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태국 #방콕 #국외부재자선거
#영화 #2017년4월26일
2016년 겨울. 많은 국민들이 광장으로 향했다. 나도 남편과 동생과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날은 추웠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뜨거웠다. 시간이 흘러 그렇게 2017년이 왔고 3월 10일 대통령이 탄핵되었으며 거짓말처럼 1,073일 만에 세월호가 올라왔다. 그리고 간절했던 19대 조기 대선의 막이 열렸다. 말레이시아 체류 당시 기다리고 기다리던 국외부재자 등록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일정을 계산하여 주태국 대사관으로 투표자 신청을 넣었다.
국외부재자 및 재외국민 투표는 본래 선거일보다 보름 정도 앞선 4월 25일 시작되었다. 35도가 넘어서는 더위에 에어컨도 창문도 없는 버스를 타고 2시간을 달린 뒤 다시 20분을 걸어 주태국 대사관에 도착했다. 여권으로 신분을 확인하고 줄줄이 긴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소 안으로 들어가 평소 점찍어둔 후보에게 도장을 찍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 땀이 줄줄 흘렀지만 기분만큼은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우리는 민주 시민의 의무를 다하고 투표소 밖에 준비된 다과 테이블에서 카스타드 2개를 집어 들었다. 아침을 안 먹고 와서인지 기분이 너무 좋아서인지 나도 모르게 빵 하나를 한입에 넣고 꿀꺽 먹어버렸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엉망진창 헬조선이 상식이 통하는 헤븐조선이 될 수 있길.
투표하러 가면서 땀을 많이 흘렸더니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었다. 그래서 택시를 잡아 타고 근처 큰 쇼핑몰로 향했다. 태국은 정말 쇼핑몰이 많다. 그리고 시설도 어마 무시하게 좋다. 빵빵한 에어컨은 기본이고 어떤 곳은 무료 와이파이가 되기도 하며 구석구석 앉아 쉴 수 있는 소파도 있다. 배가 고팠던 우리는 푸드코트로 직행하여 만원을 내고 돈부리와 해물볶음 그리고 스프링롤을 사 먹었다. 사실 이런저런 유적이나 관광지도 좋은 볼거리이지만 더위가 기승인 날은 시원한 쇼핑몰 투어가 제격이다. 아이쇼핑도 하고 저렴하고 퀄리티 좋은 밥도 먹고 말이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천천히 꼭대기층까지 올라가니 극장이 나타났다. 갑자기 여기 사람들은 얼마를 내고 영화를 보는지 궁금해져 안내판 앞으로 다가갔다. 살펴보니 요일별로 요금이 다른데, 수요일은 무비데이로 단돈 100밧(3,300원)이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가만있어보자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읭? 수요일이잖아ㅋㅋ 남편과 나는 망설임 없이 매표소로 다가가 대사보다 액션신이 많은 분노의 질주를 예매했다.
시설은 우리나라 영화관과 비슷 하지만 좌석은 훨씬 넓고 등받이도 뒤로 젖혀져 자칫 잠들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안내 문구와 함께 국왕의 사진이 대형 스크린에 나타났다. 그리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모두가 일어나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지난번 치앙마이에서 나이트마켓 구경을 갔을 때도 저녁 6시가 되니 노래가 흘러나오고 모두가 멈춰 서서 서거한 국왕을 추모했다. 혼잡스러운 시장통이 단번에 조용해지는 그 광경을 마주했을 때의 놀라움이란. 태국 국민들의 특별한 왕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영화는 다른 분노의 질주 시리즈들과 마찬가지로, 적은 대사와 화려한 경주 장면 그리고 폭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덕에 적당히만 알아들으면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시원한 곳에서 평일 낮 베짱이처럼 영화 관람을 즐기고 나오니 어느덧 뉘엿뉘엿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집 근처에 내려 먹거리가 즐비한 시장 골목을 따라 걸었다. 가다 보니 아주머니 한 분이 얇고 동그란 반죽에 생크림과 노란 지단을 얹은 간식을 팔고 계셨다. 일단 냄새가 좋았고, 모양이 예뻐서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가격은 20개 남짓에 20밧(약 600원) 정도이고 맛은 6000원에 팔아도 사 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얇은 반죽을 익혀 생크림을 넣고 반으로 접어 꺼내 놓으면 접힌 상태로 순식간에 굳게 되는데 달콤하면서도 바삭한 그 맛이 가히 예술이다. 태국에서 먹었던 음식들은 대부분 맛있었는데, 디저트류에서는 이게 아마 최고일듯하다. 이름이라도 물어 둘걸 후회가 밀려온다.
저녁거리로 치킨과 쏨땀을 사가지고 집에 가는데 태국의 E마트인 '빅씨 마트'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구경차 잠깐 들러 이것저것 가격을 따져보고 생강차와 커피 하나씩을 샀다. 제빵 코너에는 맛은 없어 보였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조각 케이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귀여워서 하나 사보고 싶었지만 안 먹을 것 같아 사진으로만 남겨 두었다.
여행이 길어지면 일상과 관광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나는 그것이 참 반갑다. 무엇을 보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쫓겨 다니기만 한다면 한국을 떠나 먼 이국땅까지 온 보람이 없지 않은가. 꼭 봐야 할 것은 없되 보고 싶은 것은 볼 수 있는 여유 신공. 아직 우리도 한국형 성과주의 여행을 완전히 탈피하진 못했지만 떠돌이 3개월 차가 되어가는 지금, 많은 것이 변화되고 있음을 느낀다. 더욱더 모호해지고 지나치게 평범해져도 좋다. 그런 게 우리가 하고 싶은 '여행'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