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비난을 위한 글이 아닙니다. 각자가 가진 전제가 소통에 어떻게 방해가 되고 있는지 찬찬히 짚어보자는 차원이에요.
아마 이런 상황 겪어보신 아빠들 많을 거예요. 와이프가 저녁 회식을 마치고 늦게 들어오는 상황이거나, 또는 1박 2일로 주말 동안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옵니다. 와이프 부재의 시간에, 식사, 아이들 숙제, 잘 준비 등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챙깁니다. 그 모든 미션을 나름 열심히 합니다.
여기서 그 남편분 이런 생각하실 듯도요. 다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만, 제가 인터뷰한 여러 명의 남편 분들로부터 확인한 사항이긴 합니다.
'내가 한번 해준다.'
'군소리 않고 이렇게 다 하다니. 난 좋은 남편이야.'
'좀 부족하지만 이 정도 하면 충분해.'
이윽고 아내가 귀가합니다. 그리고 아직 되어 있지 않은 설거지나 미처 냉장고에 넣어놓지 못한 반찬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 아내가 이야기합니다.
"아니, 이거 왜 이렇게 있는 거야? 이거 누구보고 하라고 남겨놨어?"
"내가 놀고 들어왔다고 뭐라도 하나 하라고 남겨뒀네. 편하게 넘어가는 꼴을 못 보네."
이때 남편은 너무 섭섭합니다. 아내가 하라고 남겨둔 것도 아니고, 지금껏 다른 것 열심히 쭉 잘하다가 하나 미처 못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죠. 때로는 섭섭함을 넘어 일종의 절망감이 듭니다. 악의가 조금도 섞여있지 않은 나의 어떤 '미처 하지 않음'이 나의 공격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에 대한 대응이 혹독하게 엄습하니까요.
아내는 남은 가족들을 위해 철저히 준비를 마치고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러 떠났습니다. 마치 내가 해야 할 일을 남편에게 미룬 것만 같은 생각도 순간 들지만, 대등한 공동 양육자라는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 세우며 당당하려 노력했죠. 놀았건 일을 했건 밖에 오래도록 있다 집에 와서 피곤하고 바로 씻고 자고 싶은데, 나의 위치를 상기시켜 주려는 듯, 너무 지저분한 채 남겨져 있는 주방에서 분노가 갑자기 치밀어 오릅니다. 나는 화가 날 이유가 충분한데 남편은 내 화가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마치 나는 바람도 안 피고 담배도 안 피고 술도 안 먹으니 문제가 없고 괜찮은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남자와도 겹칩니다. 남편의 전제는 '경제적 수익을 더 벌어들이는 나는 이미 충분한 책임을 다했고, 아내를 위해 양육을 맡는 자신에게 credit(플러스 점수)을 줘야 한다.'인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남자분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이니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남편의 전제가 사실이라면, 사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미 그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부분이라 아내 개인이 이를 전복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이 어려운 일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논지를 공유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논지가 되면 조금씩 잠식하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각자의 시간을 어떻게 사는지 일일이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남편은 직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시간의 효율성을 이미 획득하였어요. 아내도 직장이 있거나 없을 수도 있는데, 직장이 있는 경우 대체로 수입이 더 적은 경우가 많기에 마치 남편의 시간보다 덜 가치롭거나 좀 더 헐거운 시간이라는 취급을 받곤 합니다. 직장이 없는 경우 나름의 경제적 활동을 하거나, 의미 있는 사회적 네트워킹을 하거나, 정신 건강을 위해 취미생활을 하거나 운동을 하지요. 아이들을 위한 계획에 더 시간을 쏟게 되기도 하고 아이를 직접적으로 캐어하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쓰기도 합니다. 어쨌든, 각자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서 그 시간을 힘겹게 열심히 꾸려가고 있다는 것을 서로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존중을 전제로 하여야, 설거지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거 누구 하라고 이렇게 남겨뒀어?'라고 생각하게 하는 아내의 전제,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라고 생각하는 남편의 전제를 떨어 버릴 수가 있을 겁니다.
일상에서 불러일으켜지는 논쟁의 지점들이 수시로 불쑥불쑥 치고 들어옵니다. 이것이 어떤 맥락에 있는지 생각해 보고 정리하는 것은 그 현상에서 조금 떨어져 바라보게 함으로써 냉정을 다소간 찾게 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사례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일반화되기 어려운 점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이란 말이 있듯 겹치는 지점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 지점들에서 다시 나의 상황에 적용하고 생각을 뻗어나가 볼 수 있는 것이지요.