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아프리카 #탄자니아 #세렝게티국립공원
#케냐 #나이로비 #2017년7월7일~11일
새벽 7시. 황금빛 자락을 길게 늘어트리며 하늘로 날아오른 태양이 풍요로운 대자연의 품 속으로 천천히 내려앉는다.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세렝게티의 아침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있다. 새로운 하루를 선물 받은 모든 생명들이 기쁨으로 삶을 시작하는 시간. 우리는 또다시 그들을 만나기 위해 초원을 달린다.
암사자가 크게 하품을 하며 저 멀리 초원의 지평선을 바라본다. 이미 아침을 먹은 것일까 입맛까지 다시며 앉아 있는 모습이 한껏 여유롭다. 세렝게티에는 정말 사자가 많다. 다른 국립공원에서는 한참을 찾아다녀야 겨우 만날 수 있었는데, MSG 조금 치고 말하면 이곳에서는 인도의 소만큼이나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수사자를 만난 적이 없어 아쉽다. 그 멋진 갈기를 한 번 봐야 하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아침이다 보니 식사 중인 동물들이 많다. 초원의 청소꾼 하이에나도 아침부터 걸걸하게 고기를 뜯는다.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윽' 소리가 날 정도로 살벌한 녀석의 식사. 그런데 아까부터 하나도 안 반가운 손님 한 분이 하이에나 곁에서 알짱대신다. 번호표라도 뽑았는지 당당하게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의 눈빛. 그 눈빛에 엄청나게 경계를 하면서도 먹을 건 다 먹는 하이에나도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체할 듯.
먹이 사슬 아래 지방에 거주하시는 초식 동물들도 역시나 아침 식사가 한창이다. 긴 기럭지를 자랑하는 기린은 높은 나무 위에 매달린 나뭇잎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런 기린의 등에는 반상회라도 하는지 작은 새들이 쪼로록 앉아 수다가 한창이다. 어쩌면 새소리로 생음악을 즐기고 싶어서 라이브 밴드를 불러다 태우고 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 기린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라 가끔 동물원에 찾아가 보고 오곤 했는데, 그 때문에 기린이 큰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줄 안 것이다. 하지만 기린은 원래 혼자 또는 둘셋의 작은 무리만을 만들며 세력권은 형성하지 않는단다. 그리고 저 평화주의자 같은 얼굴로 다른 기린들이랑 싸우기도 한단다. 긴 목을 휘두르면서 머리로 상대방을 친다고;; 이래서 사람이나 동물이나 얌전한 존재들은 잘못 건드리면 절대 안 되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 풀 뜯으러 나온 아기 임팔라도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밥을 먹는다. 안타깝게도 임팔라와 가젤은 세렝게티의 모든 육식동물들에게 잡혀먹기 가장 쉬운 운명을 타고 났다. 하지만 이렇게 잡아 먹힐 수밖에 없는 존재들도 당당히 생태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살아간다. 이곳 세렝게티의 모든 생물들은 히어로처럼 누구나 특장점 한둘씩은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임팔라와 가젤도 우사인 볼트 뺨치는 달리기 실력과 소머즈 저리 가라인 청력을 가졌다. 이렇게 모두가 어벤저스이기 때문에 탄탄한 먹이사슬이 지금껏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렝게티는 오늘도 평화롭다.
'트럭들이 많이 모인 곳에는 엄청난 것이 있다.' 이것은 사파리의 변치 않는 진리이다. 우리도 트럭들이 떼를 지어 모여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처음에는 뭘 보는 것인지 잘 파악이 안 되지만 모두의 카메라가 향하고 있는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이번에도 사자다. 하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수사자다. 그것도 살벌하게 아침 식사 중인 수사자와 암사자 무리들 말이다!
피를 묻힌 채 입을 커다랗게 벌리는 모습은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수사자는 풍성한 갈기를 바람에 흩날리며 보란 듯이 갈비가 성성한 고기를 뜯어먹었다. 오 진짜 야생 중의 야생이로구나. 잠시 후 다가온 암사자도 그의 곁에 앉아 바람을 맞는다. 덕심을 자극하는 완벽한 커플 화보의 탄생. 찢어발기지 않는다면 하나 인쇄해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존재들이었다.
사자 커플을 지나 이동하다 보니 아까보다 더 많은 트럭들이 멈춰 서 있는 포인트가 나타났다. 우리도 차를 세우고 뭐가 있나 주변을 둘러보는데 바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한 무리의 어미 사자들이 새끼를 잔뜩 데리고 트럭 사이에 앉아버린 것이다. 세상에나. 어미 사자들은 우리 트럭과 열 걸음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새끼들을 핥아 주기도 하고 젖을 먹이기도 했다. 대박이다!
하지만 진짜 기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갑자기 어미 사자들이 일어나 다 함께 우리 트럭 옆으로 이사를 와버린 것이다. 내가 앉아있던 차창 바로 앞에 거대한 암사자가 자리를 잡고 눕자 귀여운 아기 사자들이 그르렁 소리를 내며 셋넷씩 어미를 찾아 몰려왔다. 방금 거하게 아침들을 먹었는지 하나 같이 배가 빵빵하다. 좀 전에 지나왔던 수사자의 식솔들인가 보다.
새끼여도 입가에 피가 묻은 것을 보니 사자는 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직 영글지 못한 가릉릉거리는 울음소리는 영락없이 고양이 같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들을 보기 위해 창밖으로 몸을 쑥 내밀었다가 '아, 여기 야생이지'라는 생각이 들어 창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뻑뻑한 창문이 조용히 닫힐 리 없었다. 끼이익. 창문에서 쇳소리가 나자 커다란 암사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소오름. 만약 그들이 배불리 밥을 먹은 뒤가 아니었다면 내가 오늘의 아침 식사가 됐을지도 모른다.
다시없을 짜릿한 경험을 뒤로하고 세렝게티를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왜 이렇게 가격이 비싸냐며 투덜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왜 이렇게 비싼 줄 알겠다며 머리를 끄덕인다. 이 대자연이 본래 모습 그대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밀렵을 하는 나쁜 사람들로부터 동물들을 지켜야 하고, 자연적으로 발행하는 화재들을 진압해야 하며, 멸종 위기의 동물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게 보호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비용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세렝게티로부터 지불한 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감동을 받았다. 지금껏 내가 동물을 만났던 곳은 인간이 주인공인 동물원에서였다. 하지만 이곳 세렝게티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이다. 태초의 모습 그대로 본래 있어야 할 곳에 선 그들의 모습은 참 보통스러웠다. 마치 우리가 헝클어진 머리에 늘어난 파자마 차림으로 집에서 휴식을 취하듯 그들도 어떤 '척'할 필요 없이 편안해 보였다. 아마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있는 모습 그대로일 때가 스스로에게 가장 건강한 상태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우린 늘 동물원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더 사랑받고 인정받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렝게티로 가야 한다. 타인의 눈으로 완성되는 내가 아닌 나 스스로가 이미 완성인 그런 곳으로 말이다. 우린 조금 더 건강한 삶을 살 필요가 있다. 이곳 세렝게티의 멋진 동물들처럼!
이틀간의 즐거웠던 세렝게티 투어를 마치고 다시 아루샤에 있는 스네이크 파크 캠프 사이트로 돌아왔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함께 가지 않았던 멤버들에게 세렝게티 무용담을 풀어놓았다. 그때 린다가 '린다 타임'을 외쳤다. 이 말이 떨어지면 공지 사항이 있다는 얘기로 모두 집중을 해야 한다. 모두가 조용해진 틈을 타 린다는 그동안 자신을 따라 긴 여행을 함께 잘 마쳐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응? 마쳐? 맞다. 그녀의 말처럼 오늘이 트럭킹 멤버들과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21일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갈 줄은 몰랐다.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받던 남편은 늘 오늘만을 기다려 왔지만 막상 닥치니 아쉬운가 보다.
모두들 돌아가며 가장 좋았던 점과 처음 자기소개 시간에 나누었던 기대 사항들이 이루어졌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 린다가 깜짝 고백을 한다.
'얘들아, 사실 나 빅토리아 폴스에서 케냐까지 이끄는 일정은 처음 담당해본 거였어'
음. 그럴 줄 알았다. 왠지 세렝게티 가기 전 준 정보들이 다 안 맞더라. 가면 음료 사 먹을 Bar도 없고 수영할 곳은 더더욱 없고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말만 했는데, 첫날 묵었던 카라투에 엄청 큰 수영장이 있었다. 심지어 세렝게티 캠프 사이트에는 맥주와 음료들을 실은 이동식 Bar가 왔다는 사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처음이라 부족했던 점이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달라고 했다. 하긴 스물여섯의 나이에 이렇게 큰 그룹을 이끌고 3주 동안 대륙을 종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직업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모두의 한 마디가 끝나고 남편과 나는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Bar에 갔다. 이곳은 인테리어가 참 특이한데 방문객의 소지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마치 서낭당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곳곳에 적혀 있는 문구가 아주 재미있다.
'No Wifi. Talk to each oter! Call your mom! Pretend it's 1993 live!'
'와이파이 없으니까 서로 대화나 해! 엄마한테 전화도 좀 하구! 1993년도처럼!'
'SAVE WATER, DRINK BEAR'
'물은 아끼고, 맥주는 마시자'
아침 일찍 일어나 마지막으로 텐트를 접는다. 이 귀찮은 짓도 끝이구나. 아쉬움을 뒤로하고 트럭에 올라 케냐로 향한다. 케냐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안정적인 편이어서 아프리카 내에서는 나름 잘 사는 국가에 속한다. 때문에 그곳 출신인 린다는 매일 같이 자국 자랑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오바마의 부모님도 케냐 출신이라며 말이다. 그러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인물은 누구냐고 묻길래 김연아를 들었더니 모른단다. 모름 말구ㅋ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해 우린 떠날 채비를 하고 멤버들은 다시 텐트를 친다. 내일 이곳에서 바로 공항에 가는 사람도 있고, 여자 친구와 합류해 또다시 트럭킹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내에 위치한 숙소에서 3일을 더 지낸 뒤 두바이로 향할 예정이다. 멤버들과 아쉬움의 작별 인사를 나누고 린다가 불러준 우버 택시에 짐을 실었다. 그동안 함께 해서 즐거웠고, 모두들 건강하세요!
나이로비 시내에는 할 것과 볼 것이 참 없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3일을 더 머물기로 한 것은 순전히 트럭킹 일정이 지연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트럭킹은 너무나도 제때 끝나버렸고, 우리의 두바이행 비행기는 이미 3일 뒤로 예약이 끝난 상황. 그래서 우리는 이 3일의 시간을 자체 휴가로 사용하기로 했다. 뒤꿈치에 여전히 남아 있는 성게 가시도 좀 어떻게 해보고 말이다.
폭신한 침대에서 늦게까지 잠을 자고 커피가 맛있기로 유명한 자바 하우스에 가서 레모네이드와 아이스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거리로 나와 이곳저곳을 기웃대기 시작했다. 나이로비의 도시 풍경은 정말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발전된 모습이었다. 화려한 그라피티를 입은 버스들은 곧 출발할 채비를 하느라 분주했고 거리는 상점들로 가득했다. 슈퍼에 들어가 물가를 살펴보니 약간 비싼 편이다. 이 와중에 오리온 초코파이가 있다. 가격은 우리나라 돈으로 1,700원 정도.
그렇게 한 번 밖에 다녀온 뒤 이틀간은 숙소 안에서만 지내며 워킹데드 시즌 3 몰아 보기를 감행했다. 구내식당에서 파는 음식들이 너무 맛이 없어서 결국은 치킨과 피자를 사러 다시 한번 나가야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프리카라는 대륙에서 보낸 지난 3주의 간의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마치 처음 걸음마를 하는 아이처럼 나는 한 발 한 발을 설렘으로 내디뎠다. 그래서 매일이 새로웠고, 배움이었다. 무지와 편견이 조금씩 깨져 나가는 것은 여행의 중요한 정화 작용 중 하나이다. 이미 인생의 때가 꼬질꼬질한 어른에게 더더욱이나 여행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프리카는 나에게 참 좋은 시간이었다. 인생의 때도 빼고 광도 내는, 그런 빛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