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헝가리 #부다페스트 #겔레르트언덕
#부다성 #어부의요새 #야경
#영웅광장 #버이더후녀드성
#2017년7월29일~30일
이른 아침 새로운 숙소에 짐을 맡겨 두고 거리로 나섰다. 체크인 시간까지는 아직 네다섯 시간이나 남은 상황이라 본의 아니게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게 된 셈이다. 그 덕에 아직 여름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결이 고운 햇볕을 맞으며 세체니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중세를 떠올리게 하는 멋진 동굴 교회를 지나 점점 가파르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겔레르트 언덕 Gellert Hill'으로 향했다.
정상에 올라 숨을 고른 뒤 도나우 강을 따라 늘어선 파스텔톤의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 올 정도로 작아진 도시가 꼭 장난감 같이 느껴졌다. 나는 돌 난간에 기대 턱을 괴고 서서 이 광경을 천천히 음미했다.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구름이 따라 흘렀고 어느새 뜨겁게 내리쬐는 정오의 햇볕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간간이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아무렇게나 자라버린 앞머리를 기분 좋게 쓸어 넘겨주었다. 나이를 서른 하나씩이나 먹었어도 기분 좋은 한낮의 햇볕에는 어리광을 부릴 수밖에 없다. 그 아니면 또 누가 이런 응석을 받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해를 만나야만 한다.
아름다운 전경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이 언덕 위에는 하늘로 두 팔을 치켜든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상은 소련군이 헝가리에서 나치를 몰아낸 기념으로 만든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탄생한 '자유'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이후 헝가리는 소련의 공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1956년 10월에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1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반소, 반공 운동을 일으켰다가 수만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런 길을 걸어 지금의 민주주의를 이루어 낸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가 되자마자 그들은 헝가리 땅 위에 세워진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모든 동상과 건물을 제거하기로 했다. 겔레르트 언덕 위의 '자유의 여신상'만 빼고 말이다. 과거를 상기하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남겨진 이 동상은 헝가리인들의 아픔이자 결연한 의지이다.
아름다운 경치가 전부인 줄 알았던 언덕 위에서 진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받으니 여행의 무게가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때로는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비우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만 때로는 이렇게 삶과 가치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을 채우기 위해서도 여행은 필요하다.
언덕을 내려와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를 돌아보니 온통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들 뿐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파워워킹을 했더니 너무 배가 고팠다. 그래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헝가리 전통 수프라는 '굴라쉬 Gulyas'와 피자를 주문했는데 맛은 없었고 가격은 비쌌다. 배만 안 고팠으면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않고 열심히 걸어 다닌 보람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입은 결코 즐겁지 않았지만 배는 적당히 불릴 수 있었던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위치한 '부다왕궁 Budai castle'으로 갔다. 왕궁은 방어를 위해 높은 언덕 위에 지어져 겔레르트 언덕 못지않게 멋진 전망을 자랑했다. 입장은 무료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전시들을 보기 위해서는 따로 표를 구입해야 힌다. 우리는 그냥 풍경만 보고 돌아갈 예정이기 때문에 성 안에 마련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난간에서 조금 떨어진 뒤쪽에 놓인 벤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그 뒤로 펼쳐진 부다페스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 놓인 성의 일부분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근사한 프레임을 만들어 주었다. 그 안에는 푸른 하늘도 있고 잘 정돈된 도시도 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떼어다가 우리 집 창가에 걸어두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한국에 돌아가서도 지금 이 순간을 잊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후 3시가 다 되도록 쉬지 않고 다녔더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 이제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로구나. 우리는 궁전에서 나와 대중교통을 타려 했지만 티켓을 파는 기계가 보이지 않았다. 부다페스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며칠간 이용할 수 있는 패스를 사던가 미리 1회권을 여러 장 발급한 뒤 사용하기를 추천한다. 티켓 기계가 은근히 없다. 필요할 때 항상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또 숙소까지 먼길을 걷고 또 걷고 또 걸어 돌아가야만 했다.
이번에 옮긴 숙소는 확실히 전에 묵었던 곳에 비하면 별로였다. 하지만 숙소가 위치한 골목의 풍경이 치명적이었다. 제각각의 화려한 컬러로 사람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레스토랑들. 이것은 명백한 유혹이다. 가난한 여행자들의 눈은 화려한 거리의 색감에 정신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여유로운 여행자들의 지갑은 아름다운 유혹의 순간에 경계 없이 물질을 빼앗긴다. 무엇을 빼앗겼을 때 화가 아닌 희열이 찾아 들 수도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헝가리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된 이 호스텔은 굉장히 낡은 외관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호스텔의 포인트는 낡은 외관이 아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는 저예산 트윈룸을 예약했다. 하지만 리셉션에서 안내해준 방은 화장실이 딸려있는 트윈룸이었다. 업그레이드를 해주었다고 생각하고 기분 좋은 마음에 샤워를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화장실 안에 문이 두 개라는 사실이 심히 거슬렸다. 나는 거슬림을 참지 못하고 우리 방으로 연결된 문 말고 나머지 다른 문의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려 보았다. 문이 열린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옆방 되시겠다. 읭?ㅋㅋㅋ 이게 뭐죠. 화장실 문은 방 안에서는 잠글 수 있으나 화장실 안에서는 잠글 수 없어서 사용 중 누군가가 들어올 것에 대한 스릴을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구조인가. 헛웃음이 다 나온다. 하하하하.
다행히 우리가 들어갔을 때 옆 방에 아무도 없어서 마음 놓고 샤워를 하고 낮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렇게 오후 6시까지 꿀잠을 잔 뒤 숙소 앞에서 기로스 한 접시를 사 먹고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근처 버스 정류장에 가니 또 티켓 기계가 없다. 휴. 어쩔 수 없으니 강을 따라 조금 가다가 돌아오기로 하고 걷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불빛이 내려앉은 헝가리의 야경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세체니 다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많이도 걸었다 정말. 하지만 강가에 서서 이 멋진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욕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 다리는 아프지만 조금만 더 걸어서 야경의 꽃이라는 '어부의 요새'까지 가보자!
집을 떠나 걷기 시작한 지 2시간 반이 흘렀다. 나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밤에 이렇게 먼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의문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원망이 되려는 찰나 눈앞에 주황빛으로 물든 요새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버스표 사는 기계를 만나지 못했음에도 굳이 이곳까지 걸어온 나의 무모함의 타당성을 말이다.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위험하고 험난하며 닿기 어려운 곳에 있다. 때문에 고난의 과정들은 아름다움을 더욱 극대화시키고,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성채의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요새의 아치형 창문 사이로 보이는 국회의사당의 야경도 내 머리 속 잊을 수 없는 흔적이 되었다. 눈으로 들어와 머릿속을 헤집고 그대로 마음의 문까지 활짝 열어젖히며 나가버리는 거칠 것 없는 이 불빛들이 오랫동안 온몸 구석구석 남을 것 같은 기분이다. 화려하면서도 단아하고, 사치스러우면서도 검소한 헝가리의 야경. 오늘 나는 앞으로 만날게 될 모든 밤 풍경의 기준을 얻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2시간 반의 긴 여정이 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요새 앞 버스 정류장에서 티켓 기계를 만날 수 있었다. 어휴, 천만다행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아침이 올 때까지 잠에서 깨지 않았고 밤 사이 두근두근 화장실에 갈 일이 없어 또 한 번 다행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또다시 짐을 챙겨 들고 그저께 방문했던 지현 언니와 성범 오빠의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다음 국가인 세르비아로 넘어가는 기차가 밤 11시 이후 출발이라 그때까지 머물 곳이 없었는데 언니 오빠가 밥도 주고 짐도 맡아 주신다고 해서 냉큼 알겠다고 했다. 게다가 언니 오빠의 에어비앤비 바로 앞에 우리가 기차를 타야 할 역이 있었다. 웬 떡인가.
지현 언니가 정성껏 차려준 짜장밥과 된장국을 먹고 다 같이 '영웅광장 Heroes Square'까지 걸어갔다. 날은 조금 더웠지만 하늘이 맑아 광장이 더욱 웅장해 보였다. 이곳은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광장인데 중앙에 위치한 36m의 탑 꼭대기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광장 주변으로는 역대 왕과 영웅들의 조각상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이곳의 역사적 중요성을 상기시켜준다.
광장을 지나 조금 걸어가다 보면 '버이더후녀드 성'이 나타나는데 이것도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우리는 성 안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에 앉아 더위도 식힐 겸 생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지나온 여행과 앞으로의 여행에 관해 이야기하며 웃기도 하고 여행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들도 털어놓았다. 우리보다 3개월 정도 빠르게 여행을 시작한 언니 오빠는 점차 끝으로 향해가는 여정에 하루하루가 아쉽다고 했다. 그 마음이 어떨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아 한편으로 마음이 쓸쓸해졌다. 시작의 설렘이 끝남의 아쉬움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시작은 언제나 끝과 함께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그 끝에 새로운 시작이 함께 하리라는 사실도.
한낮의 나들이를 마치고 다 같이 언니 오빠의 숙소도 돌아왔다. 두 사람의 배려로 우리는 그 집에서 상콤하게 샤워도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기차역에 갈 때까지 쾌적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언니는 저녁으로 닭볶음탕도 만들어 주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너무 얻어만 먹고 가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가진 것이 없는 우리는 전에 아프리카에서 샀던 커다란 하쿠나마타타 천(?)을 선물로 드렸다. 몸에 걸쳐도 되고 벽에 걸어도 되고 식탁보로도 써도 되는 이 천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부디 언니 오빠에게 기분 좋은 선물이 되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