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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우다이푸르 세밀화 그리기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인도 #우다이푸르 #세밀화

#2017년5월27일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우다이푸르>

오늘도 일찍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시원한 방에서 한나절을 보내다가 오후 2시쯤 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막상 나와보니 또 너무 덥다. 다시 들어가자니 갑갑하고 해서 호수 옆에 위치한 진저 카페로 발걸음으로 옮겼다. 진저 카페는 테이블이 몇 개 없는 작은 공간이지만 호수가 잘 보이는 커다란 창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 늦은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밀크셰이크를 주문했다. 맛은 뭐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다시 사 먹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인도는 대부분의 음식이 채식 아니면 치킨이라서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이 있다. 샌드위치에 햄이 없다니. 동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철저한 육식 주의자로서 이것은 정말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우다이푸르 곳곳에는 아름다운 세밀화가 가득이다 >

창 밖에 반짝이고 있는 저 호수는 사실 물이 별로 깨끗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매일 가트에 나와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수영을 한다. 한 간에는 세탁기보다 호수에서 빨래꾼이 빨아다 주는 것이 더 깨끗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뽀송한 침대 시트도 아마 그들이 빨아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전 같았으면 찝찝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그럴수도 있겠거니 한다.사람은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살아가니 말이다.

<카페 안에서 바라 본 우다이푸르 호수의 평화로움>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통해 배우는 새로운 삶의 방식들이 좋다. 익숙하지 않아서 생기는 불편함 정도는 일종의 수업료라 생각한다. 대신 그들은 나의 지협적인 상식을 깨고 '그럴 수도 있구나'의 범위를 넓혀준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하고 나 자신에 대한 발견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여행은 지금껏 내가 만난 인생의 스승 중 가장 존경할 만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할인은 노노, 인증샷은 예압>

두 시간 정도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다 엽서를 사기 위해 상점을 찾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거나 문만 열려있고 주인이 없다. 하긴 오후 3시 반이니까 아직 다들 낮잠 중일 것이다. 다음에 사면되지 하고 돌아가려는데 막 낮잠을 마친 것 같은 얼굴로 엽서 가게 아저씨가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따라 들어가 열심히 빈티지 엽서들을 골랐다. 누군가가 사용했던 낡은 엽서 위에 세밀화를 그려 파는 우다이푸르만의 독특한 엽서. 한 장에 50루피(약 800원)로 인도 물가 치고 저렴한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에게 편지 보낼 때 쓰려고 8장을 샀다. 조금 깎아달라고 했지만 대쪽 같은 아저씨는 정가 그대로를 받으셨다.

<정교하게 그려진 세밀화들은 액자에 담아 판다>

날씨가 너무 덥다 보니 기존에 가진 도톰한 면티를 입으면 자꾸 땀띠가 난다. 그나마 델리에서 산 펄렁 바지가 시원하고 빨아도 잘 말라서 애용하고 있었는데, 빨래 몇 번에 구멍이 뻥뻥 뚫려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기울 수도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리기로 하고 옷 쇼핑에 나섰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인도 여자들이 즐겨 입는 펀자비를 사고 싶었는데ㅎㅎ 결코 계획한 일은 아니다. 내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남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한다. 여하튼 옷을 사러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가격을 물었는데 옷감이 좀 좋아 보인다 싶으면 700~800루피(약 12,200~14,000원)를 부른다. 이렇게 비싼걸 냉큼 살 수 없기에 이 골목 저 골목을 뒤지고 다녔다. 쇼핑할 때는 더위도 마다하지 않게 만드는 이 열정. 칭찬해.

<자른 부분으로 반바지도 만들겠는걸>

그렇게 발견한 펀자비 가게. 아저씨는 10년째 이곳에서 옷을 만드는 장인이셨다. 나는 밖에 걸렸던 파란색 펀자비를 골랐는데 입어보니 살짝 큰 느낌이었다. 그래도 얼추 잘 맞는 데다 소재가 진짜 시원해서 사기로 했다. 가격은 흥정해서 450루피(약 7,800원). 치수를 재고 직접 옷감을 골라 맞춤형으로 제작해도 가격은 동일하다. 남편은 인도 왕자가 입을 것 같은 화려한 바지 하나를 득템 했다. 바지 기장이 길었는데 3분 만에 수선해주셔서 바로 입고 나갈 수 있었던 점도 굿. 입어보고 좋으면 다음에 다시 와서 한 벌 더 맞춰야겠다.

<세밀화 장인 나로땀 아저씨>

쇼핑하느라 땀을 너무 많이 흘려 급 피곤해진 우리는 곧장 숙소로 돌아가 씻고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저녁 7시 드디어 두근두근 세밀화 수업을 받으러 옥상으로 올라갔다. 잠시 기다리니 30년 경력의 세밀화 장인 나로땀 아저씨가 각종 도구들을 들고 나타나셨다. 아저씨는 가지고 오신 재료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으시고 스크랩 북을 펼쳐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고르라고 하셨다. 남편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깃털이 아름다운 공작새를 골랐고 나는 낙타를 골랐다. 그림을 고르자 선생님은 대충 외곽선만 있는 밑그림을 그려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밑그림을 따라 디테일한 선들을 그리라고 연필을 건네셨다.

<한땀한땀 그려나가는 세밀화 꿈나무.>

아... 나는 왜 낙타를 고른 것인가. 낙타는 다리가 왜 이렇게 복잡한 것인가. 시작한 지 5분 만에 인중에 땀이 나기 시작하며 낙타를 고른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반면 남편은 지나치게 잘 하고 있었다. 선생님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고, 지나가던 직원 로카로 처음 하는 것이 맞냐며 놀랐다. 하지만 내 그림을 보고는 모두들 말을 아꼈다.

<선생님 저도 좀 봐주세요. 여기요, 닭 아니고 낙타요.>

어영부영 밑그림이 끝나고 세밀화의 핵심인 얇은 붓으로 색칠하기 단계에 돌입했다. 하나의 색을 붓에 바르고 그 색이 들어가는 부분을 모두 칠한 뒤 또 다른 색을 붓에 발라 남은 부분들을 칠해준다. 나로땀 선생님은 우등생인 남편의 옆에 서서 집중 지도를 시작하셨다. 나는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끼며 꿋꿋하게 낙타와의 사투를 벌였다. 분명 선생님이 보여주신 예시 그림에는 낙타 다리가 요염한데, 내 그림은 점점 닭다리가 되어간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린 덕에 완성은 할 수 있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낙타와 위풍당당 공작새>

나로땀 선생님은 고고하고 세밀한 남편의 공작새와 뒷다리가 이상한 나의 낙타 그림에 멋지게 이름을 적어주셨다. 비록 좀 부족한 티가 나는 작품이지만 완성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강박은 나에게 쥐약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세밀화라는 장르에 대해 처음 배우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샘플 그림을 참고로 자유롭게 그려보라고 했다면 적어도 긴장은 덜 했을지 모른다. 사실 똑같이 못해도 나를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그 '똑같이'라는 강박이 조금 있던 능력마저 빼앗아 간 기분이 들었고, 재미있자고 한 일에 나 답지 않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동안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그래도 얼핏보면 그럴싸한 우리의 첫 세밀화!>

세밀화도 그리고 몰랐던 또 다른 나도 발견할 수 있었던 흥미로운 시간의 마지막은 역시 인증샷. 자리를 정리한 뒤 똥손을 위해 애써주신 나로땀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져온 그림을 다시 한번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원근이 무시된 낙타 다리를 보니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남편은 쑥스러워했지만 자신의 공작이 멋지다는 것을 아는 눈치다. 여하튼 오늘도 빈둥빈둥 알차게 잘 보냈다. 이렇게 충실하게도 나만을 위한 시간을 언제 또 누려 보겠는가. 더위에 땀띠에 채식 위주 식단에 여러 가지로 거친 상황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동공 흔들어가며 잘 놀아야겠다.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았을 때 후회 없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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