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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여행 그리고 우연과 인연

보톤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인도 #우다이푸르 #우연 #인연

#2017년5월28일~29일


<인도의 서북부에 위치한 우다이푸르>

우다이푸르에 머문지도 닷새. 본격적인 활동 시간오후 4시. 우리의 강력한 인도화는 오늘도 한창 진행 중이다. 사실 4시에 나간다고 해도 그다지 시원하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을 때 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오늘은 집에서 3분 거리에 위치한 '야미 요가'라는 카페에 갔는데 처음에는 이름 때문에 요가 교습소인 줄 알았다. 하지만 트립어드바이저를 보니 카페라고ㅎ

<야미 요가의 구슬 게임 마스터님>

야미 요가에는 에어컨이 없다. 그래도 자꾸만 가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우선 들어가자마자 주인장이 심심하지 않냐며 기타를 건네준다. 나무로 조각된 미로 같은 판에 쇠구슬이 들어가 있는 장난감도 준다. 이외에 체스도 있고 막대기에 끈으로 연결된 공을 던져 막 꼭대기로 받는 장난감도 있다. 자리는 쿠션을 사랑하는 좌식의 나라 인도 답게 수많은 베개와 쿠션이 곁들여져 있다. 테이블은 모자이크 기법으로 만들어져 화려하면서도 예스럽다.

<폼은 그럴싸하지만 소리는 C코드 드르릉>

반지하 느낌의 야미 요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창 밖으로 가끔 소도 지나가고 개도 지나간다. 아무것도 아닌 풍경을 감상하며 애매한 시간대에 딱 맞는 간식도 먹는다. 아이스크림이 곁들여진 브라우니는 한 번 손대면 멈출 수 없는 맛을 자랑한다. 쉐이크들은 그냥 그렇지만 시원한 맛에 먹는다. 먹다 놀다 글 쓰다를 반복하며 영원히 이곳에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더워도 너무 덥다. 분위기에 취해 2시간은 버텼는데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 계산서를 달라고 했더니 주인장이 작은 상자 하나를 내민다. 안에는 접힌 종이들이 들어 있었다. 뽑기처럼 하나씩 뽑아 펼쳐보니 좋은 글귀들이 적혀있었다. 별 것 아니었는데 특별한 이벤트라도 된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일상의 기쁨을 선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호화로운 테이블에 달달한 디저트들>

저녁을 먹기 전 배를 조금 꺼트리기 위해 동네 산책에 나섰다. 그동안 늘 호수 건너편에 있는 가트에만 갔었는데 오늘은 집 근처에 있는 가트에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이런저런 상점들을 구경하며 걷고 있는데 한 세밀화 가게 주인이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한국어로 된 편지 같은 것을 보여주며 뭐라고 쓴 것인지 알려줄 수 있냐고 묻는다. 슬쩍 보니 이곳에서 세밀화 체험을 한 여자분이 가게를 추천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직독직해로 대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궁금해져 세밀화 수업이 얼마인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내고 싶은 만큼 내면 된단다. 심지어 돈이 없으면 안내도 된다고 한다.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왜 그렇게 하는지를 물었고 그는 나의 우문에 현답을 내놓았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어. 누군가는 돈이 없고, 배가 고프고, 힘들어. 하지만 또 누군가는 돈이 있고, 배가 부르고, 여유롭잖아. 그러니 각자 상황에 맞는 대로 돈을 내야지.'


그의 마음은 정말 감동이었다. 길에서 내가 현자를 만난 것인가. 인도에는 이런 생활 철학자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며 억지를 부리기도 하지만 갑작스레 이렇게 묵직한 감동을 남기기도 한다.

<마치 유럽 같았던 가트 풍경>

현자의 가게를 지나 가트에 들어섰을 때 나는 또 다른 감동을 느꼈다. '여기가 인도 맞나?' 푸른 잔디와 쓰레기 하나 없는 깨끗한 길, 그리고 삼삼오오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까지 모두 낯선 풍경이었다. 우다이푸르는 정말 화수분 같은 매력을 가진 것 같다. 호수가에는 가족 단위로 온 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다들 어쩜 저리도 수영을 잘하는지. 어린아이들은 팔에 안전 튜브까지 차고 제대로 물놀이 중이었다. 남편은 그들을 바라보며 여기서 수영을 해봐야 인도 여행의 끝판왕이 될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들어가라고 했지만 혼자서는 영 용기가 나지 않았나 보다.

<수영도 하고 기타도 치고 우다이푸르에는 오늘도 여유가 넘친다>

구경을 하다 보니 누가 아는 척을 한다. 우리 앞집 사는 형제다. 고무로 만든 검은 튜브를 들고 수영을 하러 왔. 남편은 이때다 싶었는지 아이들한테 내일 수영하러 같이 오자고 한다. 애들이 좋다고 했지만 약속이 무의미한 인도에서 과연 저것이 지켜질지가 의문이다. 남편도 그 사실을 아는지 여전히 아쉬운 표정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여기서 남편과 같이 수영을 한다면 100명은 족히 넘는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다. 어우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다.

<아무도 없는 비수기 명당 레스토랑의 위엄>

수영은 구경만 실컷 하다가 7시쯤 저녁을 먹으러 집 근처의 '드림 헤븐 게스트하우스'의 루프탑 레스토랑을 찾았다. 성수기에는 모든 좌석이 꽉꽉 차는 그런 곳인데 오늘은 아무도 없이 휑하다. 아마 내일도 모레도 다음 달에도 이렇겠지. 비성수기 여행의 장점을 마음껏 즐기며 뷰가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 버터 치킨과 난을 주문했다. 버터 치킨은 버터 카레 안에 뼈 없는 닭고기를 넣어 만든 음식으로 난과 함께 먹으면 정말 끝내준다. 아직까진 한국에서 먹는 오뚜기 카레가 제일 맛있는 볼품없는 혀이지만, 이제 슬슬 인도 카레만의 담백하고 고소한 맛에도 물들어가는 중이다. 아마 인도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이 맛에 홀라당 빠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입에 착착 감기는 버터치킨과 쫄깃한 난의 환상궁합>

시원하지 않지만 저렴한 킹피셔도 한 병 시켜서 신나게 저녁을 먹는데 시시각각 눈앞 풍경이 달라진다. 해가 있는 동안은 이탈리아 베니스에 온 듯한 느낌이 들고, 어둠 속으로 하나둘 불빛이 들어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 영화 속 공간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역시 인도는, 특히 우다이푸르는 매력의 화수분이 틀림없다.

<해 아래의 풍경과 달 아래 풍경이 극명하게 나뉘는 우다이푸르>

낭만이 가득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니 게스트하우스 간판에 옹기종기 조명이 밝혀져있다. 이 골목 정말 정겹다. 앞집에 사는 귀여운 형제는 마주칠때마나 '안녕~'하고 인사를 한다. 아마도 우리가 묵는 라씨 게스트하우스를 한국인이 설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을 만든 그녀의 인도 이름이 바로 '라씨'.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녀가 학교 선생님인 동시에 여행책 '엔조이 인도'의 공동 작가이며,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능력자라는 이야기를 라몬에게서 들었다. 그래서 나는 라씨의 간판을 볼 때마다 너무나 놀라운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가 궁금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집에 가는 골목은 언제나 정겹다>

잠이 들고 아침이 오고, 우리는 또 성실하게 옥상으로 올라가서 조식을 맛있게 먹었다. 늘 똑같은 메뉴지만 아침을 누군가가 차려 준다는 것 자체가 좋다. 다 먹고 다시 방으로 가려는데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여자 두 명과 남자 두 명이 리셉션 앞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국분이냐고 물었고 맞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들은 이제 조식을 먹으러 올라가는 참이라고 했다. 나는 맛있게 먹으라고 하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뭔가 계속 아쉬우면서도 그들이 어떤 여행을 하고 있을까가 궁금했다. 결국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옥상으로 따라 올라갔고, 남편은 몸이 찌뿌둥하다며 달리기를 하러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와 이 날씨에 달리기라니. 정말 당신 인정.

<바나나 라씨 맛집 '소니네'의 귀염둥이 손녀>

아침밥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앉아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고 그동안 쓸 곳 없었던 한국말 퍼레이드를 펼쳤다. 상큼한 스물일곱 살의 두 여인은 유엔 델리 지부에서 일하고 있었고, 주말에 휴가 며칠 붙여 우다이푸르로 여행을 온 것이라 했다. 동그란 안경이 매력적인 스무 살 남자아이는 수양과 명상을 위해 인도 여행을 선택한 철학과 학도였고 듬직하게 생긴 스물일곱 살의 청년은 용접 일을 하는 기술 가진 남자로 직업 특성상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면 휴가가 길게 생기기 때문에 인도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다들 가진 이야기들이 아주 흥미롭다.

<릭샤에 몇명이 탄거니. 뒤에 너희 괜찮니?>

갑자기 구성된 재미있는 이 조합은 '소니네'라는 한식을 파는 곳에 가서 바나나 라씨 한잔씩을 들이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셀레브레이션 몰'에 가기로 했다. 릭샤를 이렇게 많은 인원과 함께 탄 건 처음이었는데 남자애들 둘이 뒤에 붙은 짐칸에 쪼그리고 탄게 인도인들한테 흥미로워 보였나 보다. 몰에 가는 동안 두 사람은 대통령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고ㅎㅎ

<당일치기 만남이었지만 강렬했던 네 친구들>

몰에서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으며 서로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특히나 스무 살 철학도의 에피소드는 정말이지 초특별했다. 델리에 처음 온 날 사기 여행사에 된통 걸려 백만 원 가까운 돈을 뜯겼는데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고. 수양차 왔으니 화를 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놓고 인도 배스킨라빈스에서 한 가지 맛만 주문 했는데 세 가지 맛이나 강매를 시킨 직원에게 아이스크림을 다시 통에 넣으라고 했다는 이야기에 다 같이 빵 터지고 말았다. 아이야 그게 화낸 거란다. 이외에도 어마어마한 에피소드들이 가득인데 그 친구도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이만해야겠다. 무튼 노곤한 일상에 번개처럼 찾아온 생기 발랄 네 친구들과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각자 떠날 시간이 다가와 아쉽지만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만나서 반가웠어 얘들아!

<세상 공손한 굿바이 시간>

젊은이들과 헤어지고 저녁은 치맥을 먹자며 숙소 옥상 식당에 마늘 후라이드 치킨을 주문한 뒤 기다리는데 또 반가운 이들에게 연락이 왔다. 네팔에서 만났던 지연 언니와 성범 오빠였다. 방금 우다이푸르에 도착하셨다고! 언니와 오빠는 바라나시로 들어가서 쭉 내려올 계획이었고 우리는 델리부터 시작이라 만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우연이 필연이 되어서 딱하고 들어맞은 것이다. 와. 오늘 정말 사람 만나는 날인가. 반가운 마음에 우리 숙소에 와서 같이 치맥을 먹자고 제안했고 언니 오빠는 흔쾌히 그러자고 하셨다.

<언니 오빠와의 재회(?) 기념 치맥 파티>

네팔 이후 보름 만에 다시 만난 것을 보면 정말 인연이지 싶다. 언니 오빠는 정말 유쾌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우선 회사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났다는 기본 명제가 같아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공감대가 형성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이야기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 그런 사람들을 이 넓고 넓은 타지에서 이렇게 우연히 또 마주치게 되다니. 세상에는 그냥 지나쳐 가는 우연이 참 많다. 하지만 좋은 사람과의 우연은 인연으로 만들고픈 욕심이 든다. 그래서 자꾸 연락을 하고 안부를 묻게 된다. 그들에게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이 그냥 스치는 우연이 아닌 인연이면 좋겠다. 여행 후에도 내 인생에 남는 그런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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