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우크라이나 #키예프 #장모님의나라
#소피아 성당 #황금문 #2017년7월16일~18일
오세아니아 대륙을 시작으로 아시아, 아프리카를 거쳐 드디어 밟게 된 네 번째 대륙 유럽. 그중에서도 우리가 선택한 첫 번째 나라는 바로 '우크라이나'이다. 이곳을 유럽 첫 나라로 결정한 이유는 단순했다. 두바이에서 출발하는 우크라이나행 비행기가 1인 11만 원으로 아주 저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표를 사고 나니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 한 가지 있구나. 김태희가 밭을 갈 정도로 미녀가 많다는 것.
사전 지식 하나 없이 순수 그 자체로 첫 발을 내딛게 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는 내가 생각했던 유럽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건물들은 하나 같이 회색빛이었고 호스텔 가는 길에는 군차량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상점 유리창에는 낯선 문자들이 가득했으며, 그 와중에 호스텔은 지하였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 안으로 들어가니 화룡점정으로 무뚝뚝한 표정의 직원이 리셉션에 앉아 있었다. 음 이 삭막한 첫인상은 뭐지.
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체크인을 진행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호스텔 내부는 거슬릴 만큼 조용했고, 그 고요함이 그녀의 표정을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인적사항을 다 적고 나자 그녀는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았으니 오후 1시에 침대와 락커를 배정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별도로 준비된 공간에 짐을 맡길 수 있게 해주었다. 분명 표정과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슬금슬금 느껴지는 이 친절함. 뭔가 냄새가 난다. 츤데레 냄새!
침대 배정받기까지 대략 6시간이 남은 우리는 호스텔을 나와 아침을 먹기 위해 근처 도미노 피자에 갔다. 나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 직원에게 영어와 바디랭귀지로 주문을 했고, 직원은 러시아어를 전혀 못하는 나에게 오로지 러시아어로만 이야기했다. 그래도 끝까지 내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이것저것 손으로 가리키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또다시 츤데레의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다. 피자도 겉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었지만 꼬다리 빵만 먹어도 풍미가 느껴지는 엄청난 퀄리티를 자랑했다. 거기다 미디움 한판+맥주 한 캔+콜라 한 캔이 172흐리브나(약 7,740원)로 가격까지 합리적이다. 도착해서 이제 아침만 먹었을 뿐인데, 매력이란 것이 폭발한다.
밥을 먹고 거리를 조금 어슬렁대다 호스텔로 돌아가니 침대와 사물함 배정이 끝나 있었다. 우리는 안내받은 자리에 짐을 풀고 낮부터 잠을 자기 시작했다. 호스텔이 지하여서 그런지 불을 켜지 않으면 지금이 몇 시인지 당최 가늠이 안됐다. 그래서 키예프에서의 첫날은 장독에 담긴 묵은지처럼 침대에 푹 파묻혀 하루를 보냈다. 역시 밤샘 비행의 피로는 치명적이다.
둘째 날 아침, 본격적인 키예프 탐방을 위해 호스텔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우크라이나의 버스에는 태국처럼 직접 돈을 받고 티켓을 발급해주는 직원이 상주해 있었다. 가격을 물어보니 4흐리브나(약 180원)란다. 엄청난 저렴함이다. 게다가 티켓도 예쁘다. 이렇게 받은 티켓은 버스 기둥에 달려있는 확인 기계에 넣고 꾹 눌러 탑승했다는 표시를 남겨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재탕 삼탕으로 티켓을 쓰면 나중에 불시 검문에 걸려 벌금을 내야 할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한다.
본격 탐방에 앞서 우크라이나에 대해 조금 검색을 해 보니 1922년 구소련 연방국 중 하나였다가 1991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현재의 독립 국가가 된 곳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역시 알게 모르게 풍겨 나오던 러시아스러움이 나만의 착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버스가 도심으로 향할수록 우크라이나만의 독특한 매력들이 하나둘씩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만난 키예프의 랜드마크는 노란색 건물 위로 파란색 돔을 얹은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아름답게 서 있는 이 성당은 얼핏 보면 유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여타의 다른 성당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종교의 차이이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 Christianity'라고 하면 대한민국 도처를 장악한 빨간 십자가를 단 교회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실 '기독교 Christianity'는 세 가지 종교를 통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기독교 Christianity'
1. 가톨릭(천주교)
2. 동방정교회(그리스 정교회)
3. 개신교(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
우선 이 구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양분되면서 서쪽에서는 기존 교황청을 중심으로 '가톨릭 Catholicism'이 이어지고,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 정교회 Eastern Orthodox'라는 새로운 종파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16~17세기가 되고, 이때 가톨릭이 면죄부나 천국행 티켓을 판매하는 등의 부정부패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마틴 루터 킹이 종교 개혁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개신교 Protestantism'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후 현재까지 이 세 개의 종교는 공통적으로 '성경 Bible'을 기준으로 유일신인 '하나님 GOD'을 믿고 있지만 주장하는 핵심 교리가 다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톨릭은 천주교라고 칭하고, 개신교는 기독교라고 칭하기 때문에 조금 헷갈리지만 기본 갈래는 이렇다고 보면 된다.
결론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성당들은 보통 '동방정교'의 예배당이라는 것이다. 이걸 설명하려고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왔더니 힘들다;; 무튼 이곳에서는 국민의 75%가 '동방정교'를 믿기 때문에 어딜 가나 성당이 참 많다. 우리는 키예프의 잘 가꾸어진 거리들을 걷고 또 걸으며 서유럽과는 또 다른 이곳 성당의 매력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광장을 끼고 서있는 성소피아 대성당에는 커다란 종탑도 있었는데, 그곳에 올라가 키예프 시내를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거리는 한산했고, 저 멀리 성 미하일 황금돔 수도원이 반짝였다. 크림색 건물 위에 무신경하게 올려진 녹색 지붕 그리고 설명이 필요 없는 파란 하늘은 바쁘게 흘러가는 삶의 시간을 잊게 해주었다. 그렇게 잠시 과거도 현재도 아닌 오묘한 시간 속에 놓인 채 오늘의 낯섦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했다.
종탑에서 내려와 찾아간 곳은 그 이름도 찬란한 '황금 문 Golden gate'. 키예프 대공국 시절 사용하던 성문인데 현재 성벽은 사라지고 문만 남아있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성문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중간중간 뚫려있는 감시용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누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절대 눈치챌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이 성문 꼭대기에 작은 성당이 있다는 것이다.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를 신과 함께 지키고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걸까. 특별한 설명이 없어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덕에 또 한번 이런저런 상상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반갑다.
하루 종일 도심을 바쁘게 누볐지만 키예프의 볼거리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 그래서 하루를 더 투자해 '페체르스크 수도원 Pechersk Lavra'을 방문했다. '페체르스크 수도원 Pechersk Lavra'은 '동굴 수도원'이라고도 불리는데, 옛날 수도사들이 이 수도원 안에 위치한 동굴에서 수도를 했기 때문이다. 여러 성인들로 장식되어 있는 수도원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드넓은 부지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소박한 성당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잠시 후 번쩍번쩍한 황금색 돔을 자랑하는 화려한 성당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들어선 성당 내부에는 성인들의 그림이 가득했다. 천장과 벽 그리고 기둥까지 곳곳에 그려진 이 성인들의 그림은 '아이콘 Icon'이라고 불리며 '동방정교회' 성당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이다. 그들은 이 그림을 신과의 소통의 매개체로 여기기 때문에 성당에 들어서면 유리함에 보관된 그림에 입을 맞추고 손수건으로 닦는 간단한 기도 의식을 진행한다. 우리가 성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도 단정히 머릿수건을 한 여성분이 아이콘에 입을 맞추며 기도를 하고 계셨다. 그녀의 소박한 옷차림과 화려한 실내 장식이 만들어내는 극명한 대비가 참 인상 깊었다.
성당 한 켠에는 성물들을 판매하는 작은 상점이 있었는데, 그 옆에 석고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어 다가가 보았다. 설명은 영어도 아닌 우크라이나어. 도대체 이게 무엇일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제목으로 추정되는 글씨 밑에 점자가 쓰여있다. 점자를 보고 옆에 놓인 석고 그림을 보니 이것이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그림을 손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나. 신박하다. 우리나라에도 도입이 시급하다!
손으로 볼 수 있는 그림 전시를 보고 한 차례 거한 감동을 받은 뒤 동굴 수도원의 하이라이트인 동굴로 향했다. 가는 길 멋들어진 성당들을 몇 개나 더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감탄하며 바라본 것이 있었으니, 바로 '밭 가는 김태희'들이었다. 이곳 우크라이나에서는 길을 건널 때 내 옆에 미란다 커가 있고, 화장실에 가면 엠마 스톤이 있다. 카페 알바생이 커피를 건네는데 눈을 들어 얼굴을 보면 제니퍼 로렌스다. 실제 헐리웃 여배우들 못지않은 엄청난 파워 미모와 몸매를 소유한 우크라이나의 언니들. 나보다 다들 어리겠지만 예쁘면 그냥 다 언니다. 오죽했으면 네이버에 우크라이나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장모님의 나라'가 뜨겠는가ㅋ
그런데 한참을 가도 동굴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입구가 어디일까. 검은 수도복을 입고 지나가는 수도사님을 붙잡고 어디가 동굴이냐고 물으니 집처럼 생긴 곳을 가리키신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많은 사람들이 방문 규정에 맞추어 몸빼 치마와 머릿수건을 착용하느라 분주하다. 나도 몸빼 치마 하나를 얻어 입고 드디어 동굴 안으로 입장. 비좁은 길을 따라 한 줄로 서서 천천히 들어가다 보니 작은 공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놀랍게도 동굴 안에서 수도를 하다 자연 미라가 된 수도사들의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투명한 관 속의 수도사들은 온몸이 가려져 있었지만 손하나는 배 위에 올려 있었고, 신자들은 관 위에 입을 맞추고 기도를 했다. 동굴 속 어둠은 오롯이 촛불의 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기나긴 기도 행렬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결국 우리는 그 경건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오분만에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비록 나와 종교는 달랐지만 이곳 수도사들이 가졌던 강한 신념과 믿음에 존경을 표한다.
수도원을 빠져나와 근방에 위치한 전쟁 기념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는 길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소재의 묵직함에 비장한 표정들이 더해져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했다. 비록 이곳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지만 전쟁이란 것은 언제나 비극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는 각종 미사일부터 비행기까지 다양한 전쟁 관련 물건들이 놓여 있었고, 메인 건물 위로는 무게만 대략 530톤에 달한다는 거대한 '조국의 어머니상 Motherland Monument'이 세워져 있었다. 어머니상 오른손에 들린 검은 12톤이나 되는데 원래 이 검의 끝이 키예프에서 가장 높은 위치였지만 인근 동굴 수도원의 종탑보다 높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조금 잘려 나갔다고 한다. 우리는 공원 한편에 앉아 구름 낀 하늘을 등에 업은 비현실적 크기의 동상을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몸집의 크기만큼 거대한 그녀의 시선이 굉장히 부담스러웠지만 말이다.
어마어마한 동상과의 데이트를 마친 뒤 저녁을 먹기 위해 KFC로 향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치킨 5조각에 감자칩이 들어있는 메뉴가 65흐리브나(약 3,000원), 맥주 500ml 한잔은 22흐리브나(약 990원). 1인당 4천 원에 치킨과 감자칩 맥주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이 나라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식자재가 얼마나 풍요로우면 이런 가격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일까. 정말 우크라이나 물가는 사랑이다.
키예프에서의 3박 4일이 후다닥 지나가 버리고 우리는 이제 우크라이나의 또 다른 도시인 '리비우 Lviv'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저렴한 비행기표 하나 믿고 아는 것 하나 없이 헐랭 헐랭 도착한 나라였지만 양파처럼 까도 까도 매력이 계속해서 나오는 이 나라를 어찌 사랑해 마지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의 단순한 이 애정은 아마도 구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는 '리비우 Lviv'에 도착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넘쳐나게 될지도 모른다. 옛말에 '넘치는 것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만 지금 나는 넘쳐도 좋다. 지금이면 그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