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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히말라야 이야기2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네팔 #포카라 #히말라야트레킹2일차

#고레빠니 #2017년5월4일


5월이 되면 히말라야는 매일매일 비가 내리는 몬순 시즌에 들어간다. 지금은 정오를 기점으로 보슬비가 내리는 수준이지만 7월이 되면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진다고 한다.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이 때로는 운치 있는 일이겠지만 길이 평탄치 않은 이곳에서는 되도록이면 비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때문에 우리는 아침 7시 30분쯤 출발하여 4~5시간을 걸은 뒤 점심 전후로 다음 롯지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아침 먹으면서 보는 풍경이 이정도>

트레킹에서 체력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잘 먹는 것이다. 제시간에 적당히 잘 먹어야 고산병이 오지 않고 그래야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꾸역꾸역 삶은 감자와 마늘스프 그리고 생강차를 먹었다. 마늘스프와 생강차는 고산병 예방에도 좋은 음식이기 때문에 하루 한 번은 꼭 챙겨 먹고 있다. 고산병은 2000m 이상의 높이에서 체력, 나이, 산행 경험 유무를 떠나 누구에게나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증상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약을 미리 챙겨 먹으면 발병 확률이 낮아지지만 대신 부작용으로 손발이 저리거나 무기력증이 올 수 있다고 하니 일단은 그냥 올라가 보기로 했다.

<짧은 다리로 열심히 걸어 봅니다>

소화 잘 되는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가방 앞에 덜 마른 빨래를 매달고 해발 2,820m에 위치한 고레빠니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져도 따듯하게 내리쬐는 햇볕과 시원한 산바람에 기분이 좋아졌다. 가볍게 한 시간쯤을 걷고 나니 프램 아저씨가 작은 롯지에 가방을 내리고 잠시 쉬자고 하셨다. 산행을 하다 보면 중간중간 수많은 롯지들을 지나게 되는데, 무엇을 사먹지 않아도 누구나 그곳에서 편히 쉬어 갈 수 있다. 모든 롯지의 주인은 그렇게 지친 트레커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기꺼이 자리를 내어 준다. 히말라야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귤맛이 꿀맛>

나는 작은 롯지에서 유난히 노오랗게 반짝이는 귤 4개를 샀다. 가격은 100루피(약 1,200원). 우리는 나란히 앉아 가이드 아저씨와 함께 푸르른 산맥을 바라보며 귤을 까먹었다. 오랜만에 새콤한 맛을 보니 피로가 싹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귤에서 나온 굵은 씨앗들은 자연 속으로 던져주었다. 그리고 다음에 다시 왔을 때는 귤나무가 되어 있으라며 이상한 주문을 건 뒤 다시 길을 나섰다.

<보이니, 이 끝 없는 오르막이>

작은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푸른 숲과 낭떠러지 길을 계속 걸었다. 절벽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꽃들로 가득했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넘칠 듯 흐르고 있었고, 그 아래로 푸르른 나무들이 가득했다. 땀이 흐르고 호흡이 가빠와도 지나치는 풍경이 아쉬워 계속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이내 모두 그만두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여행 후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지만 이 순간을 꿈속에서도 보고 싶다면 눈으로 담아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기억은 무언가를 가장 잘 사라지게 만드는 동시에 가장 선명하게 남기기도 하니 말이다.

<아저씨 같이 가요>

아침을 너무 가볍게 먹은 탓이었는지 11시가 되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그래서 얼른 가방에 넣어 둔 초코바 하나를 꺼내 먹었다. 역시 열량 최고의 스니커즈! '배고플 때 나는 내가 아니야'라는 광고 카피처럼 나는 다시 부스터를 단 카트라이더처럼 힘을 내 계단을 올랐다. 그러고 보면 프램 아저씨는 15kg이 넘는 짐을 지고도 나비처럼 사뿐사뿐 잘도 올라가신다. 하긴 7박 8일 ABC코스를 한 달에 네 번 정도는 올라가신다고 하니 말 다했다. 신발도 가벼운 워킹화에 가방 무게를 허리에 지탱해주는 벨트도 차지 않으시는 고수의 향기. 내 딴에는 걱정이 되어 괜찮으시냐고 물으면 언제나 오케이라며 환하게 웃어주신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맨인블랙 외계인 잡으러 고레빠니 도착>

체력 소모가 빠르기 때문에 원래는 3시간쯤 걸은 뒤 점심을 먹어주어야 하지만, 우리는 조금 참았다가 목적지에 가서 먹기로 하고 계속 걸었다. 그렇게 1시간가량을 더 걸으니 고레빠니 마을을 알리는 현판이 나타났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도착! 엄청나게 힘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가볍게만 걷는 길 또한 아니기 때문에 그날 묵을 롯지가 눈 앞에 나타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정수한 물이라면서 낙엽은 왜 들어있는거니>

오늘 묵게 된 숙소는 총 4층으로 규모가 굉장히 크다. 1층에는 책과 과자, 옷 등을 파는 잡화점도 있다. 2층은 롯지 식당인데 한켠에 따뜻한 나무 난로가 놓여있어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방에 짐을 풀고 내려오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난로 곁에 앉아 쉬고 있었다. 우리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불을 쬈다. 고산지대는 불편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뜨거운 물 샤워도 맘껏 할 수 있고 100루피를 내면 와이파이도 빵빵하게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정말이지 네팔은 알면 알수록 대단한 나라다.

<맛있어서 폭풍 흡입>

점심으로는 피자와 야채 볶음면을 먹었다. 히말라야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롯지의 밥값이 비싸진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까지 나귀로 사람으로 무거운 식재료들을 옮겨온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밥값이 비싼 대신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한국에서처럼 1인 1메뉴를 시키면 꼭 남기고 만다. 하지만 배가 고팠던 우리는 엄청난 양의 밥을 싹싹 해치워버렸다. 그리고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방으로 돌아가 3시간 동안 낮잠을 잤다.

<나귀: 힘드니까 말 시키지마>

저녁 5시쯤 프램 아저씨가 방문을 두드려 미리 저녁을 주문해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나는 눈곱만 떼고 식당으로 내려가 주문을 하고 난로 곁에 앉아 그룹으로 트레킹 중인 미국인들과 인사를 했다. 그때 난로 뒤쪽 테이블에서 익숙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오징어 짬뽕ㅎ 커플로 추정되는 동양인 두 명이 오징어 짬뽕 봉지 라면으로 뽀글이를 해 먹고 있었다. 아, 100% 한국인이다! 남편은 장기 여행자 포스가 폴폴 풍기는 커플에게로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수다가 익어가는 저녁 무렵>

라면을 흡입하던 두 분은 남미를 시작으로 6개월째 장기여행 중인 부부였다. 여행을 하며 처음으로 우리와 비슷한 부부 여행자를 만나니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프램 아저씨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푼힐 전망대에 가려면 그만 자야 한다고 말리지 않으셨다면 우린 밤새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삶의 가치가 같은 노선에 위치한 사람들과 풍족하게 인생을 나눌 수 있었던 시간. 여행은 오늘도 이렇게 사람으로 인연으로 수많은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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