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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달팽이 라이프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브런치X볼드저널 #달팽이

#집 #여행 #세계여행준비


2015년 1월 스물아홉 살의 나는 서른두 살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 우리는 부모님의 도움과 대출을 반반 섞어 서울에 11평짜리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전세로 말이다. 베란다가 없어 빨래를 널면 코딱지만 한 거실 겸 주방이 꽉 차는 집이었지만 둘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신혼집 집들이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가보니 그 집에는 진짜 '거실'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물론 빨래는 넓게 빠진 베란다에 널 수 있고 말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거실이 있는 넓은 집을 사고 싶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1평 집의 거실이란 상상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낸다>

대한민국에서 30년가량을 살아온 내 머릿속의 '살고 싶은 집'은 그저 18평 24평 36평의 숫자로 점철된 ‘지금보다 넓은 집’에 불과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또 그렇게 살기를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 이후 삶의 목표가 내 집 장만으로 귀결되는 이 심각하게 심심한 사회는 집을 주거의 공간이 아닌 소유 그 자체의 욕망으로 바꾼 지 오래이다. 하지만 그것을 바로잡기에 우리는 너무나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바로 그 '집'을 갖기 위해서 말이다.

<초미니멀 달팽이 라이프의 시작>

그래서 2016년 1월 결혼 1주년이 다가오던 어느 날,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넓은 집으로의 이사를 결정했다. 이삿날은 1년 뒤인 2017년 2월로 계획하고, 야무지게 배낭 두 개를 샀다. 이번 이사의 핵심은 바로 이 두 개의 배낭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사할 작지만 넓은 집이 바로 이 '배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꼭 필요한 것들로만 배낭을 채워 1년간 지구를 여행하는 초미니멀 라이프에 뛰어든 것이다.

<알차게 채워진 남편의 65리터 집>

은행에서 대출을 왕창 받아 집을 사거나 다른 전셋집으로 이사를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딜 집으로 삼든 주 5일은 잠만 자는 공간일 테고, 주 2일은 각종 경조사로 비우는 일이 잦은 곳일 것이다. 그리고 최소 30년 동안은 은행과의 상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딱 1년 간만 이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사람들로 살고 싶은지, 그리고 앞으로 대략 50년의 시간 동안 서로에게 어떤 동반자가 되어 줄 수 있는지를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이가 없는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기도 하니 말이다.

<작지만 묵직한 나의 45리터 집>

그렇게 대한민국을 떠나온 지 70일이 지났다. 우리는 달팽이처럼 '집'을 등에 짊어지고 호주에서 인도네시아를 거쳐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까지 총 8개국째를 여행 중이다. 무겁고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든 집을 내려놓으면 '오늘부터 우리 1일이다'를 시전 할 수 있다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의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넓은 '달팽이 집'을 소개해 볼까 한다.

<최대한 간단하게 꾸린 옷장.>

따라라라라 따라라라라♪(러브하우스.ver)


핑크&그레이 컬러 파우치에 정리된 모던한 옷장 되시겠다. 집을 어떻게 꾸밀까 고민하는 사람 못지않게 우리도 배낭을 쌀 때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소유한 것의 무게를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옷을 선택할 때는 무려 다섯 번의 토너먼트를 거쳐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 속옷 포함 각자 3개의 파우치로 한정했다. 선정 기준은 실용성과 단정함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거지꼴'보다는 '꽃거지꼴'이 낫다는 남편의 의견에 따라 최대한 편하면서도 단정한 옷들로 골라 넣었다.

<별것 없지만 나름 신경 쓴 화장대.>

다음은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피부를 가꿔주는 나의 화장대. 자수가 들어간 두 개의 파우치는 손재주 좋은 친구가 직접 만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애증의 렌즈. 소프트렌즈 착용 11주년을 맞이하여 라식을 하려 했지만 타이밍을 놓쳐 그냥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리뉴액 조달이 걱정이었는데 어딜 가나 편의점이 아주아주 잘 되어 있어서 걱정할 필요가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회사 과장님이 사주신 귀요미 우비는 얼마 전 참여한 태국 쏭크란 물축제 때 요긴하게 사용했다.

<건강이 있어야 돈도 있다..라는 의미의 공간?>

이곳은 건강과 재정을 지켜줄 달팽이집의 구급상자와 금고이다. 구급상자에는 기본적으로 진통제, 해열제, 소화제, 지사제, 종합감기약, 연고, 밴드 등과 모기 기피제가 들어있다. 함께 일하던 협력 회사 팀장님께서 세심하게 선물해주신 약 세트에 조금 더해 준비한 것이다. 그리고 두 개의 미니 가방과 곰돌이가 그려진 손지갑은 우리의 금고 역할을 해준다.

<없으면 안될 필수 소품들만 모은 다용도실!>

화장실과 다용도실에는 작지만 알찬 물건들이 담겨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화장실에 칫솔을 꽂는 행위가 왠지 모르게 영역 표시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여긴 우리가 밥 먹고 이 닦고 살아가는 곳이다'라고 선포하듯 말이다. 다용도실에는 빨랫줄과 숟가락&포크, 랜턴, 손저울, 침낭, 텀블러 등 여행에 필요한 잡다한 용품들이 정리되어 있다. 이 중 빨랫줄은 정말 실용의 끝판왕이다. 더운 나라들을 다니다 보면 매일 빨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방 안에는 마땅히 널 곳이 별로 없다. 이때 적당한 곳에 매단 빨랫줄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문명은 매우 편리하지만 매우 무겁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예산을 들인 PC방이다. 달팽이 집 PC방에는 결혼하며 구입했던 에이서 노트북 하나와 삼촌이 사주신 아수스 노트북 하나가 있다. 그리고 동영상 촬영을 위한 소니 핸디캠과 고프로 액션캠이 있고 카메라는 없다. 모든 사진은 갤럭시 S7으로 찍는다. 보조배터리와 멀티 코드 그리고 여러 보조기기들을 정리할 수 있는 디지털 파우치는 회사 같은 팀 분들이 선물해 주셨다. 이렇게 달팽이 집은 많은 지인들의 선물로 꾸려졌다. 집도 공개 안 했는데 집들이 선물만 잔뜩 받은 듯한 민망함이 없지 않아 있지만 물건을 볼 때마다 그것을 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이 참 좋다.

<아재의 시크하면서도 클래식한 아이템들.>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남편의 그루밍 공간이다. 깔끔 유지를 위한 셀프 이발기와 뭇남성들의 사랑을 받는 개츠비 왁스, 그리고 아재템인 똥파리 선글라스가 구비되어 있다. 이곳은 겉모습만 꾸미는 그런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오뚜기 대용량 라면스프로 속까지 핫하게 꾸며주면 스타일리시한 여행자 포스가 폴폴 풍겨나게 되는 것이다. 땀이 비 오듯 흐를 때 마라톤에서 받은 머리띠 하나 질끈 매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포인트!

<달팽이는 오늘도 느릿느릿 살아갑니다>

많은 것을 이고 지고 살아가던 삶에서 달랑 등짐 하나 남은 삶으로의 변화는 어찌 보면 무모할 정도로 드라마틱한 면이 있다. 그리고 가끔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그래서 누구보다 앞에 또는 뒤에 있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 되었고, 온 세상이 집이 된 지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매일이 설렐 뿐이다.

<집을 내려 놓는 그곳에서 삶이 시작된다>

달팽이는 처음부터 집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작은 집이 달팽이에게는 최고의 요새이자 온실이자 삶인 것이다. 작든 크든 누구에게나 '집'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집 안'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야만 한다. 주객이 전도되어버린 이 시대는 생활을 담보로 참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달팽이처럼 살기로 했다. 느리지만 충실히 해야 할 것들을 하며 나아가는 삶, 그리고 그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 이 공간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가족과 더 많이 함께할 시간, 타인과의 비교에서 벗어난 절대적 행복,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 같은 것이 담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배낭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담에 충분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도 여느 부부들처럼 더 넓은 집을 향한 레이스에 다시금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초속 0.24cm로 달리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갈 생각이다. 천천히 주변과 서로를 돌아보며, 내 삶의 이유를 소중하게 짊어 진채로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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