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네팔 #포카라 #히말라야트레킹5~6일차
#히말라야 #ABC베이스캠프 #2017년5월7~8일
어김없이 떠날 채비를 하고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전날 백숙을 무리하게 많이 먹은 탓일까 속이 더부룩하고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아 먹는둥마는둥하고 5일차 트레킹을 시작했다. 일정이 중반을 넘어서니 어느덧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가 저 멀리 푸른 산맥 사이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까지 날아서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방법은 그저 한걸음 한걸음 성실히 걷는 것뿐이다. 비록 그 과정이 힘들지라도 내 두 발로 천천히 히말라야의 품속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오늘도 ABC를 밟는 그 순간을 상상하며 힘을 내본다.
어제 묵은 촘롱 숙소 마당에서 밖을 내다보면 오늘 코스의 중간 기점인 시누와 마을이 보인다. 눈으로 보이니 금방 가겠네라는 마음을 먹었다가 또 한방 제대로 먹은 우리. 시작부터 가파른 내리막이 아픈 다리를 콕콕 찌르기를 1시간. 거기에다 정신줄 똑바로 잡아야 하는 오르막이 1시간 추가된다. 내리막+오르막+근육통 쓰리콤보로 가볍게 2시간을 걸은 뒤 도착한 시누와에서 어디서 점심을 먹을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대략 7시간 정도를 걸어야 해발 2,920m에 위치한 히말라야 롯지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에 밥을 한 번 먹어주어야 한다. 후보에 오른 롯지는 시누와에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밤부와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도반이었다. 나는 아침을 부실하게 먹어 슬슬 배가 고파왔기 때문에 밤부를 주장했지만 남편은 어차피 갈길 조금 더 가서 먹는 게 어떻냐고 도반을 강력 추천했다.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남편 의견을 따라 도반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토론의 결과에 따라 열심히 걸어 밤부를 막 지나친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밤부에서 밥을 먹었어야 했구나. 급히 초코바를 꺼내 먹었음에도 급격히 당이 떨어지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몸속에 에너지를 만들 연료가 완전 바닥 났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너무 배가 고파 손과 다리가 떨려왔지만 도반이 나타나기 전에 밥을 먹을만한 곳은 없었다. 나중에는 정말 무슨 생각으로 몸을 움직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눈 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정말 이를 악물고 버텼던 것 같다. 결국 도반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밀가루 반죽처럼 푹하고 퍼지고 말았다. 긴급으로 초코파이를 투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번 바닥까지 꺼져버린 에너지는 좀처럼 게이지를 높이지 못하고 허덕대다가 뜨끈한 신라면에 밥까지 말아먹은 후에야 조금 되살아 날 수 있었다.
밥을 먹고 기운이 생길 때까지 옆자리에 앉은 홍콩 사람과 한참 수다를 떨었다. 혼자 가이드와 포터를 고용해 ABC만 다녀왔다는 그는 보통 5박 7일이 걸리는 일정을 3박 4일 만에 해치웠다며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다. 나중에 가이드 아저씨께 이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그 사람 죽을 수도 있었다면 걱정을 하셨다. 고도를 너무 순식간에 올렸다 내리면 폐가 과호흡을 하게 되어 심한 경우 갈비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후. 시간이 더 걸려도 안전하게 천천히 올라가야지.
배고픔을 딛고 일어나 다시 3시간 정도를 걸으니 천둥소리와 흡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계곡물소리가 들렸다. 이 계곡 곁에 오늘 우리가 묵을 히말라야 롯지가 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가방을 내려놓고 단출한 나무 침대에 걸터앉았다. 계곡이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런지 방 안에서도 물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다른 롯지보다 습도도 조금 높은 것 같았다. 그래도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3,000m 가까이 올라왔으니 이제 뜨거운 물 샤워는 안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된다고 해서 한 번 더 행복. 상큼하게 씻고 나오니 높은 고도 때문에 으슬으슬 추위가 몰려왔다. 가져온 옷을 몇 겹씩 껴입고 물기를 말리기 위해 수건으로 감싼 머리 위에 그대로 털모자를 써버렸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내가 심슨 와이프 같다며 웃었다. 그래 오늘 고생했으니까 이런 것으로라도 웃으렴ㅋ
롯지 식당에서 따듯한 생강차와 레몬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으로 피자와 카레를 먹었다. 그리고 팔팔 끓인 뜨거운 물 1L를 병에 담아 방으로 돌아왔다. 물병은 물이 새지 않게 비닐로 세 겹 보호막을 입힌 뒤 이불속에 넣어 찬기를 없애는 용도로 쓴다. 발도 녹이고 손도 녹이도 그러다 보면 따뜻한 기운에 노곤노곤 잠이 몰려온다. 역시 모두가 추천하는 팁은 유용하다.
의외의 숙면을 취했던 밤이 지나고 또다시 새날이 밝아왔다. 여전히 온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마음만큼은 가벼웠다. 오늘은 이번 트레킹의 목적지 해발 4,130m에 위치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한껏 가까워진 설산의 기운에 옷을 든든히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ABC로 가는 길은 지난 5일 동안 걸어온 길들보다 훨씬 아름다운 절경을 뽐냈다. 만년설이 녹아 폭포가 되어 떨어졌고, 앞을 한치도 알 수 없는 거대한 구름이 우릴 감쌌다. 발 밑에는 얼음에 가까운 눈밭이 나타났고 그와 중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보랏빛 꽃이 찬바람에 살랑였다. 베이스캠프가 가까워질수록 처음 보는 낯선 행성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괴하면서도 아름답고 또 척박하면서도 풍요로웠다. 발을 떼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아쉬운 그런 날이었다.
오늘도 6시간 정도를 걸어야 하는 일정이기 때문에 MBC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MBC는 만나면 좋은 친구가 아니라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의 줄임말이다. 높이는 3,700m. 롯지에 도착하니 스무 명 정도 되는 한국인 단체 트레커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트레킹 전문 여행으로 유명한 모 여행사를 통해 오신 분들인데, 우리처럼 이제 막 도착하신 듯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고 점심을 먹기 위해 안쪽에 위치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우리의 점심은 신라면과 흰밥. 속도 안 부대끼고 맛있어서 자주 애용하는 메뉴이다. 간편한 점심을 빠르게 끝내고 지친 몸에 휴식을 주던 그때, 단체 트레커들과 함께 온 포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리를 피해주니 테이블에 식사 매트를 착착 깔고 그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일사불란하게 놓는다. 그리고 차려지는 맛깔난 한식들. 다섯 가지 정도의 김치와 젓갈이 먼저 기본으로 깔리고, 계란이 얹어진 흰쌀밥이 한 그릇씩 더해진다. 고추장도 주겠지. 다 차려지자 트레커들은 느긋하게 식당으로 들어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빈부격차와 서러움이 느껴져 자리를 털고 일어나 ABC로 향했다.
눈과 얼음 사이쯤 되는 만년설이 쌓인 길을 2시간쯤 더 걸으니 드디어 긴긴 트레킹의 목적지인 해발 4,130m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가 나타났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마음을 추스르며 남은 돌계단을 천천히 밟았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에 발을 올리는 순간, 먼저 와 있던 여러 나라의 트레커들이 일제히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고 나도 그들과 함께 환호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비록 가득 찬 구름 때문에 가까워진 설산들의 모습은 가리어져 있었지만 해냈다는 사실 하나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가니 며칠 전 고레빠니에서 만났던 부부 여행자 분들이 롯지 식당 안에서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졌다. '아이구 고생했네. 잘했다. 잘 올라왔어. 장하다'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때때로 아이처럼 격려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어 진다. 언니 오빠는 어떤 마음이셨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그런 따듯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그래서 참 고맙고 고마웠다.
우리는 방에 짐을 풀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언니와 오빠가 머무는 숙소로 달려갔다. 그리고 무려 3시간 정도 수다를 떨었다. 언니 오빠는 아껴두었던 쥐포도 나누어 주셨다. 수다에는 다양한 주제가 오고 갔는데 무엇보다 여행이 끝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결론은 간단하다. '그냥 지금을 즐기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은 돌아가서 해도 늦지 않는다'였다. 나는 그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걱정하는 삶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 주제에 팔자 편하게 돌아가서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다니. 우리에게 그럴 시간은 없다. 무모할 정도로 이 순간을 즐겨야 한다. 우리 인생에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뚝 떨어진 기온에 본격적인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금 일찍 저녁을 먹고 어제처럼 뜨거운 물 한 통을 사서 방으로 돌아갔다. 쉽사리 따듯해지지 않는 이불속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대 그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나눴다. 평생 잊지 못할 사서 고생의 추억. 그래도 다시 하라면 할 것 같은 엄청난 매력의 히말라야 트레킹! 아쉬움에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밤, 깊은 산속 작은 롯지에 누워 그렇게 지난날을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