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네팔 #카트만두 #말레이시아항공
#모모 #라씨 #2017년4월29일~30일
한가로운 토요일 아침. 며칠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짐들을 불러 모아 가방 속을 재정비 한 뒤, 남겨 두고 가는 것은 없는지 마지막 점검에 들어간다. 오랜만에 무거운 등짐을 짊어지니 처음 떠나던 그날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다. 비록 여러모로 불안정하지만 눈뜨면 언제든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묘한 안정감이 되어 주는 떠돌이의 삶. 그렇게 우리는 시리도록 푸르른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로 또다시 방랑을 시작한다.
태국을 떠난 비행기는 밤 11시쯤 경유지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장장 10시간의 대기를 거쳐야 카트만두로 가는 최종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 우리는 공항 노숙을 위해 적당히 잘만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근처 화장실에서 양치를 한 뒤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새벽시간이라 조용한 데다 시원하고 와이파이까지 빵빵하게 터져주니 노숙 치고는 딱히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꿀잠을 자고 새벽 5시쯤 일어나 PP카드를 들고 라운지를 찾아갔다. 여행 출발 전 PP카드를 만들어 두면 이렇게 전 세계의 공항 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진다. 라운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방문한 곳에서는 샤워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 말끔하게 씻은 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침 9시. 긴긴 대기 시간을 끝내고 드디어 카트만두행 환승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매번 저가 항공만 타다가 포근한 베개와 이불이 제공되는 말레이시아 국적기를 타니 마치 7성급 호텔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록 10시간 공항 노숙을 해야 저렴한 가격에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때 되면 밥도 주고, 간식도 주고, 커피도 주고, 영화도 마음껏 볼 수 있다니! 100시간을 타도 전혀 지루할 것 같지 않았다.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4시간 30분을 날아 도착한 카트만두 공항은 생각보다 작고 낡은 모습이었다. 네팔은 공항에서 몇 가지 절차를 거쳐 도착 비자를 발급받아야 입국할 수 있는 국가로, 체류하고자 하는 일수에 따라 비자비가 다르다. 우리는 15일 체류 비자를 발급받았고 1인당 25달러를 냈다. 비자를 받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비자가 끝나는 날짜를 간혹 실수로 잘못 적어줄 때가 있으니 받자마자 확인하고 수정 요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 가서 발견하고 요청하면 자신들의 잘못임은 인정하지만 수정은 안된다는 이상한 입장을 고수한다고ㅎ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으러 가니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돌고 있어야 할 짐들이 바닥에 내려져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그래도 사라진 게 아니니 얼마나 감사한가. 서둘러 짐을 챙겨 들고 택시를 잡기 위해 공항 밖으로 나갔다. 슬금슬금 다가와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부르는 아저씨들에게 가볍게 'no'를 외쳐 드리고 미리 알아본 가격인 500루피(약 6,000원)에 여행자 거리인 타멜까지 가주신다는 기사님을 따라 차에 올랐다.
카트만두의 첫 느낌은, 이국적인 혼잡스러움이었다. 바닥은 소똥과 진흙과 물 웅덩이가 가득했고,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흙먼지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그 속을 비집고 움직이는 티코만한 작은 택시와 툭툭 그리고 소와 사람들.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확연히 달라진 사람들의 이목구비부터 전체적인 도시의 색감들이, 내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문화권에 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내려두고 환전을 한 뒤 유명하다는 더르바르 광장 구경에 나섰다. 가는 길에 현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가게에 들러 네팔식 만두인 '모모'를 사 먹었다. 매콤한 카레 소스에 찍어 먹는 모모는 내가 카레의 본고장 인도와 한층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
카레로 입안이 매콤해졌을 때는 시원하고 달콤한 요거트 '라씨'를 먹어주면 된다. 처음에는 컵에 담긴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지인들이 줄지어 사 먹길래 궁금해서 샀는데, 맛이 아주 기가 막힌다.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요거트들을 모두 부정하게 만드는 궁극의 맛. 진짜 '라씨는 사랑입니다'가 절로 나온다.
의도치 않았던 맛집 투어를 마치고 도착한 광장에는 작은 매표소 하나와 지진 피해로 다 부서져가는 건물 몇 개가 음산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티켓 값은 1000루피(약 12,000원)로 굉장히 비쌌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아무도 표를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이곳은 광장이어서 아무나 자유롭게 지나다니며 건물 외관쯤은 그냥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건물 안에도 들어가 볼 수 있었던 듯 하지만 지금은 붕괴 위험이 있어 모두 막아 둔 것 같았다. 우리는 간단히 주변을 둘러본 뒤 광장 한 켠에 자리 잡은 쿠마리 사원으로 갔다.
사원 맨 꼭대기 층에 난 창문으로 하루 세 번만 얼굴을 비춘다는 쿠마리는 살아있는 여신으로 3세~6세의 여자 아이들 중에 선발한다.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선발된 아이는 초경을 하기 전까지 가족과 떨어져 이 사원에서 여신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데 1년의 두 차례 정도 축제가 있을 때만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또한 발이 땅에 닿으면 안 되는 규정이 있어 외출 시에는 늘 가마를 타야 한다. 이 외에도 제물로 바쳐진 음식만 먹어야 한다거나, 학교에 가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국제 사회에서 아동 학대라는 평가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들의 문화를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최근 쿠마리 여신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준다거나 간식을 먹을 수 있게 하는 등 지켜야 할 규정들을 조금씩 완화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각이 되자 아이는 작은 창문가에 나타나 1분간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네팔 사람들은 쿠마리 앞에서 기도를 했다. 그들은 정말 그 아이를 신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묵묵히 바라본 뒤 복잡한 감정을 안은채 사원을 나왔다.
거리는 온통 새로운 색감들로 넘쳐났다. 그 사이를 느긋한 걸음으로 거닐며 여행자 특유의 두리번 거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덧 몸 보다 한 박자 늦게 도착한 마음까지 카트만두의 풍경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조금씩 혼잡함에 익숙해진 우리는 앞으로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한 장비 구입에 나섰다. 짝퉁 노스페이스 의류와 장비가 진열된 가게들을 서너 군데 둘러보고 등산화 한 켤레와 우비 하나, 스틱 두 세트를 샀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 숙소로 돌아와 1인당 700루피(약 8,400원)를 내고 다음날 포카라로 가는 투어리스트 버스를 예약했다. 우리는 포카라에서 며칠간의 준비를 마친 뒤 꿈에 그리던 히말라야를 만나러 갈 것이다. '선천성 고생길 증후군'에 걸린 나는 힘들 것이 분명하지만 이번에도 굳이 사서 그런 길을 선택했다. 고생 끝에 오는 낙은 그냥 온 낙보다 훨씬 달콤하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은 안다는 고생의 참맛. 제가 한 번 먹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