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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히말라야 이야기1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네팔 #포카라 #히말라야트레킹1일차

#2017년5월1일~3일


꿈 [명사]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


사전에서 '꿈'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대표 의미 다음으로 위와 같은 두 가지 뜻이 추가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두 가지 의미가 서로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다.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 때로는 실현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심지어는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매우 치명적인 팩트 폭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꿈들이 가능성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작은 겨자씨 한 알에서 새들이 깃들 만큼 커다란 나무가 자라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겨자씨에게 햇볕과 비바람과 시간이 필요하듯 우리의 꿈에도 계획이나 도전 같은 몇 가지 과정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꿈을 둘러쌓고 있는 '겁'을 상실하는 일이다. 늘 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 위에 서는, 세상이 정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선택하는, 도전하려는 것이 능력 밖의 일이 아닐까 걱정하는 모든 두려움을 상실하는 것. 그렇게 두려움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꿈'은 더 이상 헛된 기대나 생각이 아닌 곧 만나게 될 현실이 되는 것이다.

<제로 카페 갤러리에서 바라본 페와 호수>

아침 일찍 카트만두에서 투어리스트 버스를 타고 8시간을 달려 도착한 포카라. 선선한 날씨와 반짝이는 호수, 비교적 깨끗하고 넓은 거리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본격적인 트레킹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인심 좋은 여사장님이 계신 곳으로 유명한 한인 게스트하우스 윈드폴에 찾아갔다. 사실 이곳에 숙박을 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빈방이 없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묵지 않아도 트레킹 할 때 놓고 갈 짐들을 맡아 줄 테니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우와. 이래서 사람들이 '윈드폴은 사랑입니다'를 외치는 거구나. 우리는 사장님께 팀스&퍼밋 대행과 트레킹 가이드 섭외를 부탁드렸다. 팀스는 산행 신분증, 퍼밋은 입산 허가증인데 이 두 가지는 히말라야 트레킹 전 꼭 발급을 받아야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직접 발급을 받으면 4,000루피, 대행을 하면 300루피 저렴한 3,700루피이다.

<정말 윈드폴은 사랑이더군>

그밖에 트레킹에 필요한 물건들은 게스트하우스 선반에서 다 빌려 가라고 하셨다. 우리보다 앞서 트레킹에 다녀온 사람들이 두고 간 물건들이었다. 짐들을 뒤지며 뭘 챙겨야 좋을지 몰라 어리바리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꼭 필요한 것들을 언급해주셨고 그 덕에 우리는 등산용 바지 2벌과 넥밴드 2개, 장갑 1개, 털모자 1개, 물병 1개를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우리 짐을 15kg 정도 들어주는 포터 역할도 할 예정인데, 보통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전용 가방을 따로 준비해 드리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그래서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가방을 하루 80루피에 빌리기로 했다.

<포카라 만남의 광장 같은 찬드니촉 사거리>

트레킹 시작 전날 챙이 있는 모자 2개와 내 등산화 하나를 추가로 구입하고 마트에 가서 신라면, 초코파이, 스니커즈 초코바 및 물티슈를 샀다. 가이드 프렘 아저씨와는 사전 미팅을 통해 인사를 나누고, 이동 경로에 대해 상의하는 시간도 가졌다. 우리는 힐레라는 마을까지 짚차를 타고 이동한 뒤 그곳에서부터 7박 8일간의 트레킹을 시작할 예정이다. 트레킹의 목표는 4,130m에 위치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까지 가는 것. 6일 동안 올라갔다가 하루 반 만에 내려온다는 것이 뭔가 비현실적여 보이지만 다들 그렇게 했다니까 일단은 가보기로 했다.

<트레킹 시작 아침, 아직은 생기 가득>

전날 싸 둔 가방을 짊어지고 가이드를 만나기로 한 윈드폴로 향했다. 두고 갈 짐들을 맡기고 윈드폴 사장님이 챙겨주신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니 예약했던 짚차가 도착했다. 다행히 우리 말고도 한국인 남매 한 팀이 함께 출발하게 되어 짚차비 5,000천 루피(약 60,000원)를 나눠낼 수 있었다.

<맨인블랙 아님. 히말라야에 외계인 잡으러 간거 아님.>

짚차는 극강의 오프로드를 1시간 반쯤 내달려 나야풀이라는 마을에 멈춰 섰고, 그곳에서 우리는 미리 발급받아 온 팀스와 퍼밋을 검사 받았다. 그리고 다시 30분을 더 달려 출발점인 힐레에 도착했다.

<팀스&퍼밋 검사하고 드디어 출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드디어 산행이 시작되었다. 미리 준비해스틱을 돌계단 위에 콕콕 찍으며 7박 8일간 가이드 및 각종 편의를 봐주실 프램 아저씨를 뒷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리 건널 때마다 너무 높아서 움찔 움찔>

오늘은 첫날이니 해발 2,046m에 위치한 울레리까지 약 2시간만 걸으면 된다. 오르막이 꽤 이어지는 산길에서 최대한 힘들지 않게 걷는 방법은 호흡을 조절하는 것이다. 마라톤처럼 자신의 페이스에 맞게 호흡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숨이 차지 않아 올라가기가 더 수월해진다. 거기다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힘든 구간은 40분에 한 번, 쉬운 구간은 1시간에 한 번 정도 쉬어갈 타이밍을 만들어 주시는 가이드 아저씨 덕분에 더욱 안전한 여정이 될 수 있었다.

<이봐 사람, 궁댕이에 치이기 싫으면 물러나게나>

푸르른 자연 속을 한참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말과 나귀 떼가 조심조심 돌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고산 지대 마을에는 차량이 갈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동물들을 이용해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한다고 한다. 신기한 광경을 사진으로 담고 지나가려는데 가이드 아저씨가 당나귀나 말을 만나면 꼭 안쪽으로 붙어서 가라고 주의를 주셨다. 낭떠러지 쪽에 섰다가 잘못해서 나귀에게 치여 떨어지는 사고가 종종 있다고;;

<울레리로 가실 분은 이쪽으로 오라이~>

우기가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비를 맞지 않고 오후 3시쯤 첫 번째 롯지인 울레리에 도착했다. 투박하게 지어진 숙소에 짐을 풀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시설들이 나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고산 지대 롯지들은 더블룸이 200루피(약 2.400원)에서 400루피(약 4,800원) 사이로 매우 저렴하다. 대신 이곳에서 파는 음식들로 수익을 얻는 구조여서 적당히 잘 사 먹어 줘야 우리를 데려간 가이드 아저씨도 무료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증축 중인 롯지. 하루에 벽돌 한장 쌓는 속도로 짓는 듯.>

더위가 사그라들며 몸에 한기가 들었다. 머리를 말리지 않은 채 찬바람을 쐐서 그런 것 같아 몸을 녹여줄 따듯한 생강차를 시켰다. 우리는 롯지 마당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눈 앞에 펼쳐진 히말라야의 푸른 산자락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이렇게 웅장하고 거대한 산들에 둘러 쌓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 같은 풍경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그렇게 1시간을 밖에 있다보니 슬금슬금 두통까지 찾아왔다. 두통약을 먹은 뒤 털모자에 옷이란 옷은 모두 껴입고 두꺼운 솜이불 속에 누워 있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 산행을 위해 잘 먹어야 했기에 저녁으로 모모와 마늘 스프를 시키고 식당에 앉았다. 따듯한 음식들을 먹고 마당으로 나가 남편과 프램 아저씨와 셋이서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두 딸의 아빠이자, 결혼한 지 17년 된 베테랑(?) 유부남인 프램 아저씨는 우리가 산맥의 이름이나 네팔 사람들의 생활상 등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아주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다. 즐거운 대화가 이어지자 신기하게 두통도 사라져 갔다.

<마당에 앉으면 영화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삶의 모든 것에 겁을 내던 시절, 나에게 '히말라야 트레킹'은 그저 무게감 없는 하품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솟아난 용기에 '겁'을 내던지고 나니 여행이 시작되었고 꿈은 현실이 되었다. 두려움은 언제나 눈 앞을 가린다. 한계를 지어주고 발을 묶는다. 하지만 나는, 언제든 그것들을 떨쳐낼 수 있는 우리 안의 힘을 믿는다. '겁'을 상실하고 딱 한 걸음. 꿈을 향한 시작은 반이 아닌 전부이다. 때문에 나는 아직 눈 뜨지 못한 모든 겨자씨 같은 꿈들에 응원을 보낸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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