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헝가리 #부다페스트
#중앙시장 #도나우강 #세체니다리
#성스테판바실리카성당
#오르간콘서트
#2017년7월26일~28일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기차에는 방이 있다. 영화 해리포터에서 나올 법한 느낌의 클래식한 공간에 창문이 하나 있고 작은 테이블과 거울이 있다. 그 안에 세명이 앉을 수 있는 소파가 마련되어 있는데 벽 쪽으로 접혀있는 쿠션 2개를 들어 올려 고정시키면 총 3개의 침대가 만들어진다. 국경을 건너 여권 검사도 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편히 누워서 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탑승만으로도 낭만이 폴폴 피어오르는 기차 안에서 해리포터처럼 요상한 맛이 나는 젤리라도 먹어야 하는데 그런 게 있을 리 없으니 대신 리비우에서 사 온 초콜릿을 꺼낸다. 하나만 먹으려고 꺼냈는데 어느새 다섯 개의 포장지가 테이블 위에서 나풀나풀 춤을 춘다. 매번 이렇다. 리비우 초콜릿은 지나치게 맛있어서 '적당히'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이 참 어렵다.
새벽 6시 반쯤 출발한 기차는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한 번 헝가리 국경에서 한 번 정차하여 기나긴 출입국 수속을 거친 뒤 저녁 6시 반쯤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역 앞으로 나가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왜인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보통 국가 이동 전에는 환율이나 도착한 터미널에서 숙소로 가는 방법 들을 미리 검색해 두는데,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그냥 기차표 하나 덜렁 사서 건너온 것이다. 살짝 당황했으나 우선 환전소 전광판을 보고 대충 계산을 한 뒤 ATM에서 헝가리 돈을 뽑았다.
그리고 역 안에 위치한 맥도널드에 가서 하루 종일 먹은 게 없는 속에 햄버거를 넣어주며 와이파이를 시도했다. 이용자가 너무 많아 구글 지도만 겨우 로딩되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숙소로 가는 길은 검색할 수 있었다. 이로써 집은 찾아갈 수 있겠군. 예전 같았으면 멘붕 와서 가네 못 가네 스트레스 빵빵 받았을 텐데, 이제 우리 둘 다 꽤나 여유가 생긴 듯하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여전히 비가 내리는 역 앞으로 나가 횡단보도를 건넜다. 운 좋게도 버스 정류장이 바로 앞이라 몸이 젖기 전 지붕을 만날 수 있었다. 비 오는 날은 여러모로 불편하지만 그것을 상쇄하는 운치가 있어서 좋다. 그래서 서둘러 예약해둔 호스텔로 가는 대신 잠시 서서 방금 전 떠나온 역을 올려다보았다. 우울한 하늘 아래 낡은 기차역이 나른하게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끝내주는 낭만이다.
낭만에 취한 채 버스를 타고 거리를 휘적휘적 걸어 묵직하고 거대한 문이 달린 건물 앞에 도착했다. 호스텔이라고 쓰인 초인종을 누르니 인터폰에서 예약 여부를 묻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철컥하고 문이 열렸다. 두 손으로 힘껏 밀어야 열리는 오래된 문 안에는 어둑어둑한 복도가 있었고 그 끝에 영화에서나 보던 낡고 오래된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음... 그 영화가 호러였나 로맨스였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호러였다면 나는 저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이한 현상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고로 타지 않고 걸어 올라가기로 한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본능적으로 발소리까지 줄여가며 살금살금 올라왔지만 막상 와서 보니 아기자기한 호스텔. 움직일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는 나무 재질의 바닥과 공용 공간 한쪽에 배치된 벽난로가 참 마음에 든다.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를 한 뒤 공용 공간 소파에 앉아 온 몸의 힘을 쭉 뺀 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차근히 내려앉는 어둠 사이로 노란 불빛들이 슬며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 빛들은 나른한 풍경 속 느리게 느리게 땅으로 향하는 빗방울의 품에 안겨 길 위에 황금빛 자락을 만든다. 사람들은 그 빛을 등대 삼아 자박자박 물기 가득한 발걸음으로 낭만의 도시를 걷는다. 아름답게.
밤이 아름다운 도시의 낮은 어떨까. 우리는 아침 일찍 호스텔에서 제공되는 조식을 먹고 '중앙 시장 Central Market Hall' 구경에 나섰다. 분명 시장이라고 해서 왔는데 왜 눈 앞에 동화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이 있는 걸까. 뾰족한 지붕이 마치 달콤한 설탕시럽 발린 초콜릿 맛의 비스킷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상상으로는 벌써 올라가서 이곳저곳 맛을 보고도 남았다.
충분히 달달해진 눈을 가지고 실내로 들어가니 새콤달콤한 색감의 과일과 야채 가게들이 나를 반긴다. 꾹 하고 누르면 톡 하고 과즙이 흘러나올 듯한 생동감에 나도 모르게 시큼한 침이 입안 가득 고인다. 아침을 먹고 나왔음에도 다시 한번 기분 좋은 식욕이 돋아 오른다. 점심은 뭘 먹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구경에 열을 올리는데 이번에는 주렁주렁 소시지가 매달려 있는 상점들이 나타났다. 세상에 소시지 종류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게다가 하나같이 다 먹음직스럽다. 하지만 가격이 착하지 않아서 패스. 이럴 때면 우리는 늘 우크라이나가 그리워진다.
2층에는 기념품 가게들이 있었는데 역시나 아기자기하고 예쁜 소품이 많았다. 가격은 유럽답게 비싸다. 대충 훑어보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식당들을 뿌리친 뒤 전망이 좋은 곳에 서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가게들이 마치 미니어처처럼 보였다. 그 사이로 장을 보는 사람들과 나처럼 구경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생동감은 시장에 생기를 불어 넣고 이제 막 시작한 헝가리 여행에 왁자함을 더해준다. 풍선처럼 천천히 부풀어가는 이 기분. 역시나 낭만이다.
시장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가는 곳마다 시간의 색을 고스란히 입은 건물들이 신사처럼 골목과 골목 사이에 앉아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사이는 언제나처럼 하늘의 차지이다. 현실 같지 않은 하늘은 골목 끝 소실점으로부터 부드럽게 밀려 나오고 그 바람에 신사의 머리와 어깨에 구름의 자락들이 하나 둘 올라앉는다. 그리고 나는 그 아래를 걷고 있다. 노란 택시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밀려 나오는 하늘에 머리가 아찔했다가 아치형의 창문이 짓는 미소에 안도한다. 이런 거리를 하루 종일 걷다 보니 허파에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찬다. 구름빵을 먹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이들 동화 속 이야기처럼 나도 알고 보면 땅에서 1cm 정도 떨어져 둥둥 떠다닌 것일 수도 있다. 부다페스트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광장의 곁엔 '성 스테판 바실리카 성당 St. Stephen's Basilica'이 있었다. 다리가 아파 성당 앞 계단에 앉아 있는데 오르간 연주회를 알리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은 연주자가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포스터를 보고 있으니 돌아가신 작은 고모가 생각났다. 내가 어릴 적 고모는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셨다. 호리호리하게 마른 몸으로 거대한 오르간에 앞에 앉아 두줄로 된 건반과 거대한 발 건반을 능숙하게 다루던 그 모습은 정말 미스터리에 가까웠다. 나에게는 한 줄로 된 피아노 치는 것도 벅찬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당 5700포린트(약 2만 5천 원)나 하는 오르간 공연 티켓 두장을 덜컥 사버렸다. 울림이 좋은 성당 안에서 오르간 소리를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공연 시작 시간은 저녁 8시. 숙소로 돌아가 마트에서 산 재료로 간단히 저녁을 만들어 먹고 다시 성당을 찾았다.
화려한 성당 안 소박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다 보니 멋지게 차려입은 오르간 연주자가 관객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무대 중앙에 서서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앞에 마련된 작은 오르간에 자리를 잡았다. 파이프가 엄청나게 커다란 그런 오르간을 상상했던 나로서는 조금 실망이었지만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그런 생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건반 하나에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가 실린 소리들이 성당의 물리적 공간을 메워 나갔다. 그 소리들은 내 안에 빈 공간에까지 흘러들어 작은 소름이 되어 빠져나갔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오르간이 신이나 천사의 목소리를 흉내 낸 악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는 의도적으로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했으니 그것에 오르간이 동원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한 소리이니 말이다.
공연은 1시간 반 정도 오르간 연주와 바이올린 그리고 성악이 적절히 버무려져 풍성하게 치러졌다. 끝날 때에도 정중한 인사를 건네는 연주자와 성악가들에게 우리는 손바닥이 따끔할 만큼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천천히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점잖았던 낮의 도시는 어디 가고 금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도시가 화려한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나우강 위를 가로지르는 세체니 다리에 들렀다. 역시나 낮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세계 3대 야경 중 하나라 불리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낮의 수수함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이 화려함의 정점을 보려면 '어부의 요새'나 '국회의사당' 앞으로 가야 하지만 이미 우리는 방전 상태. 아직 이틀이 더 남았으니 제대로 된 야경 탐방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한다.
아침에 눈을 뜨니 약간의 몸살기가 있어 푹 쉬다가 오후쯤 거리로 나갔다. 오늘은 저녁에 특별한 약속이 있다. 네팔 트레킹에서 우연히 만나 인도 우다이푸르에서 인연이 된 지연 언니와 성범 오빠가 부다페스트에 오시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인도에서 헤어지면서 언니 오빠는 러시아로 올라가고 우리는 아프리카로 내려왔었다. 그렇게 여차저차 각자의 루트대로 돌아다니다가 얼마 전 안부차 메신저를 보냈을 때 서로의 일정이 마치 짠 것처럼 헝가리에서 겹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소오름. 세계는 넓지만 만날 사람은 만나고 또 만나게 된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동네 백화점에도 들어가 보고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투박하게 포장이 깨진 길 조각에 알록달록 색을 칠해 놓은 센스를 보고 감탄도 하고, 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 믿을 수 없는 푸르름에 잠시 찡함을 느끼다 보면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가 버린다.
약속한 역 앞에서 언니 오빠를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여전히 따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정겨웠다. 반가운 마음으로 포옹을 한 번하고 봐 두었던 동네 펍으로 가서 시원하게 맥주잔을 부딪혔다. 그동안 서로가 보았던 것 그리고 또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이 깊어갔다. 한창 신이 오르고 있는데 11시가 되자 가게 주인이 문을 닫는다고 우리의 회동에 방해를 놓았다. 아쉬운 마음에 언니 오빠가 묵고 있는 에어비앤비로 따라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리고 그 조금 더가 새벽 3시까지 이어졌고 결국 우리는 그 집에서 잠까지 자게 되었다. 예약한 호스텔 놔두고 외박을 하게 될 줄이야ㅋ 이마저도 낭만이다.
다음날 우리는 새벽같이 일어나 다시 호스텔로 돌아가야 했다. 예약을 이틀만 해두어서 체크아웃 절차를 밟아야 했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짐을 둘러맨 채 하루 더 묵기 위해 따로 예약한 호스텔로 이동한다. 같은 호스텔에서 1박을 추가하고 싶었지만 주말이라 자리가 없어서 이런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이동은 튼튼한 두 다리로. 공원을 가로질러 아직 잠에서 덜 깬 도시를 누비는 기분도 꽤나 매력적이다. 너무 재미있어서 아껴 읽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소설처럼 하루하루 넘어가는 시간의 장이 아쉬운 부다페스트. 하지만 결말이 궁금해 결국에는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되는 이 도시는 단어 그대로 낭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