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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히말라야 이야기6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네팔 #포카라 #히말라야트레킹7일~8일차

#촘롱 #시와이 #2017년5월9일~12일


새벽녘 방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구름 올라와요!' 장기 여행자 언니 오빠의 다급한 목소리에 우리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아직 구름이 모든 것을 덮기 전이었다. 나름 예쁘게 단장하고 안나푸르나 산맥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 했건만. 결국 막 자다 일어난 부스스한 차림새로 절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 꼴은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코앞까지 가까워진 설산은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남편과 나는 커다란 바위 위에 걸터앉아 베이스캠프를 웅장하게 둘러싼 산맥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날씨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완벽했을 텐데. 하지만 언니 오빠가 깨워주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보지 못하고 내려가야 했을 것이다. 정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언니 오빠 덕에 놓치지 않고 만날 수 있었던 마지막 절경 >

6일 동안 올라오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그 길을 하루 반 만에 내려간다는 게 가능할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가능하다. 다만 조금 많이 힘들 뿐이다. 가이드 아저씨는 오늘 6시간을 걸어 시누와에서 묵고 내일 또 6시간을 걸어 차가 다니는 시와이까지 가자고 하셨다. 하지만 어차피 맞을 매 미리 맞자 주의인 우리는 몸 상태를 봐서 오늘 9시간을 걸어 촘롱까지 가자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하면 내일은 3시간 정도만 걸으면 될 테니까 말이다.

<구름에 가려지기 전 안나푸르나 산맥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

걷기 시작한 지 4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중간에 점심을 먹으면서도 마치 입으로 나가는 에너지까지 아끼려는 듯 조용히 밥만 먹었다. 그리고 2시간을 더 걸어 프램 아저씨가 처음에 제안하셨던 시누와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촘롱까지 가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시누와에서 촘롱 사이 길은 이번 트레킹 중 가장 고난도의 길이다. 엄청난 경사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결된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힘들었던 우리는 내친김에 더 힘들자고 이상한 생각을 해내기에 이르렀고 축축 처지는 육신을 이끌고 나머지 3시간을 걸어갔다.

<조금만 참자. 고생길도 이제 얼마 안남았다구!>

말이 9시간이지 정말 가는 내내 속으로 곡소리가 나왔다. 오늘은 프램 아저씨도 힘이 드셨는지 원래 하루 6시간 이상은 안 가는 것이 본인의 원칙인데 우리가 가자고 해서 9시간을 걸었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늘어놓으셨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어찌 되었든 다친 사람 없이 기나긴 9시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그저께 닭백숙을 먹었던 촘롱 숙소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장기 여행자 언니 오빠가 아래 동네에서 우릴 맞아 주셨다. 내일 시와이에서 짚차를 타고 포라카로 돌아갈 때 돈도 절약할 겸 같이 쉐어 해서 가자고 하셔서 냉큼 그러기로 했다.

<저멀리 엊그제 묵었던 촘롱이 보인다. 하지만 사물은 늘 보이는 것 보다 멀리 있지;>

짐을 풀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방 앞 의자에 앉았다. 9시간의 대장정으로 발목과 무릎은 이미 내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히말라야의 끝내주는 풍경은 감동을 주고 도가니를 가져갔다. 안티푸라민 같은 것이라도 가지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알이 밴 다리를 꾹꾹 주무르며 이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보고 또 봐도 정말 질리지 않는 장면이다. 언제나 그렇듯 또다시 처음처럼 온갖 감탄사를 연발한 뒤 식당으로 내려가 저녁을 주문했다. 오늘도 역시 신라면에 흰밥. 입맛 없을 때 이보다 더 맛있는 메뉴는 없다. 얼근한 국물로 속을 풀어준 뒤 간신히 잡히는 인터넷 신호로 대선 결과를 확인했다. 내가 지지했던 후보가 당선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를 수호해줄 만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동시에 득표율 2위에 오른 레드가 당최 이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25%의 사람들은 그를 뽑은 것일까. 세계 7대 불가사의 대열 추가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듯하다. 내일부터 바쁘게 업무를 시작하게 될 문재인 정부. 부디 소통과 감동으로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 주시길 기도해 본다.

<트레킹 중 가장 많이 먹었던 계란 푼 신라면과 흰밥. >

8일째 아침. 힘들었던 지난 7일간의 여정으로 하루빨리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산 위에서 먹는 마지막 아침은 볶음밥+고추장. 태국에서 사 온 고추장이 산 위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제 그 고생을 했으니 오늘은 3시간만 걸으면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든든한 프램 아저씨의 뒤를 따라 마지막 산행을 떠난다.

<돌아가는 짚차 안. 남편은 사색을 즐기는 척 자고 있다.>

왜 끝이 멀 때보다 가까울 때 조급함의 크기가 더 커지는 걸까. 평소로 치면 3시간 걷는 것은 껌인데, 마치 10시간을 걷는 것처럼 지친다. 아마도 '조금만 가면 찻길이 나올 거야'라는 생각이 마음을 약하게 만든 것 같다. 나는 잠시 쉬려고 가방을 내릴 때마다 프램 아저씨께 '몇 시간 남았어요?'를 습관처럼 물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아저씨를 괴롭히며 걷다 보니 저 멀리 사람들이 북적이는 큰길이 보였다. 알록달록 옷을 차려입고 포카라 시내로 가려는 고산지대 사람들이다. '와. 드디어 다 온건가. 드디어 이 고통에서 해방인가.'하는 생각에 또 주책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길이 거의 끝나기 전 완벽한 타이밍으로 장기 여행자 언니 오빠도 다시 만났다. 우리는 그동안 고생했다고 서로를 다독이며 짚차가 다니는 곳까지 함께 걸었다.

<짚차 타고 가다 만난 산양 떼. 발 걸음이 똥꼬발랄함.>

남편과 나, 가이드 아저씨 이렇게 셋 만 짚차를 타고 갔으면 5,000루피(약 50,000원)를 내야 했는데, 언니 오빠와 쉐어 해서 3,000루피(약 36,000원)만 내면 됐다. 짚차는 바퀴가 빠질 것 같은 속도로 오프로드를 거침없이 달렸다. 오랜만에 다리를 쓰지 않아도 쭉쭉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시내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장기 여행자 언니 오빠와 저녁을 같이 먹기로 약속을 했다. 함께 산을 오르며 전우애(?) 같은 감정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무튼 알게 모르게 끈끈해진 기분이다.

<트레킹 끝나고 폭신한 침대에 누운 세상 행복한 아재>

털컹이는 짚차에서 2시간을 버티니 꿈에 그리던 윈드폴 게스트하우스가 눈 앞에 나타났다. 몰골이 해괴해진 채 차에서 내린 우리를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리고 오늘은 방이 있으니 묵고 갈 수 있다며 청소할 때까지 소파에 앉아 기다리라고 하셨다. 우리는 신발도 양말도 벗고 세상 편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소파에 앉아 오고 가는 여행자들에게 막 다녀온 생생한 트레킹 후기도 들려주고 다음 여행지인 인도 관련 책자도 읽다 보니 방이 준비되었다. 햇볕 잘 드는 옥상 방. 시원한 포카라 날씨 덕에 에어컨은 필요 없다. 우리는 말끔하게 샤워를 한 뒤 빨지도 않고 7박 8일을 버틴 옷들을 비닐봉지에 모두 몰아넣은 뒤 숙소 근처 빨래방에 맡겼다.

<페와 호수 앞 카페에서 레알 신선 놀음.>

8일 만에 돌아온 포카라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잔잔한 페와 호수 곁에서 젊은 커플들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고, 하늘은 페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로 알록달록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남은 3일간의 여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한량처럼 카페에 누워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소인지 물소인지 알 수 없는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도 먹으면서 말이다. 머무는 동안 최초로 시행되는 네팔의 지방선거 운동도 실컷 구경했다. 트럭을 타고 다니며 확성기로 온 동네를 시끄럽게 만드는 모습을 보니 우리나라 선거 운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입후보자가 무려 4만명인 후덜덜한 네팔 지방선거>

포카라를 떠나기 전날 장기 여행자 언니 오빠와 네팔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인 '소비따네'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지난 며칠간 언니 오빠와 트레킹도 하고 밥도 먹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다. 다음 여행지가 인도로 동일했지만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델리로 들어가고, 언니 오빠는 버스를 타고 바라나시로 들어가기 때문에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건강과 안녕을 빌어준다. 잊을 수 없는 경험과 고맙고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해 준 네팔.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이곳이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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