나섰다. 좌우로 펼쳐진 풍경은 어릴 적 시골에 살았던 추억을 되살려주었다. 나는 일곱 살부터 3년 동안 조그만 분교가 있는 마을에 살았다. 한 학년에 한 반뿐이어서 1학년 때 만난 친구들이 졸업할 때까지 늘 같은 반인 그런 학교 말이다. 지각이 임박했던 날 무서운 개가 지키고 있는 학교 뒤 넓은 밭을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뛰어갔던 일들이나, 슈퍼와 문구점을 겸하던 작은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들고 신나게 집에 오던 어릴 적 일들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그때가 그리워진다. 우리는 오랜만에 아련해진 마음으로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작은 동네 가게에 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먹었다. 그리고 노을이 붉게 내려앉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자전거 타고 시골길 나들이>

호시하나 빌리지를 떠나는 날 아침은 여느 때보다 더 차분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자유롭게 풀어헤쳐 둔 짐을 차근히 정리했다. 그리고 지난 3일간 사랑했던 공간들에서 한 장 한 장 정성 들여 사진을 찍었다. 세상 모든 근심 떨쳐 버릴 수 있을 만큼 맑고 시원한 수영장, 맛있는 저녁과 여유로운 오후를 보낼 수 있게 해주었던 주방 겸 거실, 인터넷이 빵빵 터져서 원하는 영화를 15분이면 다운로드할 수 있었던 공동 다이닝룸,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지만 예쁜 와인잔들이 놓여있던 오픈 바까지. 존재 이유까지 완벽한 이곳에서의 마지막이 한없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곳에 머물렀음에 감사한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경험하고 있다. 답정너였던 인생에서 벗어나 어떤 것도 가능한 서술형 인생으로 접어든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저렇게 살아보는 지금이 내 인생의 정답이 되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나 저렇게 중에서 어떻게 살면 좋을지 골라 볼 여지는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충실히 게으를 수 있는 권리와 나눔의 삶에 대해 알려준 호시하나빌리지. 훗날 나의 삶에 여유가 필요할 때, 이 곳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당당하게 게으를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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