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태국 #수코타이 #역사공원
#2017년4월20일~21일
평화롭던 치앙마이의 생활을 접고 우리는 다시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태국의 작은 도시 '수코타이'로 향했다. 13세기 후반 태국 최초의 통일 국가로 세워진 수코타이는 제 3대 람캄행 대왕 시절에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몇몇 남아 있는 건물들로 화려했던 시절들을 떠올려 볼 수밖에 없는 작은 시골마을이 되었다.
넓디넓은 부지 곳곳에 떨어져 있는 유적들은 '역사 공원'으로 묶어 보호하고 있었다. 우리는 원활한 관람을 위해 숙소에서 오토바이를 빌렸다. 동남아에서는 오토바이를 빌려 탈 일이 종종 있는데 처음 인수 당시 구석구석을 동영상으로 꼼꼼하게 촬영해 두는 것이 좋다. 아무런 대비 없이 덜컥 빌렸다가 양심 없는 일부 업자들이 스크레치나 작은 고장을 빌미로 거금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으니 말이다. 안전하게 헬멧을 착용하고 알록달록 색칠된 숙소 벽을 지나 한적한 도로로 나섰다. 지난번 라오스 방비엥에서의 라이딩으로 한껏 자신감을 얻은 남편은 도로에 나서자마자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생김새도 점점 현지인 같아져 가는데 오토바이까지 잘 타면 정말 의심의 여지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뜨거우면서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메인 역사공원에서 조금 더 떨어진 '왓 시 춤 wat si chum'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더위가 기승이어서인지 유적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인기척이 없는 700년 전 유적 사이를 걷고 있자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돌기둥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불상은 알 수 없는 묵직한 압박을 주었다. 높이 15m의 거대한 이 좌상은 '프라 아차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은 '두려움이 없는 자'이다. 그 옛날 버마 군사들도 이 불상을 보고 도망을 갔다던데,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검고 커다란 눈동자와 길고 아름다운 손은 한순간 스르륵 하고 움직여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나를 폭삭 눌러 버릴 것만 같았다. 신기함과 낯섦과 두려움의 감정이 작은 소름이 되어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압도적인 감동이었다.
한적한 '왓 시 춤'을 뒤로하고 왕궁이 있는 메인 역사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정말 너무너무 넓어서 이 더위에, 그것도 정오에 모든 것을 둘러보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단호하게 수코타이 왕조의 왕실 사원으로 쓰인 '왓 마하탓'과 연못에 둘러 쌓여 있는 '왓 사시'만 둘러보기로 했다. '왓 마하탓'에는 왕과 부처의 사리들을 보관하는 쩨디들이 가득한데, 개화 직전의 연꽃을 형상화하여 매우 아름답다.
'왓 사시'는 주변 연못의 풍경뿐 아니라 곳곳에 잘 정리된 꽃과 어우러져 다른 유적보다 쓸쓸함이 덜해 보였다. 주말에는 야간까지 개장을 하기 때문에, 해 질 녘이면 삼삼오오 돗자리를 들고 이곳에 와 일몰을 보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현지인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평일 낮 가장 더운 시간에 구경을 했기 때문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도 없는 공원을 걸을 수 있었다.
사람이 없다 보니, 자연에 더 눈이 가고 그러다 보니 평소에 볼 수 없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오늘의 뜻밖의 손님은 카멜레온. 몸의 반쪽은 내가 좋아하는 청록색이고, 몸의 반쪽은 나무 색이었다. 어찌나 색을 잘 바꿨는지, 가만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동물원이 아닌 곳에서 야생으로 카멜레온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나름 큰 수확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해가 지는 도로를 달려 저녁을 먹으러 읍내로 향했다. 우선 태국에서 제일 유명한 것 같은 피자 체인점 '피자 컴퍼니'에서 작은 콤비네이션 피자를 시켜 배고픔을 잠재우고, 시장 주전부리 섭렵에 나섰다. 하나에 5밧(약 170원)짜리 초밥들은 10개를 사면 1개가 덤. 룰루랄라 한 팩을 완성시키고, 맛있는 구운 소시지도 샀다.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먹거리 봉지들을 손목에 주렁주렁 매단 채 남편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올라 타 숙소로 돌아왔다. 오토바이를 반납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아침부터 어슬렁 대던 주인집 고양이가 우리 방 문 앞에 턱 하니 누워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집사로 간택된 것인가. 저리 가라고 몸을 떠밀어도 요지부동. 자릿세라도 내라는 듯 당당한 태도에 굉장히 당황했지만, 몇 번 더 눈치를 주니 귀찮다는 듯 리셉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잘 가렴.
깐깐한 고양이 문지기를 통과하여 방에 들어온 우리는 방금 피자 먹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주전부리들을 폭풍 흡입했다. 동남아에서 이렇게 저렴하고 고퀄리티의 음식들을 먹다가 유럽에 가면 비싸서 어떻게 하나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그 걱정의 답은 답정너처럼 딱 하나다. 싸게 먹을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자. 동남아에서는 아껴봤자 천 원 이천 원이기 때문에 전체 예산에 그리 큰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단위가 커지는 나라들에 가서 팍팍 궁상떨 것을 감안하여 지금은 600원짜리 망고도 막 사 먹어주고, 170원짜리 초밥도 막 사 먹어주면 되는 것이다. 뱃골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미리 사둔 방콕행 버스표를 챙겨 다시 길 위로 나섰다. 이번에는 방콕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여유롭게 태국의 수도를 즐겨 볼 생각이다. 물론 방콕 대사관에 미리 신청해 둔 대통령 선거도 가장 기대되는 일 중 하나. 여느 때처럼 8시간이 넘는 버스 이동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일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이 마냥 좋다. 늘 새로운 일들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처럼, 매일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사건들이 가득한 요즘. 성장판은 닫힌 지 오래지만 나의 인생은 다시 한번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이 여행이 앞으로 어떤 성장통을 가져올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충분히 견뎌낼 자신이 있다. 모든 선택의 가장 좋은 결말은 후회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어떤 상황에도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