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인도 #뭄바이 #차트라파티시바지역
#뭄바이지하철 #피닉스몰 #인도풍경
#2017년6월10일~13일
뭄바이 우리 집 근처에는 오래된 기차역 하나가 있다. 그곳의 이름은 '차트라파티 시바지 역 Chhatrapati Shivaji Terminus'. 1888년에 건축된 이 역은 유네스코에 등재될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 양식을 자랑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런 곳을 지날 때마다 흥미로운 전설 하나씩을 상상해 본다. 영국인 건축가와 인도 여인의 안타까운 로맨스라든가 시계탑에 얽힌 공포 스릴러 같은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도심을 걷는 것이 한층 흥미진진 해진다. 보통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한 역사를 공부 하지만, 심심할 땐 가끔 이렇게 각자가 지어 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심심풀이 땅콩이라 늘 스토리 라인이 괴상하게 흘러가지만 말이다.
오늘은 늘 밖에서만 보던 역 안으로 들어가 전철을 타기로 했다. 가격은 10루피(약 170원). 우리가 타야 할 전철이 막 떠나려고 해서 급히 첫 번째 칸에 올라탔는데 여성 전용 칸이라고 남편보고 내리란다. 당황한 남편은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 전철에서 펄쩍 뛰어내렸고, 나도 따라 뛰어내렸다. 열차가 조금 더 빨랐으면 발목이 접질렸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둘 다 멀쩡했고, 그 모습을 본 기사님은 열차를 세우고 우리가 다시 탈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뭄바이의 전철은 문을 열고 달린다. 그리고 이곳의 젊은 남성들은 활짝 열린 문 앞에 매달려 가는 것을 좋아한다. 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매달려 있다가 밖으로 몸을 쭉 빼기도 한다. 보는 내가 다 조마조마한 광경이다.
이런 것만 빼면 전철은 여느 때처럼 역에 멈추어 사람을 태우고 또 다음 역으로 향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한 역에서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동생을 업고 전철에 올랐다. 아이는 우리에게 다가와 배가 고프다는 듯한 손짓을 했다. 평소에는 구걸하는 이들에게 절대 돈을 주지 않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10루피짜리 한 장을 건넸다.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었지만 아이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아마도 저 돈이 아이의 주림을 해결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을 데려다가 본격적으로 앵벌이를 시키는 나쁜 어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나는 그저 꼬깃꼬깃한 10루피 한 장을 건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떨쳐낼 수 없는 무력감을 안고 목적지인 '피닉스 몰'에 도착했다. 뭄바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쇼핑몰이라는 수식어만큼이나 인테리어가 아름다웠다. 몰 안을 걷는 사람들은 가난이 무엇이냐는 듯한 차림으로 도도하게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밖은 더위가 한창인데 쇼핑몰 안은 오히려 춥다. 나도 이 추위가 반갑고 좋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자꾸 죄책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쇼핑몰에는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작은 놀이공원도 마련되어 있었다. 꼬마 기차를 타고 엄마 아빠에게 손을 흔드는 아이를 보니 아까 전철에서 만난 소년이 떠올랐다. 가난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벌을 받는 듯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가난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신분 이동을 제한하는 사회 속에서라면 그런 희망도 사치가 된다. 이것은 인도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매일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누구는 부족함이 없어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는 동안 누구는 생리대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다.
시원한 쇼핑몰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다시 전철을 타러 역으로 향하던 중 수박 노점상에 잠시 들렀다. 과일 중 수박을 가장 좋아하는 남편이 한 접시 사 먹고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수박 장수 아저씨는 돈 받던 맨손으로 수박을 조각조각 열심히 자르셨고, 손에 묻은 수박 국물은 걸레 같은 수건에 쓱쓱 문지르셨다. 배탈이 난 이후로 물음표가 백개 정도 뜨는 위생상태 때문에 노점에서 파는 것은 거의 사 먹지 안 던 터라 약간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면역력이 생겼을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잘 익은 수박 한 접시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가격은 10루피(약 170원).
우연히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곳에서는 인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돼지고기 튀김 요리와 소고기 찹스테이크를 만났다. 당연히 맛없을 수 없는 맛. 심지어 찹스테이크에서는 불고기 덮밥 맛이 났다. 감격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 쉬려는데 며칠 전부터 슬슬 올라오던 땀띠가 미친 듯이 가렵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한국에서 가지고 왔던 벌레 물린데 바르는 연고를 열심히 발랐지만 효과가 없었다. 다음 날이 되니 몸통 전체로 퍼져 버린 땀띠. 덥고 습한 밖으로 나가면 더 심해질까 봐 그로부터 이틀간 숙소에서의 칩거 생활이 이어졌다. 남편은 날 위해 직접 찍은 두드러기 사진을 들고 약국에 가서 알레르기 약도 사다 주었다. 약을 먹으니 가려움은 좀 사라졌지만 여전히 온몸이 땀띠 투성이다. 윽.
며칠간의 휴양을 마치니 어느새 인도를 떠나야 할 날이 다가왔다. 드디어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그 날이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린 인도와의 이별이 조금은 아쉬워야 하지만 왜인지 마구 신이 났다. 더위와 배탈과 이런저런 질병에 너무 고생을 했던 탓일 것이다. 그래도 '다시는 안 와'보다는 '겨울에 다시 오고 싶다'로 끝을 맺게 됨에 감사하다.
비행기 시간이 새벽이라 숙소 리셉션에 짐을 맡기고 스타벅스에 갔다. 한 4시간 정도 시간을 보낸 뒤 숙소로 돌아가는데 찜콩만 해두고 잊고 있었던 라씨 맛집이 보였다. 나는 20루피(약 340원)를 내고 경건한 마음으로 유리컵 한잔 가득 담긴 라씨를 받아 들었다. 마지막이구나. 이 가격, 이 맛, 이 퀄리티. 떠나는 것이 마냥 신났는데 라씨와 짜이를 생각하니 아쉬움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한 수저 떠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히다. 라씨가 별로 안 땡긴다는 남편에게 엄지를 척 세워 보여주고는 왕창 들이켜기 위해 컵을 입에 가져갔다. 그 순간 컵 기울기를 저지하는 단호한 남편의 손. '치사하게 다 먹냐?'. 안 먹는다길래 원샷 때리려다가 딱 걸렸다.
숙소에 돌아가 맡겨둔 짐을 찾고 우버를 불렀다. 역시나 합리적인 가격 굿. 공항 앞에 도착하니 출발 시간까지 8시간이나 남았다. 인터넷에서 본 누군가의 후기에 따르면 뭄바이 공항은 비행기 출발 4시간 전부터만 로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권이랑 티켓만 검사 한 뒤 그냥 들여보내 주었다. 그 덕에 티켓팅이 시작될 때까지 시원한 실내에 앉아 미드도 보고 과자도 먹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장장 한 달 간의 인도 여행을 마치고 이름부터 낯선 대륙 아프리카로 떠난다. 아프리카는 365일 더울 것 같지만 지금 가면 겨울이라 우리나라 가을 날씨쯤 된다고 한다.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풍문으로 듣기만 했던 아프리카는 또 어떤 반전들을 보여줄까. 소풍 앞둔 초등학생처럼 두근대는 이 마음. 이제, 아프리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