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태국 #방콕 #요리교실
#2017년4월28일
태국에는 참 맛있는 것이 많다. 그중 최고는 단연 아삭한 숙주나물과 새우를 넣고 볶은 팟타이! 거기다 알싸하게 매콤하면서도 새콤한 파파야 샐러드 쏨땀을 곁들여 먹으면 더할 나위 없는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 반면 똠양꿍은 몇 번을 먹어도 적응되지 않는 특유의 향에 늘 실패하고 마는 메뉴 중 하나이다. 그래도 우리는 새로운 음식을 만나면 열심히 맛보려 노력한다. 내 앞에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한 그릇에는 언제나 맛과 향과 누군가의 삶이 함께 담겨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맛있는 방법. '잘 먹겠습니다' 한 마디와 도전 정신 가득한 젓가락질이면 충분하다.
방콕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는 그동안 맛있게 먹었던 태국 요리들을 직접 만들어 보는 특별한 체험을 해보기로 했다. 여행사를 통해 1인당 900밧(약 3만 원)을 내고 '씰롬 타이 쿠킹스쿨'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미리 예약하고, 당일 늦지 않게 약속 장소로 나갔다. 도착하니 인기 있는 프로그램답게 생각보다 많은 여행객들이 모여있었다. 우리는 싱가포르, 미국, 독일 사람들과 한 반이 되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요리 선생님이 즉석 자기소개를 하신 뒤, 생수가 들어있는 바구니 하나씩을 나누어 주셨다. 바구니를 들고 쫄래쫄래 따라간 곳은 현지 시장. 선생님은 시장에서 식재료 고르는 팁들을 설명하셨다. 태국에서 많이 먹는 세 가지 커리 양념도 맛보고 싱싱한 새우 고르는 방법도 배웠다. 하지만 나는 설명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장의 재미난 구경거리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펄떡이는 새우 사이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강아지, 가지런히 진열된 알록달록 과일과 야채들, 깎아 달라는 듯 상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아주머니. 생기가 넘치는 아침 시장에서 왠지 모르게 오늘 하루가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에서 산 싱싱한 재료들을 각자의 바구니에 나누어 담고 다 같이 요리 교실로 이동했다. 요리 교실은 깨끗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무엇보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있어 굉장히 쾌적했다. 길쭉한 나무 테이블에는 동그란 나무 도마와 큼직한 요리사용 칼 그리고 각종 요리 재료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오늘 만들 음식은 총 네 가지인데, 그중 첫 번째가 바로 애증의 똠양꿍. 늘 실패를 안겨준 음식이라 조금 두려웠지만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야채들을 다듬었다.
잘 다듬은 야채들은 나무 쟁반에 담아 2층으로 가지고 올라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냄비와 불을 사용하여 조리가 진행된다. 본격적인 과정에 앞서 코코넛 밀크 만들기를 배웠다. 미리 갈아둔 코코넛에 물을 부어 손으로 꼭꼭 짜면 신기하게도 우유 같은 하얀 물이 나온다. 그렇게 만들어진 코코넛 밀크는 똠양꿍에도 들어가고 나중에 만들 망고 밥 지을 때도 사용된다고 한다. 워밍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똠양꿍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가스불을 강으로 올려 주고, 깊이가 있는 팬에 코코넛 밀크를 부어 살짝 끓이다가 양념, 물, 새우, 야채를 넣어 볶아 주면 끝. 우리는 꼼수를 써서 선생님 몰래 향이 강한 야채들은 빼고 신맛이 나는 깔라만시 소스도 3분의 1만 넣었다. 똠양꿍과의 화해를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그릇에 예쁘게 옮겨 담아 다시 1층으로 가지고 내려와 곧바로 시식에 들어갔다. 배가 고팠던 탔도 있겠지만, 향을 조절하니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똠양꿍에게 느꼈더 애증이 애정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통통하고 신선한 새우 살을 씹으며 같은 테이블에 앉은 싱가포르 친구들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여자 넷이 함께 왔는데 모두 같은 회사를 다니는 동료라고 했다. 넷이 다 같이 휴가를 내다니. 대단하다. 20대 중반의 싱그러운 친구들은 스포츠 관련 방송국에서 PD로 일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유독 한국 문화와 드라마에 관심이 많아서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이전에 영어를 못하는 한국 사람을 만나 케이팝과 드라마 이야기로만 2시간 수다를 떤 적이 있었다며, 문화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노노. 네가 더 대단하다 친구야. 어떻게 드라마 '도깨비' 스페셜 편에서 김비서가 TT 안무 선보인 것을 알고 있는 거니. K덕 인정이다 얘.
똠양꿍을 해치우자마자 선생님은 다음 재료를 다듬어야 하니 손을 씻고 도마 앞으로 오라고 했다. 두 번째 메뉴는 내가 사랑하는 팟타이! 똠양꿍 때와 마찬가지로 다듬은 야채와 양념들을 가지고 2층으로 올라가 선생님의 구령에 맞추어 하나 둘 투하한 뒤 볶아주었다. 익숙한 맛있는 냄새에 입에 침이 고였다. 적당히 볶아진 면과 야채를 그릇에 담아 땅콩을 솔솔 뿌린 뒤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시원한 1층으로 내려왔다. 직접 만들어서 더 맛있는 팟타이로 두 번째 식사를 마치자 슬슬 배가 불러왔다. 하지만 아직 2개의 메뉴가 더 남아있다. 우리는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 통에 넣고 손을 닦은 뒤 다시 야채 다듬는 도마 앞에 섰다.
세 번째 메뉴인 그린 커리는 다양한 향이 나는 채소들을 향신료와 물과 함께 절구에 빻아서 기본 양념장을 만든다. 선생님은 한 명씩 나와서 양념 빻는 것을 해보라며 자리를 내주셨다. 돌아가며 절구질을 하는데 남편 차례가 왔다. 처음에는 절구를 잡고 그냥 빻는 듯하다가 갑자기 댄스를 가미ㅋ 대한민국 아재의 흥이 무엇인지 살짝 맛보기로 보여주었다.
그린 커리는 향이 강해서인지 내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남편도 그다지 맛있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가 불러가는 시점이라 다들 조금씩 남긴 상태에서 마지막 메뉴인 망고밥이 나왔다. 이건 밥 짓는데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코코넛 밀크를 넣어 미리 만들어 놓았던 것 같다. 망고밥은 찰밥과 망고를 함께 먹는 메뉴인데, 배가 너무 불러서 결국 망고만 먹어야 했다. 슬슬 식사가 끝나가자 선생님은 요리 레시피가 담긴 책자와 요리교실 명함을 나누어주셨다. 언젠가 이 음식들을 다시 해먹을 날이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팟타이는 꼭 다시 해 먹어 봐야지. 맛있으니까!
얼추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교실을 떠나기 전 K덕 친구와 SNS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행 잘 하라며 서로에게 격려 인사를 하고, 각자 계획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헤어졌다. 거리에 나오니 다시 뜨거운 해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역시 쇼핑몰이지! 우린 한치의 망설임 없이 요리 교실 근처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에 가서 영화 한 편을 더 보기로 했다. 한국에는 아직 개봉하기 전인 보스 베이비를 예매하고 팝콘에 콜라까지 사들고 신나게 극장에 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꼬부랑 말까지 줄줄이 이어 나오자 남편은 곧 잠에 빠졌다. 다섯 명의 여자 사이에서 요리도 하고 밥 먹는 게 꽤나 피곤했나 보다. 반면 나는 오랜만에 시전한 파워 수다로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는지 끝까지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알찬 하루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남편은 오랜만에 한식이 땡긴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숙소는 현지인들이 생활하는 주택가였기 때문에 그런 걸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추천해준 집 앞 저렴한 스테이크 가게에 가기로 했다. 수상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가면서 남편이 '갑자기 그냥 완전 어이없게 한식집이 딱 나오는 거 아니야?'라며 실없는 농담을 했다. 나는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동네 그냥 완전 로컬인데'라고 응수하면서도 '이양반이 정말 한식이 먹고 싶구나'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숙소 바로 앞에 위치한 스테이크 가게에 들어가기 위해 길을 건너려는 순간, 저 멀리서 이상하게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상회'. 뭐지. 내가 잘못 봤나.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편의 실없는 농담이 소름 끼치게 현실이 되어 다가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완전 개연성 1도 없는 곳에 당당하게 태국어 하나 없이 한글로 대한상회라고 쓰인 고깃집 간판을 만나게 되다니.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한식집에 남편의 어깨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 태백산맥만큼의 뽕이 한껏 들어갔다. '봤지? 봤지? 내가 그랬잖아 갑자기 나타나는 거 아니냐고'. 나는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고 너무 신기해서 그냥 하하하 웃어버렸다.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을 먹으면서도 어릴 적 보았던 전설의 고향처럼 '맛있게 밥을 먹고 다음날 가보니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뿐이었더라'는 아니겠지 라며 농담을 했다. 아마 이 무용담은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이래저래 살이 좀 더 붙어 꽤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풀려나갈 것이다. 마지막까지 제대로 먹고 놀다 가게 만들어준 태국. 어딜 가든 네가 그리울 거야,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