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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리비우의 아무 매력 대잔치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우크라이나 #리비우 #올드시티

#아무매력대잔치 #2017년7월19일~25일


<우크라이나 서쪽 국경 근처에 위치한 리비우>

쌀쌀한 우크라이나의 아침. 분주함으로 한껏 달궈진 기차가 수도 키예프에서 서쪽으로 540km 떨어진 '리비우 Lviv'로 향한다. 기차 안 풍경은 여느 때와 비슷하다. 더러는 잠을 자고 더러는 객실 내 설치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긴 이동 시간의 무료함을 달랜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끼고 여행 시작 이후 단 한 번도 업데이트되지 않은 휴대폰 속 노래들을 한 곡 한 곡 꾹꾹 눌러 듣는다. 그런 내 곁에서 남편은 간밤 다운 받아 둔 미드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리비우 곳곳을 누비는 귀요미 트램>

기차의 덜컹이는 박자에 맞추어 끝도 없이 펼쳐진 풍요로운 풍경을 바라보다가 얼핏 선잠에 들었을 때 리비우를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낯선 언어로 이루어진 그 말소리는 마치 꿈속을 떠다니는 듯했다. 우리는 서둘러 정신을 챙겨 넣고 가방을 둘러맨 채 또다시 새로운 도시에 발을 내디뎠다.

<웨딩 촬영지로 인기 폭발 중인 리비우>

키예프보다 조금 더 따듯함이 감도는 거리에 서서 아무나 붙잡고 도심으로 가는 버스에 대해 물었다. 다행히 버스 정류장은 기차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 틈에 서서 행인이 일러준 번호의 버스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 생각보다 기다림이 짧아 좋았지만 큰일은 따로 있었다. 경쟁자가 너무나 많았던 것.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우리에게는 커다란 짐도 있다. 일단은 가방을 멘 채로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아, 멀어도 그냥 걸어갈걸. 후회가 시작된 바로 그때부터 까딱 잘못하다간 대자로 넘어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들이 이어졌다. 얼마 못가 결국 우리는 생존을 위해 버스에서 내리기로 했다. 본의 아니게 버스비도 내지 못한 채로 말이다.

<거리에서 쭈글탱 된 미니언즈 탈. 이게 뭐라고 귀엽고 난리.>

고난의 시간을 지나 따가운 한낮의 햇볕을 이겨내며 15분쯤을 걸었을까. 서서히 새것의 흔적이 사라지고 시간의 자국이 선명한 낡은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어 있다는 '리비우 올드 시티 Lviv Old City'였다.

<금언니의 아름다운 자태에 지갑이 열린다 열려.>

조금 지나친 낭만을 곁들여 나는 첫눈에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 사실 나보다도 남편의 리비우 앓이가 더 절절하다. 이 도시는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이 화수분처럼 넘치고 또 넘친다. 때문에 이 사랑스러운 도시를 비밀에 부쳐두고 싶었지만 그래도 우리 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쉬우니 그 매력 포인트들을 낱낱이 공개해볼까 한다.

<아늑해서 밖에 나가기 싫어지는 호스텔 도미토리. 출처: 부킹닷컴>

우선은 우리가 묵게 된 호스텔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올드 시티의 중심가에 위치한 '드림 호스텔 리비우 Dream Hostel Lviv'는 일단 시설이 호스텔계의 7성급 호텔이다. 커튼이 달린 아늑한 원목 침대에는 개인 등과 두 개의 콘센트가 배치되어 있어 굉장히 편리했고, 베개와 침구도 항상 뽀송뽀송했다. 게다가 장기 여행자의 커다란 가방까지 거뜬히 보관 가능한 락커가 있어 귀중품 분실의 위험도 적었다. 무엇보다 모든 호스텔의 만년 고민거리인 화장실과 샤워실도 층마다 각각 2개씩 배치되어 있어 언제나 기다림 없이 쾌적한 사용이 가능했다.

<주방이 이렇게 멋진 호스텔은 처음>

게다가 4층에 마련된 공용 공간과 주방 시설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필요한 조리 기구들이 완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넓어서 언제든 편리하게 눌러앉아 있기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퀄리티의 호스텔을 깡패 같은 가격 단돈 128흐리브나(약 6,200원)에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주일치 숙박료를 단박에 지불하고 이 도시를 마음껏 누비기로 했다.

<거리 공연의 종류도 다양한 리비우>

거리에 나가면 그때부터는 눈 관리를 잘해야 한다. 볼거리들이 너무 많아 눈이 휙 하고 돌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양한 악기들로 버스킹을 펼치는 사람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며 뚜벅뚜벅 걷다 보면 낡은 도시의 틈새로 알록달록한 벽화들이 톡 하고 튀어나온다.

<도시의 매력에 매력을 더해주는 독특한 벽화들>

그렇게 튀어나온 벽화 앞에서 우크라이나의 우월한 미녀들이 현란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 찍기를 할 때 나는 그들의 포즈를 힐끔힐끔 암기한다. 그리고 차례가 돌아오면 비교적 짧고 난감하지만 자신감만큼은 우주 최강인 나의 몸에 암기했던 포즈를 풀어내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할 줄 아는 포즈라고는 브이와 손하트뿐이었지만 이젠 아니다. 나에겐 방금 막 배운 따끈따끈한 우크라이나 미녀 포즈가 있으니까! 후후훗.

<난 가끔 이렇게 하늘을 봐.>

거리가 이렇게 예쁘다 보니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들도 참 많았는데, 그 때문인지 드레스 샵 홍보를 위한 마네킹이 곳곳에 함정처럼 배치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어쩐지 예쁘다기보단 괴기스러움이 더 강한 마네킹. 하지만 이곳은 깨끗한 새것보다 조금은 괴기스러워도 낡고 오래된 것들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아마도 리비우의 이런 독특한 분위기는 해묵은 시간과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내 스타일이다.

<푸틴 얼굴이 그려진 화장실 휴지부터 양모 제품들까지.. 다 사고 싶다>

이쯤 되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없으니 거리 곳곳에 들어 선 마켓들도 하나하나 눈여겨 보아주도록 한다. 양털로 만든 양말부터 레이스 액세서리까지 당장 지갑이 열릴 듯한 소품들이 한가득이지만 이런 것들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얼굴이 그려진 화장실 휴지이다. 우크라이나의 동쪽 지역과 남쪽의 크림 반도는 아직도 러시아와 분쟁이 한창이기 때문에 이렇게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기념품들을 만들어 팔고 있다고 한다. 표현하는 것에 있어 항상 조심스러움이 있는 우리와는 다르게 그들의 패기 넘치는 표현의 자유가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분위기도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

<동전 제조 오함마 실습을 마치고 기념샷>

눈으로 침도 바르고 꿀도 바르며 한차례 거한 아이쇼핑을 마친 뒤 아쉬움으로 길을 걷다 전통 의상을 입은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손에 오함마(?) 같은 망치를 들고 무언가를 쾅쾅 내리치고 계셨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동전 제조 중. 우와. 이런 건 또 처음 본다. 중세 시대에는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화폐를 뽑아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며 나도 큰돈 내고 체험에 가세해 본다.

<힘과 돈을 넣어 연성한 옛날 동전>

참가비는 50흐리브나(약 2,250원). 아무것도 없는 민자 동전을 받아 무늬 틀이 들어있는 작은 철제 기구에 넣고,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가지 힘을 하나로 뭉친 듯한 스윙을 오함마에 실어 기구를 내려치면 동전 완성! 사실은 내가 힘을 제대로 못 실어서 아저씨가 풀 스윙으로 마무리 망치질을 해주셨다. 때땡큐!

<동네 언덕 올라가서 도시 내려다 보기>

폭주하는 리비우의 매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거리 구경이 그저 똑같고 심심하다 싶은 날에는 조금 걸어 '하이 캐슬 공원 High Castle Park'으로 가면 된다. 언덕 위 성을 중심으로 조용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이곳은 여행객들 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리비우의 전경을 내려다 보기 딱 좋은 포인트이다. 올라갈 때 조금의 인내심이 요구되지만 충분히 가볼만한 가치가 있다.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아요.>

사실 나는 이 공원보다 이곳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재미있는 정원이 더 좋았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집 앞 자투리 공간에 각종 인형과 장난감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곳이었는데 가까이 가면 혼날까 봐 멀리서 사진만 한 장 찍고 돌아왔다. 호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무언가 아련한 추억 여행 같은 느낌도 드는 요상한 공간. 왜 이런 공간을 만들었는지 지구를 뚫고 나갈 정도로 궁금했지만 우크라이나어는 당최 이해가 안 되는 관계로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아 궁금하다. 궁금해.

<마트 물가가 넘나 저렴해서 자꾸만 미소가 지어짐>

이렇게 다니다 배가 고프면 근처 대형 마트로 쪼르르 달려가면 된다. 시식 코너는 없지만 충격적인 물가로 여행자들을 반겨주는 우크라이나의 마트들. 계란 한 알에 0.90흐리브나(약 40원), 고퀄리티 치즈와 햄들은 대략 30~60흐리브나(약 1,300원~2,600원) 정도면 넉넉히 구입할 수 있다. 초콜릿이나 쿠키 같은 것들은 비닐에 사고 싶은 만큼 담은 뒤 무게로 가격을 매기는데, 낱개로 포장된 초콜릿 40개 정도를 담으니 15흐리브나(약 670원)가 나온다. 뭐 이런 어이없는 물가가 다 있을까.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계속 실실 웃음이 난다. 흐흐흐흐.

<매끼 이렇게 사 먹어도 지갑이 당최 줄어들질 않네? ㅎㅎ>

보통은 이렇게 장을 봐다가 호스텔 주방에서 요리를 해 먹는다. 그러다가 질리면 밖으로 나가 멋진 야외 테이블이 있는 레스토랑에 앉아 주문을 한다. 이곳에 있는 레스토랑들을 거의 대부분이 각자의 개성이 담긴 수제 맥주를 가지고 있다. 맛은 제각각이지만 가격은 한잔에 25~35흐리브나(약 1,200원~1,600원) 사이로 비슷비슷하다. 거기에 파스타나 스테이크 같이 고급진 음식을 더해도 둘이서 우리나라 돈으로 15,000원 정도면 충분하다. 얼마나 대단한 곡창지대길래 이런 물가가 가능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1,200원 맥주 펍의 위엄. 세상 흥겨운 밴드까지!>

맥주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자랑을 해야겠다. 우리가 묵는 숙소 옆 건물에는 매일 시끄러운 풍악이 울려 퍼지는 3층짜리 거대한 맥주집이 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어 매번 지나다니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떠나기 전날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내부는 붉은 조명이 깔려 있었고 중앙에는 맥주를 제조하는 거대한 양조 기계가 들어앉아 있었다. 그리고 2층 앞부분에는 7명의 빅밴드 공연자들이 앉아 실시간으로 생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런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바로 뽑아져 나온 생생한 생맥주를 마시는데 필요한 돈은 단 25흐리브나(약 1,200원). 우리도 몫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두 잔의 맥주를 시킨 뒤 사람들과 박수를 치며 빅밴드 공연을 즐겼다. 지금껏 많은 나라를 거쳐 왔지만 가성비는 우크라이나가 정말 최고인 듯하다.

<이게 다 합쳐서 3만 5천원입니다, 여러분!>

심지어 공산품인 옷도 저렴하다. 길에서 만난 한국 여행자에게 우크라이나 옷 값이 싸다고 추천을 해줬더니 3만 5천 원 내고 이걸 다 샀다며 인증샷을 보내왔다. 재킷 세벌, 청바지 한벌, 양말 한 켤레, 신발 한 켤레. 어휴. 끝이 없는 매력에 이젠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구석구석 사랑스러운 포인트들이 가득>

이밖에도 트램 길 옆 체리 와인 가게나 녹이 슨 공구 모양의 초콜릿을 판매하는 특이한 초콜릿 가게까지, 구경하다 하루가 감쪽같이 사라질 듯한 장소들이 차고 넘치는 리비우! 일주일이나 있었는데 아직도 매력거리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곧 떠나야만 하는데 아직도 아직이라니. 리비우에서의 마지막 밤 아쉬움을 이끌고 호스텔 1층에 위치한 바에 남편과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난 열흘간의 우크라니아와 나눈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보송보송 한 꺼풀씩 쌓여가는 첫눈처럼 설렘이 가득한 그 이야기들을 말이다.

<호스텔 리셉션에서 당차게 한 컷>

오랜 된 돌 틈 사이로 아직 못다 이룬 여행의 로망들이 고요히 잠든 새벽, 아쉬움 잔뜩 묻은 가방을 메고 기차역으로 향한다. 사랑했던 도시를 떠나는 발걸음이 유독 무거워 한걸음 내딛고 돌아보고, 또 내딛고 돌아보기를 반복한다. 언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떠남의 순간 늘 피어오르는 나른한 질문에 어떤 답도 시원하게 내놓지 못한 채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기차에 오른다. 출발의 묵직한 쇳소리가 경쾌한 덜컹거림으로 변할 만큼 빠르게 도시가 멀어져 간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속도로 우리의 여행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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